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독서 일기
글쓰기는 표층과 심층을 갖는다. 예컨대 표층이란, 김소월이 1925년 매문사에서 출간한 <진달래 꽃>이며 거기에 실려 있는 127편의 시다. 글쓰기의 표층을 표현의 층위라고 할 수 있다면, 심층은 표현 이전에 있는 글쓰기,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글쓰기다. 이 개념에 따르면 김소월의 <진달래 꽃>은 김소월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다. 게오르그 베어가 말한 것처럼, 서정시인은 “시의 주제들을 인류의 공통 관심사요 감정인 사랑과 종교와 자연과 대다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역사 사건에서 가져오기 마련”이라던 그 심층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말이 때때로 이런 관련성을 폭로해주는데, 결코 이 폭로는 표절을 판정할 수 없다거나 권장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없다. 창비가 만들어낸 ‘문자적 유사성’이라는 어색한 조어가 이미 증명해 주었듯이, 표층은 눈 부릅뜨고 표절을 감시하고 있다. 글쓰기의 심층은 ‘문학의 얼룩’이다. 작가들은 넓게는 게오르그 베어가 말했던 인류의 공통 감정과 역사 사건으로부터, 좁게는 먼저 나온 작가와 작품으로부터 글감을 얻는다. 작가들은 영향·참조·활용과 같은 온갖 방법으로 저 얼룩을 성체(聖體)인 양 뜯어 먹는다. 문학의 얼룩은 얼룩송아지의 얼룩처럼 더러운 것도 아니요,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얼룩이 얼룩송아지의 고유성이듯 문학의 얼룩 역시 그러하며, 창작은 거기서 시작된다. 방민호의 <연인 심청>(다산책방, 2015)이 얼룩에서 파생했다는 것은 제목으로 알 수 있다. ‘고전 다시쓰기’는 원본의 한계를 의식하고 그것을 전복하거나, 원본을 따라다니는 표준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할 때, 그리고 원본을 이 시대에 맞게 각색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빌려온 얼룩과 고투한 흔적이 없다. 작가는 심청에게 그녀를 짝사랑한 동네 오빠를 애써 만들어 주었는데, 왕비가 된 심청은 아버지를 살리고자 그를 죽게 방치한다. 이정원의 <전(傳)을 범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10)는 심청이 ‘효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공동체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연인 심청>은 공동체의 공모에 떠밀린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효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더욱 조악하고 시대착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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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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