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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1.29 20:38 수정 : 2015.06.02 14:04

장정일의 독서 일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 지음,김명남 옮김/사이언스북스(2014)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정일준 옮김/새물결(2013)

연말이면 ‘올해의 책’이 선정된다. 어쩌다 내게도 추천을 해달라는 언론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응한 지가 꽤 까마득하다. 나는 그런 요청에 응할 만한 식견도 없을 뿐더러, 내가 한 해 동안 어떤 책을 옹호해 왔는지는 그 해에 쓴 독후감에 다 나와 있다. 여기에 내가 추천 요청을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 하나를 추가하자면, 내가 좋다고 추천한 책들이 한 번도 선정되지 않았던 때문이다.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2014)는 작년에 여러 매체가 다투어 선정한 책이다. 아직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개운치 않다. 지은이는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이 점점 줄어든 이유를 인간 본성 속의 네 가지 선한 천사(감정이입·자기통제·도덕성·이성)가 또 다른 다섯 가지 내면의 악마(포식성·우세 경쟁·복수심·가학성·이데올로기)를 억제해 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이런 논증을 위해 계량역사학이 정리해 놓은 방대한 수치를 꼼꼼히 찾아 제시하고 나서, 자신의 전공인 심리학·진화심리학·실험심리학·게임이론·뇌과학에서 얻은 최신 연구 성과를 활용했다.

위와 같은 주장의 고유 판본은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것으로, 그에게 문명화란 ‘폭력을 순화하고 예의가 존중되는 사회’로 요약된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폭력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시 현상이다. 유사 이래 지속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종식하기 위해, 개인의 무력 행사권을 국가에 일임한 것이 근대의 시작이다. 부부 싸움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거기 있다.

엘리아스 비판을 겸하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새물결,2013)는 현대 문명의 비폭력성은 하나의 환상이라면서 “문명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은 폭력의 재배치, 폭력의 접근권의 재배분이었다. 우리가 혐오하도록 훈련받은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은 존재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라고 말한다. 폭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게 된 국가는 관료제·자본·기술과 연계하여 상비군을 창설했다. 모든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대규모의 육·해·공군은 엘리아스가 예찬한 문명화(중앙집중화)가 아니었다면 유지와 운영이 불가능하다. 지난 2세기 동안 벌어진 전쟁의 사망자는 그 전세기의 전쟁에서 생긴 사망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으며, 폭력이 관료제의 일부가 됨으로써 오히려 합리화되는 경향을 낳았다.

장정일 소설가
인간 본성 속의 천사가 내면의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스티븐 핑커에게 무식한 질문을 하겠다. 당신은 돌도끼와 활로 무장을 했던 미개인보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무장을 한 현대인이 천사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천사는 언제, 어느 지점에서 최신 대량 학살 무기에 대한 가없는 욕망을 멈추게 될까? 르네 바르자벨은 <야수의 허기>(문학동네, 2004)에 이렇게 썼다. “독사에게서 독이 나오듯 인간에게서는 핵폭탄이 생겨났다. 독사는 아무리 독이 없고자 해도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리고 독사가 된 것이 그의 잘못도 아니다.”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비문(非文) 아닌가 싶어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 풀리고 나니 인용문 전체가 섬?한 비문(秘文)이 되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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