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샤워실의 바보들안근모 지음, 어바웃어북 펴냄(2014)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국은행이 1987년 새 건물을 완공하자 ‘통화가치의 안정’이란 휘호를 내린다. 이 글은 대리석에 새겨져 신관 1층에 걸려 있다 1998년 한 서예가가 쓴 ‘물가 안정’으로 교체됐다. “수천억 비자금을 조성해 처벌받은 인사의 휘호를 중앙은행에 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노조가 강하게 철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물가 안정 같은 말을 돌에 새겨둘 만큼 중앙은행은 오래도록 인플레이션(물가상승)과 맞짱뜨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시대도 가는 것 같다. 지난주 정부와 한국은행은 “앞으로 물가 상승률을 최소한 2%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한목소리로 밝혔다. 지난 수십년간 유지해 온 물가안정 정책을 접고 경기와 고용 회복을 위해 돈줄을 느슨하게 가져가겠다는 뜻이다. 인플레가 문제가 아니라 디플레이션(물가의 지속적 하락)에 따른 고질적 경기침체를 걱정할 만큼 우리 경제의 체력이 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게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 중앙은행 연준(FED)이 지난주에 근 10년 만에 정책금리를 올렸지만 경기를 자신해서 한 것은 아니다. 2008년 이후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를 통해 밀어낸 3조달러의 유동성이 앞으로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몰라 한참 늦게 단속에 나선 것이다. 실제 연준은 앞으로 물가가 2%대의 목표치에 이르느냐를 가장 중요한 정책 지표로 삼겠다고 밝혔다. 물가를 올려 명목금리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실질금리를 낮춤으로써 경기부양을 하겠다는 의지다. 세계 경제는 2000년대 이후 저성장이 새로운 체질로 굳어지고 있다. 식당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가격이 다를 만큼의 초인플레가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이 등장한 경제적 배경이라지만 일본이 겪는 ‘잃어버린 20년’을 보면 디플레의 고통도 그 못지않다. 그래서 물가 안정과 고용 증대(경기 활성화)를 오가는 것은 중앙은행의 숙명이다. 문제는 인류가 발명한 걸작이라는 중앙은행이 서툰 조작으로 위기를 반복적으로 부르는 점이다. 지금의 위기도 따지고 보면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거품 붕괴의 충격을 상쇄하려 앨런 그린스펀의 연준이 제로수준의 금리를 너무 오래 끌고가서 잉태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 <샤워실의 바보들>은 이런 중앙은행의 아둔함을 풍자한 것이다. 온수와 냉수로 꼭지를 분주히 옮겨보지만 얼음물(실업)과 뜨거운 물(인플레이션)에 화들짝 놀라기만 하다 정작 샤워는 못한다는 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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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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