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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15 18:53 수정 : 2015.07.17 21:51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 오겡끼데스까

오겡끼데스까~ 나카야마 미호의 외침이 이어폰을 가득 채운다. 출근길 지하철의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면 좀 올드하지만 이와이 슌지가 제격이지. 임 판사는 혼자 되뇐다. 오늘은 재판부가 바뀌는 첫날, 부장님은 소문난 벙커(같이 일하기 피곤한 재판장)에 좌배(좌배석 판사)는 초임 발령받은 웃기는 이름의 여판사. 머리가 아파온다.

스마트폰 화면을 휙휙 넘겨본다. 커튼이 흩날리는 도서관 창문에 기대서 책을 읽는 소년 후지이 이쓰키. 바람에 섬세하게 날리는 소년의 머리칼. 남자인데도 이 장면에 늘 마음을 뺏기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향수일지 모르겠다. 정독도서관에서 내내 책을 읽던 여름방학, 그 햇살 눈부시던 날의 감각이 밀려온다. 낡은 책 냄새. 창가로 불어오는 바람. 삐걱대는 걸상 소리. 그리고 소녀의 피아노 소리.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다.

스페인 궁정 왕녀를 닮은 그때 그 소녀

인근 학교 학생들을 위한 독서교실이었다. 소녀는 이웃 여중 1학년. 서로 안면을 트자는 의미로 도서관이 마련한 환영회 장기자랑 시간, 소녀는 여학생들에게 끌려나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사람 얼굴이 얼마나 창백해질 수 있는지 알았다. 긴 정적이 흐르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시작된 건반의 울림은 갑자기 시공간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 선율 때문이었을까. 기억에 남아 있는 소녀의 모습은 스페인 궁정의 왕녀 같았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 하늘하늘한 플레어스커트, 큰 눈망울. 이름이 뭐였더라.

라벨을 화제로 소녀와 조금씩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쉽지는 않았다. 소녀는 한마디 하기 전에 몇 번이나 망설였다.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보지도 못했다. 얘기하다가도 누가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면 화들짝 놀라 죄송해요 하며 꾸벅 머리를 숙이곤 했다.

매미 소리가 한참 시끄러워질 때쯤 조금씩 자기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피아노 레슨을 받는 게 죽도록 싫다는 거다. 왜? 피아노를 좋아하잖아. 또 한참의 정적. 자꾸 입을 닫아버리는 소녀 앞에서 그는 상급생의 권위를 동원하여 채근한 끝에 겨우 몇 마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이… 레슨하실 때 자꾸… 뒤에서 저를 안아요. 왜? 모르겠어요…. 어떻게? 볼을 제 목 옆에 붙이고, 두 팔을 제…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어서 오른손은 이렇게 하는 거야, 왼손은 이렇게 하는 거야 하시면서…. 피아노 레슨을 하려면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거랑 달라요. 어떻게 알아? 소녀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봤다. 그냥, 알아요. 알 수 있어요.

처음 본 그 단호한 눈동자는 곧 사라졌다. 고개 숙인 소녀에게 그렇게 싫으면 레슨 그만두지 그러냐고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힘들게 모셔온 유명한 선생님이세요. 무조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따라야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하셨어요. 아빠가 실망하실 거예요. 아빠는 실망하시면… 많이 무서워지셔요.

방학은 짧았고 소녀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법대에 가고, 고시 공부를 하며 아주 가끔 그날 느꼈던 무력함을 생각하곤 했다. 오빠가 널 지켜줄게, 어쩌고 하는 싸구려 마초 흉내는 내지 않더라도 궁정에 갇힌 왕녀에게 적어도 힘이 되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고 헤어졌어야 했다.

임 판사의 긴 상념은 맞은편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요란한 음성이 잡아채 허공에 던져 버렸다. “에구 그래그래, 그건 이 권사 말이 맞지, 맞아. 우리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야 안 그러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너무 없이 사는 집 애를 며느리로 들이면 집안 재산 다 솔솔 사돈댁으로 흘러들어간다고! 원래 너무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는 안 하는 거라 그랬어. 아 그런데 그 얘기 들었어? 김 목사님이 요즘 젊은 여자랑 바람났다는 소문이 있어!”

아주머니의 전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한 옥타브 올라갔다. 소찬휘 뺨치는 파워풀한 고음이다. 게다가 말투의 공격성도, 솔직히 외모도 래퍼 스윙스를 연상시킨다. 임 판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한다. 이 객차 안의 모두가 이 권사와 김 목사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경청해야 하는군. 하긴 인류 역사에 있어 개인의 사생활이란 근대에 와서야, 그것도 일부 계층에서 비로소 탄생한 개념이라고 봐야겠지. 현대는 고사하고 근대도 균등한 속도로 사람들에게 오지 않았어. 근대성을 누리려면 안락한 자가용 정도는 타고 다녀야겠지. 지하철이란 참으로 교육적인 공간이란 말이지.

아주머니 옆에는 귀가 유독 커 보이는 불쌍한 말라깽이 청년이, 그 옆에는 매일 스쾃 400개씩은 하는 듯한 우람한 허벅지의 쩍벌남이 앉아 있다. 믿음으로 사는 아주머니의 샤우팅 때마다 튀어나오는 타액과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벌어지는 쩍벌남의 허벅지 사이에서 청년은 압착기에 들어간 올리브처럼 쥐어짜이다가 튕겨나오듯 일어나 옆 칸으로 사라졌다. 균등하게 오지 않은 근대는 개인에게 타인의 체온으로부터 자유로울 공간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오늘은 재판부 바뀌는 첫날
부장님은 소문난 벙커
좌배석은 초임 발령받은
웃기는 이름 여판사라는데
출근길 전철, 머리 아파온다

쇼트커트녀와 함께 잡은 추행범
자존심 지키려 “얼마면 되냐”고
큰소리치다가 쇼트커트녀가 읊는
처벌내역에 얼어붙고 말았는데
근데 그녀를 어디서 보았더라

지하철에 ‘근대’가 찾아오기까지

때마침 멈춰 선 역에서 탄 누군가가 청년이 남긴 아주 좁은 공간 앞에 섰다. 단정한 바지 정장, 쇼트커트의 젊은 여성이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공간으로 파고들어 앉는다. 하지만 쩍벌남의 허벅지는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 여성이 앉았다 하여 컴퍼스의 각도가 좁아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잠시 팔짱을 끼고 있는 쩍벌남의 옆얼굴을 응시한 뒤, 후욱 심호흡을 한다. 하나, 둘, 셋. 순간 사정없이 활짝 벌어지는 그녀의 두 다리가 쩍벌남의 허벅지를 밀어낸다. 허를 찔린 쩍벌남이 놀라 쳐다보지만 팔짱 낀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다. 어느새 쩍벌남의 허벅지는 겸손하다. 꽃봉오리처럼 수줍게 오므라져 있다.

이거 놀라운데? 그런데 괜찮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쩍벌남의 표정을 살펴본다. 옆을 힐끗 쳐다보며 뭐라고 하려는 것 같더니, 그냥 슬며시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다. 자는 척하는 거다. 한 대 칠 수도 없고, 난생처음 당해보는 일에 대처할 매뉴얼이 없는 듯하다.

이 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도 믿음으로 사는 아주머니의 랩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김 목사와 바람난 여자의 코가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의느님이 주신 것인지에 관한 토론 중. 이번엔 아주머니 쪽을 빤히 응시하는 그녀. 망설임 없이 아주머니 귓가에 대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한다.

“아 글쎄, 지난주에 우리 옆집 애기 엄마가 강아지를 사왔는데 비싼 비숑 프리제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더니 알고 보니 사기당한 거래. 그냥 푸들이래요. 프랑스 혈통이라 품위가 있다는 둥 흔한 푸들과는 다르다는 둥 별소리 다 하더니 망신살 뻗쳤죠 뭐. 하하하.” 래퍼 매드클라운처럼 아주 그냥 귓속에 바로 날카롭게 때려 박아주는 목소리다. 화들짝 놀란 아주머니가 전화기를 내려놓고 쏘아붙인다. “아이구 귀야! 귀 찢어지는 줄 알았네. 아가씨 미쳤어? 멀쩡하게 생긴 여자가 아침부터 돌았나, 무슨 개소리야? 아 남의 집 개새끼 사정을 왜 내가 들어야 해?”

쇼트커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예의 바르게 반문한다. “네, 그러게요. 그런데 왜 저나 이 객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아주머니네 사정을 들어야 하죠?”

말문이 막힌 아주머니는 뭐라 반격할 말을 찾다가 객차 안 사람들의 눈초리가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세불리(勢不利). 이럴 땐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며 철수해야 한다. “어유 재수 없어!” 아주머니는 발딱 일어나서 옆 객차로 사라진다.

비로소 객차 안에는 근대가 찾아왔다. 최소한이지만 각자의 공간과 각자의 고요를 갖게 된 사람들은 잔다르크인지 돈키호테인지 모를 쇼트커트녀를 곁눈질로 힐끗거리며 손에 든 스마트폰에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화는 잠시뿐. 환승역인 다음 역에서 사람의 파도가 들이치고, 이제 객차 안은 사람도 쪽파처럼 한 단씩 묶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숨쉴 공기가 옅어지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아저씨의 불룩한 배에 얼굴을 묻을까봐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는 임 판사의 귀에 또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쇼트커트녀 앞에 미니스커트 여성이 서 있고, 그 뒤에 중년 신사가 바싹 붙어 있다가 후다닥 물러선다. 엉만튀군. 가만튀 같지는 않고. 임 판사는 성폭력 전담 판사들이 흔히 쓰는 말을 떠올렸다. 엉덩이 만지고 튀기, 가슴 만지고 튀기. 얼른 지하철 안전지킴이 앱을 열고 성추행 신고 버튼을 누른다.

비싸 보이는 가죽가방을 들고 있는 신사는 언성을 높인다. “아니 아가씨, 뭔 소리야! 내가 뭘 어쨌다 그래!” 쇼트커트녀는 단호하다. “제가 봤어요. 가방으로 가리면서 왼손으로 아까부터 이 학생 엉덩이 만졌잖아요! 학생 맞죠?” 여대생이 몸을 떨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무슨 소리야. 미친 거 아냐?”

“알아요, 당하는 사람은 그냥 알아요” 

다음 정차할 역은 법원, 검찰청, 교대역입니다. 문이 열리자 쏟아져 나가는 사람들. 그 틈에 신사가 문 쪽으로 황급히 빠져나간다. 쇼트커트녀가 바람같이 일어나 신사를 잡는다. 신사는 가방을 그녀의 얼굴에 휘두른다. 임 판사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신사의 팔을 붙잡는다. 피했지만 가방 끄트머리에 얻어맞은 그녀는 신사의 사타구니에 니킥을 가한다. 헉, 비명과 함께 주저앉는 신사의 멱살을 붙잡고 거침없이 문밖으로 끌고 나가는 그녀의 기세에 신사의 팔을 붙잡고 있는 임 판사도 질질 끌려 나간다.

신고를 받은 지하철 경찰대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신사는 곧 기세를 되찾는다. “이거 왜 이래? 내가 학생들 가르치는 사람이야. 훈장이라고. 모함하지 마.” 경관은 신사가 내민 명함을 흘깃 본다. “네, 교수님이시군요. 기안대 고오환 교수님.” 신사가 열변을 토한다. “공부하는 학생이 술집 여자같이 짧은 치마 입고 지하철에 타서는 엉뚱한 사람을 모함하고 말야. 이렇게 사람이 많고 복잡하니 밀리다 보면 실수로 닿을 수도 있는 거잖아. 실수인지 고의인지 니가 어떻게 알아!”

쇼트커트녀가 단호한 눈동자로 말했다. “알아요. 당하는 사람은 그냥 알 수 있다고요. 학생, 그렇죠?” 순간 임 판사는 감전된 듯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대생은 울먹이며 말했다. “처음엔 실수로 손이 닿은 것처럼 하더니 자꾸 치마 속으로 손가락을 구부려 만졌잖아요. 입을 제 귀에 대고 이상한 신음 소리도 내고….” “아, 아니 그건 내가 위궤양이 있어서 가끔 끙끙 앓는 소릴 내긴 하지만….”

세불리. 수컷은 최후의 자존심을 지키려 자폭공격을 하기도 한다. “그래 내가 살짝 만졌다 쳐. 그래 봤자 죽일 거야 살릴 거야. 끽해야 벌금 낼 거 아냐. 얼마야, 얼마면 되겠니!” 원빈이 빙의된 교수의 발악에 쇼트커트녀가 입을 열었다. “초범이라면 벌금 100만원에서 300만원 사이지만, 거기다 성폭력 치료도 받고, 20년간 성범죄자 신상정보등록 대상이 되어 해마다 경찰서에 가서 전신 컬러사진을 찍어야 할 거예요. 학교에서 해임될 수도 있고.” 임 판사가 자기도 모르게 덧붙였다. “동종 전과가 여러번 있다면 실형도 가능….” 교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그녀는 이번엔 여학생에게 언성을 높인다. “학생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저 같은 목격자가 없더라도 피해자인 학생이 직접 추행범을 분명히 지목하고 신고하면 처벌할 수 있어요. 신고 앱도 있고요.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욧!”

그러곤 그를 돌아본다. “그런데 혹시 여기 법원에 근무하는 분이세요? 저도 여기 오늘 첫 출근인데.” 그녀의 망설임 없는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뜯어본다. “제가 예전에 잠시 알았던 사람이랑 닮으셨어요. 되게 입바른 소리 잘하는 오빠였는데… 혹시 성함이?” 무엇에 홀린 듯 임 판사는 대답했다. “… 바른이요. 임바른.” 그녀는 활짝 웃었다. 세상이 다 따라 웃을 만큼 밝게. “어머 바른 오빠! 이제 기억나요. 저 모르세요? 저 오름이예요. 오름이. 박!차!오!름! 우와 신기하다. 오빠가 그 우배석 판사? 설마 했는데… 그럼 그렇지. 그런 웃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라구. 헤헷, 잘 부탁합니다. 임바른 판사님!”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힘차게 악수를 청하는 박차오름 판사의 손을 쳐다보며 임 판사는 낯선 평행우주로 순간이동한 듯 몸서리쳤다. 궁정의 슬픈 왕녀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니. 오겡끼데스까~.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어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리기로 했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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