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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13 18:52 수정 : 2017.07.13 20:53

한승동의 독서무한

적어도 당 제국 이후 통합된 중원 중심의 중화체제가 신라 삼국통일 뒤의 한반도를 전면적으로 침략해온 적은 없었다. 한반도를 침략한 것은 통상 ‘중국’으로 통칭되는 통합된 중화체제가 아니라 흉노, 거란(요), 몽골(원), 여진(후금=청) 등 중원 북방의 변방 노마드(유목민)들이었다. 기동력이 뛰어난 변방 노마드들은 정주 농경문화 지대인 중원을 침범할 때 동시에 또는 그 전후에 또 하나의 정주 농경문화가 자리잡았던 이웃 한반도도 쳤다.

말하자면, 고려·조선 등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북방의 대규모 침공은 거의 예외없이 중화체제가 무너지거나 흔들리면서(또는 거꾸로 노마드의 흥륭으로 중화체제가 흔들리면서) 변방 노마드들이 밀고 내려올 때 일어났다. 그 노마드들조차 일단 중원을 차지해 중화체제를 재건한 뒤엔 한반도를 침략하지 않았다. 많은 한국인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수없이 자행된 중국의 한반도 침략’ 은 실재하지 않았다. 그 침략자들을 ’중국’으로 통칭하는 건 잘못이다. 그것은 근대 이후 ‘해양세력’ 및 그들과 손잡은 우리 내부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요 잘못된 ‘기억의 정치’일 수 있다.

 2009년에 나온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펴냄)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아편전쟁 이후 중원을 유린한 서구 열강은 새로운 변방 해양 노마드들이었던가. 그들은 중화체제의 변방 일본과 함께 또는 일본을 앞세우고 중원으로 들어갔고, 그때 한반도도 짓밟았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원 진출 시도(임진왜란)는 동아시아 국제체제로서의 중화체제 주요 기둥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과 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중국에게 한반도의 건재는 중화체제 유지의 필수요건(순망치한)이었고, 직접지배보다는 조공체제를 통해 포섭한 독립적 조선이 비용면에서도 훨씬 효과적이었다.

 일본의 야망은 그 300년 뒤 서구열강과의 제휴를 통해 거의 실현되는 듯 보였으나, 중국의 저항과 일본의 중원 독점을 반대한 미국과의 다툼으로 또 좌절당했다.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한 아베 신조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는 그 역사인식 수준과 자민족 중심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천박성·저열성에서 가히 기념비적이었다. 그런 인식을 공유해 온 일본 주류 보수우파 세력에게 러일전쟁 직후 통감부 설치와 함께 사실상의 식민지배하에 들어간 조선사람들의 비참과 능욕은 관심밖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여지껏 풀리지 않고 있는 근본원인도 거기에 있다.

 전후 일본 전범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일본을 냉전 교두보로 육성한 미국이 냉전붕괴 뒤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앞세우고 미일동맹을 강화하면서 한반도 분단선은 또다시 신흥 중국과 미국이 격돌하는 동아시아 신냉전체제의 최전선이 돼간다. 한국과 일본에게 ‘위안부’문제 합의와 군사정보 공유 등 군사협력을 압박하면서, 중국을 마주보는 평택에 대규모 미군기지를 조성하고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한 까닭이 거기에 있었나. 박기학의 <트럼프 시대, 방위분담금 바로 알기>(한울 펴냄)는 그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드 배치를 자국 핵심 이익에 반하는 중대사태로 간주하면서 한국에 집요하게 철회를 요구하는 중국. 미일동맹을 다시 중원을 노리는 21세기 해양 노마드로 간주하는 걸까? 그렇다면 시진핑은 근대에 해양 노마드에게 중국과 함께 철저히 유린당한 한국에 대해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1세기 노마드와 새로운 중화체제, 그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질곡의 한일관계, 어떻게 풀 것인가>(제이앤씨 펴냄)는 이와 관련한 풍부한 정보와 생각거리를 담았지만, 이런 역사적 고찰이 빠졌다.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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