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08 19:46
수정 : 2018.02.09 11:09
한승동의 독서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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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일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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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일본서적 코너에 눈에 띄게 전시된 책 제목이다. ‘혐한’ 서적들과 반북, 반중 서적들이 일본 출판계와 서점가를 휩쓴 지 오래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유별난 제목의 책 저자가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 일본대사라 호기심이 동했다. 일국의 대사를 지낸 사람이 예전 부임국을 굳이 그렇게 튀는 제목을 달아 ‘힐난’한 데는 뭐든 까닭이 있을 테니까.
대사(2010~2012년) 등으로 한국에서 12년을 일한 70살의 고위관료 출신인 그가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주장한 논거의 핵심은 단순명쾌했다. 과도한 빈부격차, 취업난, 낮은 출산율로 대표되는 무한경쟁 자본주의사회 한국의 가혹한 삶을 구구절절 지목한 장도 있지만, 이 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예컨대 이런 것이다.
“박근혜는 뭐니뭐니 해도 5천만 한국 국민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이었다. 그게 고작 백만 명의, 그것도 북조선(북한)의 공작원이 관여했을지도 모르는 데모(대)에 의해 탄핵결의로 내몰렸다. 이것이 민주화의 발로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문재인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나라, 김정은의 북조선을 어떤 나라보다 지지하는 정책을 내걸고 있다. 그런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정말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요미우리>를 비롯한 우파 언론들이 촛불시위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미숙 탓이라는 괴이쩍은 논평을 내며 경계한 것의 연장이다.
무토 전 대사는 박 전 대통령 퇴진을 “친북정권”에게 정권을 넘기기 위한 시나리오에 머리(생각)보다 감정(하트)이 앞서는 한국 유권자들이 넘어간 탓으로 돌렸다. “‘촛불 데모’를 친북세력인 노조와 시민단체가 분위기를 띄우고 국내 대립을 부채질해 북에 대해 면역이 없는 일반인, 특히 젊은 국민이 이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감정(하트)에 불이 붙었다. 박 전 대통령 파면(소식)을 불과 2시간 뒤라는 이례적인 신속성으로 북 미디어가 보도한 것도 일련의 활동에 적지않은 북의 관여가 있었다는 의혹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글쎄, 반북이 아닌 모든 것을 ‘좌익친북’, ‘내응 공작’으로 낙인찍고, “최악의 대통령”을 입에 올리는 이런 저급한 유언비어 수준의 황당무계한 주장이 대사를 지낸 고위관리 출신자의 얘기라고 믿어야 할지. 그야말로 일본 국가이익 프레임에 갇혀 머리보다 감정이 앞선 건 아닌지. 그럼에도 지난해 6월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그 달 중에 5쇄를 찍었다니 잘 나가는 모양이다.
책 제목에서도 보듯, ‘그래도 일본사회가 낫다’는 메시지. 마치 북쪽의 가혹한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그래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가’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한국 보수우파의 상투어구를 연상케 하는, 체제 내지 정권 지반 안정화 전략이라고 할까.
다른 한 가지 메시지는 ‘북 또는 중국 쪽으로 기우는 건 절대 안 돼!’라는 것. 박근혜 정권 때 체결된 한일간 비밀군사정보보호협정과 12·28 ‘위안부’ 합의 등 신냉전적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를 “건전”, 그것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보는 문재인 정권의 등장을 그 “파국”으로 간주하는 무토 전 대사의 난폭하고 위험한 이분법적 정세인식.
이런 무책임한 훈수꾼의 무지, 무시, 무례가 일본 외무성과 정부인들 다를까. 듣기에 따라서는 한반도 유사를 기정사실화하거나 부추기는 듯한 아베 총리의 한국 내 일본인 대피 협조 요청 보도들은 후안무치하기까지 하다. 반북전략을 한 수 가르치겠다는 기세로 평창 올림픽에 오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미국의 올림픽 방한단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승동 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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