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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08 22:41 수정 : 2015.10.08 22:41

장정일의 독서 일기

글쓰기는 표층과 심층을 갖는다. 예컨대 표층이란, 김소월이 1925년 매문사에서 출간한 <진달래 꽃>이며 거기에 실려 있는 127편의 시다. 글쓰기의 표층을 표현의 층위라고 할 수 있다면, 심층은 표현 이전에 있는 글쓰기,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글쓰기다. 이 개념에 따르면 김소월의 <진달래 꽃>은 김소월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다. 게오르그 베어가 말한 것처럼, 서정시인은 “시의 주제들을 인류의 공통 관심사요 감정인 사랑과 종교와 자연과 대다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역사 사건에서 가져오기 마련”이라던 그 심층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말이 때때로 이런 관련성을 폭로해주는데, 결코 이 폭로는 표절을 판정할 수 없다거나 권장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다. 창비가 만들어낸 ‘문자적 유사성’이라는 어색한 조어가 이미 증명해 주었듯이, 표층은 눈 부릅뜨고 표절을 감시하고 있다.

글쓰기의 심층은 ‘문학의 얼룩’이다. 작가들은 넓게는 게오르그 베어가 말했던 인류의 공통 감정과 역사 사건으로부터, 좁게는 먼저 나온 작가와 작품으로부터 글감을 얻는다. 작가들은 영향·참조·활용과 같은 온갖 방법으로 저 얼룩을 성체(聖體)인 양 뜯어 먹는다. 문학의 얼룩은 얼룩송아지의 얼룩처럼 더러운 것도 아니요,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얼룩이 얼룩송아지의 고유성이듯 문학의 얼룩 역시 그러하며, 창작은 거기서 시작된다.

방민호의 <연인 심청>(다산책방, 2015)이 얼룩에서 파생했다는 것은 제목으로 알 수 있다. ‘고전 다시쓰기’는 원본의 한계를 의식하고 그것을 전복하거나, 원본을 따라다니는 표준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할 때, 그리고 원본을 이 시대에 맞게 각색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빌려온 얼룩과 고투한 흔적이 없다. 작가는 심청에게 그녀를 짝사랑한 동네 오빠를 애써 만들어 주었는데, 왕비가 된 심청은 아버지를 살리고자 그를 죽게 방치한다. 이정원의 <전(傳)을 범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0)는 심청이 ‘효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공동체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연인 심청>은 공동체의 공모에 떠밀린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효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더욱 조악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장정일 소설가
원래의 심청은 송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지만, 방민호는 고려의 왕비로 바꾸었다. 원전에 나오는 여러 가지 중국적 요소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송나라 황후에서 고려 왕비로의 변화는 <심청전>의 지리적 상상력을 축소할 뿐 아니라 원전이 가진 이데올로기적 전략마저 훼손한다. 존 프랭클의 <한국문학에 나타난 외국의 의미>(소명출판, 2008)를 떠올리자면, 심청이 송나라 황후가 되는 것에는 금수(禽獸)가 거하는 외국에 조선의 효 이데올로기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다. 중국 상인에 의해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되었으니, 보란 듯이 중국의 황후가 되어 조선의 빛나는 효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국화’(自國化)로 보완되어야 할 게 아니다. 저작권이 소멸된데다가 명시성마저 확보된 고전 다시쓰기는 표절 시비로부터 자유롭다. 이런 때문에 모든 표절 판정은 저작권이나 명시성 해결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최종심급으로 작품성을 요청하게 된다. 그게 없으면, 표절이 아니더라도 자기기만이 아닌가?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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