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독서무한
국정교과서는 일본 극우사관과 판박이인데
영화속 정의에 대한 갈망, 현실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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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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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오카 노부카쓰 지음/PHP문고(1997) 영화 <암살>에서 항일 독립운동진영에서 핵심인물로 활약하다 변절한 염석진은 일제의 밀정이 돼 독립운동가들을 팔아넘긴다. 광복 뒤 그는 대한민국 경찰 간부가 된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사실상 해체해버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염석진은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화려한 항일투쟁으로 탈색 변조한다. 주인공 안옥윤이 암살하려 했던 친일파 거부 강인국도 마지막 순간 자신의 무도한 민족반역행위가 모두 애국애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한다. 그도 살아남았다면 염석진처럼 민족을 구한 애국 민족주의자로 행세했을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 역사에서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행세했다’. 영화는 역사를 날조한 그 배신자들이 끝내 응징당하는 사필귀정·권선징악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력이 만든 허구(픽션)일 뿐. 현실은 염석진·강인국들이 대한민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주류세력을 형성하는 쪽으로 귀결됐다. 1천만 이상이 그 영화를 관람한 것은 자체 품질 덕이겠지만, 다른 요소도 한몫했을 것이다. 영화가 슬쩍 건드린 이 뒤틀린 한국 현대사와 그것이 초래한 뒤틀린 지금 현실에 대한 대중적 감수성, 정의나 의리에 대한 갈망, 응어리진 분노, 어쩌면 근현대의 실패가 남긴 깊은 상처로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민족적 에토스나 파토스 같은 것. 난데없는 한국사 국정교과서 파동은 이 영화적 허구가 우리의 현실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사람들은 ‘안옥윤·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하와이 피스톨’ 대 ‘염석진·강인구·조선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 마모루’라는 대결구도와 그들이 서로 싸운 유혈낭자한 현장, 그 상투적이고 전형적이고 신파조이기도 한 역사에서 여지껏 한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을 문득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 민주화투쟁과 냉전 붕괴 뒤 염석진·강인구 들이 자신들을 ‘민족중흥’의 기수로 짜 놓은 거짓 서사구조가 흔들렸다. 거짓 서사가 가리고 있던 그들의 정체성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내리면서 그들은 불편과 불안에 시달렸다. 그 근원적 해소책은 민주화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하여 비어져 나온 거짓 서사 비판, 역사 다시 보기를 민족·국가 부정의 ‘자학사관’으로 매도해 도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좌우 ‘이념대립’은 그걸 숨기는 수사일뿐. 자학사관을 읊조리는 이 ‘역사 다시 뒤집기 활극’에는 원본이 있다. 도쿄대 교육학부 교수 출신으로 1990년대 초 냉전 붕괴 이후 일본의 ‘반동적 회귀’에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후지오카 노부카쓰의 ‘자유주의사관’이다. 그 자유주의사관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난징 대학살 등은 날조거나 터무니없는 과장이며, 일본의 침략전쟁은 아시아 나라들을 서구 제국주의 침탈에서 구출해낸 아시아민족해방전쟁이다. 1990년대 초 냉전과 ‘일등국 일본’ 신화 붕괴 뒤의 충격 속에서 노부카쓰는 이른바 ‘도쿄전범재판사관’, ‘코민테른 사관’을 ‘자학사관’, ‘암흑사관’이라 규정한다. 그는 거기에 ‘대동아전쟁 긍정사관’을 대비시키고는 그 양극단을 지양했다며 ‘자유주의사관’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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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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