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독서무한
일급(날삯) 1원30전. 그중에서 밥값으로 80전씩 빠져나간다. 비 오는 날은 일이 없고 일급도 없다. 매일 일해도 한달 40원이 되지 않는 날삯 월급에 밥값만 24~25원씩. 소주 한 잔에 15전. 한 달에 두어 켤레씩 갈아 신어야 하는 지카다비(일본식 버선에 고무창을 댄 작업화) 한 켤레에 2원. 여기에 담배 사고 술이라도 마시면 남는 돈이 거의 없다. 북으로 간 작가 이기영의 <왜가리 촌> 소작농들은 심한 가뭄에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함경도 철도판(철도부설 공사) 인부 모집에 응한다. 여름에 떠났다가 찬바람 불 때 고향에 돌아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비보. 그들의 학교 다니던 딸 ‘다섯 계집애’들이 아랫말 술집 하는 봉돌이네 처 ‘호박갈보’의 꼬임에 넘어간 어머니들 말을 듣고 ‘군산의 모시 짜는 공장’ 여직공 자리를 얻어 떠났는데, 그게 완전 사기극이었다. 인신매매꾼은 서울 색주가에 딸들을 넘기면서 한 명당 50원씩 쳐서 호박갈보에게 줬고, 호박갈보는 30원씩만 어머니들에게 몸값으로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다. 당시 공사판 인부 한 달 품삯도 되지 않았던 계집아이 몸값. 문학잡지 <문장>에 실렸던 <왜가리 촌>은 광복 다음해인 1946년 1월에 발간된 <조선단편문학선집 제1집>(범장각 펴냄)에 재수록됐다. <문장>이 1939년에 창간됐다가 1941년 4월에 폐간됐으니, <왜가리 촌>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 후반쯤이겠다.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전쟁에 나선 일제의 대량 살육과 강제동원이 본격화하던 시기다. 노동착취와 인신매매가 격심해지던 시절. 자본주의화는 급진전돼 이 참봉으로 대표되는 전통 지주들은 몰락하고 도회지 자본가들 손으로 논밭이 넘어가면서, 새 지주 앞잡이가 된 마름들은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소작권을 박탈해버리는 횡포를 부린다. 1946년간 <조선단편문학선집 제1집>은 이기영 외에도 정비석, 김동리, 한설야, 이무영, 김정한, 김영수, 이태준, 박노갑, 안회남, 채만식, 이효석, 김남천, 박태원, 계용묵, 석인해, 황순원의 단편들을 담았다. 너덜해졌지만 어쩐지 친근감을 주는 얇고 누런 갱지 471쪽에 이르는 이 낡은 책을 호기심에 이끌려 뒤적였는데, 낱말 표기법 등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지만 해독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고교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페이터의 산문>을 실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 것도, 같은 시기에 입수한 단기 4291년(1958년)판 <이양하 수필집>(을유문화사 펴냄)에서였다. 스토아 철학의 한 정점인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영국 비평가 월터 페이터가 멋진 영어 산문으로 되살린 그 글을 다시 우리말로 옮겨 놓은 <페이터의 산문>을 비롯해 모두 20여 편의 에세이를 담은 <이양하 수필집> 초판이 나온 것은 단기 4280년(1947년). 한국전쟁 뒤에 찍은 <이양하 필집> 재판본 뒤표지 안쪽에는 ‘우리의 맹세’가 박혀 있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1.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1.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섬뜩한 구호는 60년이 지나도록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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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동 책지성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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