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1.14 21:18 수정 : 2016.01.14 21:18

장정일의 독서 일기

지난 해 갑자기 ‘12·28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면서 <한겨레> 지상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사와 칼럼이 넘쳤다. 먼저 1월6일치에 실린 최원형 기자의 ‘유레카’ ‘바타비아 재판 기록’을 보자. 세 문단으로 구성된 이 칼럼의 ①과 ②는, 1944년 2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 남방군 관할 간부후보생 부대가 민간인 수용소에 있던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스마랑 지역 위안소에 감금하고 매춘을 강요했던 사건을 적시한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어로 된 서류에 서명을 한 뒤 위안소로 끌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8년, 네덜란드 정부는 스마랑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임시 군사재판을 열었다. 이때 일본군 장교와 민간인 포주로 이뤄진 피고들은 ‘여성들이 자원했다’는 논리를 폈지만, 재판부는 이들에게 사형 및 2~20년 실형을 선고했다.

기자는 ③에서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벌인 위안부 강제 연행의 증거를 곧바로 조선 식민지에 적용하면서, 그것을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위안부를 총칼로 연행했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삼는다. 하지만 ①, ②는 ③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가 못된다. 전문적인 위안부 연구자들은 일본군이 중국과 남방 전선에서 현지 여성을 강제 연행하고 강간했던 행태를, 법과 행정력이 지배하던 공간인 조선에 고스란히 대입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연구자들은 총칼에 의한 ‘협의의 강제성’과 식민 지배의 필연성이 낳은 ‘광의의 강제성’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협의의 강제성은 일반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기자는 전문 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꾸준히 섭렵하고 반영해야 한다.

다음은 길윤형 도쿄 특파원이 쓴 ‘위안부 연구 일 최고 권위자 ‘한·일 12·28 합의 백지화해야’’. 이 기사는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군위안부 설치를 지시했던 공문서를 발굴함으로써 위안부 연구의 일획을 그은 요시미 요시아키와의 인터뷰다. 지은이의 책은 <일본군 군대위안부>(소화, 1998)가 오래전부터 나와 있었으나, 최근 지은이의 20년에 걸친 위안부 문제 연구 성과를 집약한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역사공간, 2013)이 나왔다. 일본 우익이 주장하는 다섯 가지 사실(Facts)을 낱낱이 반박하고 있는 이 책이 아쉬웠던 것도, 전쟁터에서 벌어진 강제성 사례를 들어 식민지 공간에서 벌어진 강제성을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③을 입증하고자 번번이 ①, ②에 의지해야 하는 이 곤경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강남에 사는 강제성(姜齊星)과 강북에 사는 강제성(姜齊星)은 동명이인이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장정일 소설가
마지막으로 1월12일치에 나온 이윤제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쓴 ‘‘위안부 합의’라는 국제적 일탈행위’. 나는 이 칼럼의 취지에 백번 공감하지만, 필자가 위안부의 숫자를 “약 20만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요시미 요시아키의 두 책은 물론이고,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 비판적인 집담회를 벌였던 네 명의 젊은 역사가들 역시 20만명 설은 과장이라고 말한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과, 그 끝에 얻어진 확실한 의견 표명 없이는 정론지가 될 수 없다.

장정일 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장정일의 독서 일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