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25 19:22
수정 : 2016.08.25 19:36
한승동의 독서무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반대 주장을 중국 쪽으로 기울어진 사대주의라 매도하는 언설이 난무한다. 친미 사대주의야말로 진짜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사대주의’의 사전적 풀이는 “주체성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
1623년 3월13일,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역괴’(逆魁)로 몰아 쫓아낸 인조반정 그 다음날 실세가 된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36가지 죄를 논하면서 반정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교지를 내린다.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이삼성)에서 해당 부분을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이 인용문만 보면, 반정의 거의 유일한 이유는 중국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해 인륜과 예의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사대주의 언설의 고전 반열에 들어가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할까.
인목대비가 말한 ‘중국’은 명나라요 ‘황제’는 명의 통치자이며, 이적 금수에 비긴 ‘오랑캐’는 후금(그 13년 뒤인 1636년에 청으로 개칭)이다. 인조반정 4년 뒤인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그 9년 뒤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 숙임)의 치욕을 당했다. 국토는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수십만의 백성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그 8년 뒤인 1644년 명은 망했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초토가 된 조선이 불과 30여 년 뒤 망해가던 명의 은혜와 기득권에 집착한 집권세력의 오판으로 다시 잿더미가 된 것이다. 이를 당시 상황에선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당대 권력자들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서는 피할 수 있었거나 그토록 처참하게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의견도 많다. 백성은 ‘어육’이 됐지만, 그들 특권층은 그 뒤에도 강자에 빌붙어 세세연년 영화를 누렸다. 따라서 사대주의자들은 사전 풀이처럼 주체성 없는 자들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이야 죽든 말든 자파와 일족의 번영만 챙기겠다는 간교한 주체성의 소지자일 수 있다.
사대주의는 그 자체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단정할 순 없는, 약자가 강자를 대하는 하나의 생존전략이요 외교적 전술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건 그것이 도그마화하면서 거기에 빌붙은 내부 특권세력의 추악한 기득권 유지 전략으로 바뀔 때다.
고려 말 기철 일파와 근대 이후 친일파들의 사대주의가 그 전형일 수 있다. 오늘날의 사대주의자들은 누구일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