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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16 18:51 수정 : 2017.02.17 00:51

한승동의 독서무한

1981년 8월 평양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앞줄 왼쪽)과 그의 장남 김정남(김 국방위원장 옆) 등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김정남의 이모인 성혜랑과 그의 자녀 이남옥, 이일남(이한영). 연합뉴스
“네가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에 왔을 때 중국에서 사온 동글동글한 녹차를 기억한다. 너를 버리고 떠날 결심이 이미 자리 잡은 내 속은 모르고 이제부터 진정 이모 대접하겠다는 회오의 정을 표하던 그 괴로운 순간을 말이다. 13년 만에 일남에게서 받은 전화도 47년 만에 몽이 외삼촌을 만난 그 극적인 얘기도 너에게는 전할 수 없었다. // 아, 정남아! 너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살고 있니. 아직도 그 울타리에 갇히어 청춘이 묶인 채냐? 다 떠난 그 집에서… 너 홀로 정남아. 어째서 이 순간 죽은 일남이보다 살아 있는 네가 더 불쌍하냐. 누구보다 먼저 네가 이 책을 보리라고 느껴져 네 이름을 부른다.”

그 ‘정남’이 그저께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오늘(15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다.

정남을 ‘네가’라고 부른 이는 그의 이모 성혜랑(1936년생). 정남은 혜랑의 연년생 동생 성혜림과 2011년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소생의 장남. 13년 만에 혜랑에게 전화를 한 ‘일남’은 혜랑의 아들 리일남. 황장엽이 망명한 1997년 2월 분당의 한 아파트 현관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피살당한 이한영의 본래 이름이다. 1982년 정남의 교육을 맡으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혜랑, 여동생 남옥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갔으나 2주일 만에 어학연수를 하던 중 사라졌다. 혜랑은 그가 ‘납치’당했다고 했고, 피살사건 보도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일남과 정남은 사촌간. 1960년생 일남이 1970년생인 정남보다 10살 위였다. ‘몽이’ 외삼촌은 혜랑·혜림의 오빠 성일기. 모스크바에서 혜림과 함께 살던 혜랑은 1995년, 그곳 코스모스 호텔에서 47년 만에 오빠를 만났다. 그 오빠는 전쟁 중 태백산 빨치산으로 남파됐다가 1952년에 체포, 전향해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진명·이화여중을 나와 김일성대학 졸업 뒤 작가동맹위원회 작가가 된 혜랑은, 혜림이 김정일과 비밀리에 가정을 꾸리던 시절 평양 충성동 ‘관저’에 정남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서울 풍문여중, 평양예술학교를 나온 혜림은 원래 작가 이기영의 장남과 결혼해 아이들까지 두었다. ‘인민상’을 받은 유명배우가 된 혜림은 1970년부터 김정일의 숨은 아내가 됐고, 그 다음해 정남을 낳았으나 1973년 모스크바로 떠났다. 1996년 2월, 혜랑은 제네바에 간 기회를 틈타 서방으로 ‘탈북’했다.

충성동 관저 총관리자로 정남을 키운 이는 일제강점기 잡지 <개벽>과 <매일신보> 기자 출신으로 <로동신문> 국제면 편집부장을 지낸 혜랑의 어머니 김원주였다. 그 남편이자 혜랑·혜림·일기의 아버지 성유경은 경남 창녕의 부유한 양반집안 둘째 아들이었다. 도쿄 유학 시절 단 한 번 일본 사회주의자 다카스 세이토의 강연을 듣고 사회주의자가 됐다. 광복 뒤 북으로 간 사람. 이강국·임화 등이 보성고보 시절 학우들이었다.

2000년에 초판이 나온 혜랑의 <등나무집>(지식나라 펴냄)에는 소파 왼쪽에 김정일, 그 바로 오른쪽에 정남이 앉고, 뒤쪽에 혜랑과 남옥·남일이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책 속 화보에는 그의 가족들과 부잣집 종가 모습을 간직한 창녕의 성유경 고향집 등을 담은 사진들도 있다. 1999년에 나온 혜랑의 <소식을 전합니다>(지식나라)는 가족과 그가 북에 살 때 알았던 사람들 소식으로 가득 차 있다. 남의 이산가족들에게 그들이 살아 있거나 살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쓴 책이다.

참으로 기구하구나, 인생이여!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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