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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새벽 세시 책읽기
주석 달린 안데르센 동화집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원작, 이나경 옮김/현대문학·3만9000원 안데르센 이야기를 빼놓고 어린 날의 ‘도덕’이란 걸 이야기하긴 힘들다. 아이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읽으며 언젠가 찾아올 비상을 기다릴 줄 알게 되고 ‘성냥팔이 소녀’를 읽으며 동정심을 알게 되었다. ‘인어 공주’를 읽으면서 자신의 전부를 거는 슬프고 맹목적인 사랑이란 게 있다는 걸 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안데르센 동화집을 다시 읽으니 새로운 게 눈에 들어온다. <주석 달린 안데르센 동화집>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은 ‘황제 폐하의 새 옷’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황제가 사기꾼들에게 속는 장면부터 새롭다. 사기꾼들은 자신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예쁜 옷감을 짤 수 있는데 그 옷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자신의 직위에 맞지 않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황제는 자신의 새 옷으로 왕국에서 누가 제 직위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내 어린 시절 기억과는 다르다. 나는 어려서 사기꾼들이 신비로운 옷감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며 사람들을 속여 넘긴 것으로 들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란 게 들통날까 두려워 속아 넘어가는 걸로 알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착한 사람이고 싶어서 내키진 않아도 속아주는 그런 전전긍긍은 어딘지 인간적으로 공감이 가는 구석이 있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냐 아니냐, 자신이 어떤 존재냐를 결정하는 것은 머릿속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은 책에서 황제를 포함해 그 옷을 본 모든 대신들은 옷감이 보이질 않자 ‘아니 어떻게 내가 내 지위에 맞지 않을 수 있어? 이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말아야지’란 생각으로 위선을 떨게 된다. 사람들이 용기와 정직함을 잃게 되는 동기가 도덕이 아니라 지위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정치판에 비추어 볼 때 크게 다가온다. 그런데 어른들이 작은 것 하나에도 자기 이해관계와 평판이 걸려 조마조마해할 때 한 어린아이가 “하지만 폐하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잖아요!”라고 말한다. 아무런 계산도 없는 순수한 마음은 늘 어른들을 당황하게 한다. ‘아무 목적이 없음.’ 이것이 결과적으로 어린아이를 용기 있게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 어른들도 그렇게 행동하면, 그러니까 직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황제의 새 집, 아니 새 옷에 대해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갖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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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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