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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12 18:28 수정 : 2015.07.17 21:49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3) 첫 재판

드디어 첫 재판날. 박차오름 판사는 일찍부터 출근해서 사건 메모지를 뒤적이랴 거울 보며 머리를 정리하랴 분주하다. 가슴 설레는 티가 역력한 박 판사의 온갖 자질구레한 질문에 답하며 임바른 판사는 <전쟁과 평화>에서 나타샤가 첫 무도회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판사실 문이 열리며 나타샤의 아버지 로스토프 백작…이 아니라 한세상 부장판사가 법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법복 차림을 하니 근엄한 풍모였다.

“박 판사는 일생 첫 재판이지요? 나는 초임 판사의 첫 재판날은 선배 법관으로서 축하도 하고 책임감도 느끼라는 취지로 법복을 직접 입혀주곤 했는데, 요즘은 여성 법관이 많아 조심스럽고 해서 말로 대신하고 있어요. 그 옷은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에 위임한 임무를 상징하는 겁니다. 명심하세요.” “부장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왕이면 부장님이 직접 입혀 주시면 더 좋겠어요!” 냉큼 두 팔을 양옆으로 쭉 뻗은 박 판사를 잠시 쳐다보던 한 부장은 조심스럽게 법복을 걸쳐 주었다. “자, 그럼 들어갑시다.”

초임판사가 흔히 하는 실수 1호

재판이 시작되었다. 박 판사의 초긴장 상태가 임 판사에게까지 전해졌다. 숨도 못 쉬는 듯했다. 재판부가 바뀐 뒤의 첫 재판이라 분주했다. 계속 진행해야 할 사건도 많았지만 쌍방 모두가 그동안 제출된 증거를 토대로 어서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사건도 꽤 있었다. 장사하랴 사업하랴 시간이 돈이라 재판이 오래 걸리면 손해가 막심한 사람들이다. 한 부장은 변론을 종결하고 판결 선고기일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결심(結審)하고, 선고기일은….” 원피고의 변론을 마친다는 의미의 ‘결심’이 재판장 입에서 나올 때마다 판결 초고를 작성해야 하는 배석판사들의 가슴은 철렁한다. 첫 재판부터 결심되는 사건이 많으니 정말 고생할 결심을 해야 할 듯하다.

재판이 마무리될 무렵, 한 부장이 사건번호를 부르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변호사가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바짝 긴장해 있던 박 판사는 그 변호사를 보자 반가운 기색을 하며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힐끗 이 모습을 본 한 부장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들고 있던 사건 메모지철을 법대 바닥에 탁탁 치며 마른기침을 했다. 임 판사는 아차 싶었다. ‘초임 판사가 흔히 하는 실수 1호에 대해 주의를 주는 걸 깜빡했군.’

재판을 마치고 돌아온 한 부장이 내뱉었다. “박 판사, 그 옷을 입은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구먼.” 그러곤 휙 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박 판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임 판사를 쳐다보았다. “부장님 말씀이 무슨 뜻이죠? 제가 뭘 잘못했나요?” “박 판사님, 아까 아파트재건축조합 사건 시공사 측 변호사에게 인사하셨죠? 아는 분인가요?” “네, 연수원 때 교수님이셨어요. 정말 훌륭하신 분이세요.” “박 판사님, 방청석에 그 변호사님 측과 죽자 사자 싸우고 있는 아파트 조합원들이 스무 명 가까이 있었어요. 바뀐 재판부 판사가 상대방 변호사에게 법정에서 개인적으로 알은척을 하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박 판사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네요, 이 옷을 입은 이상 교수님과 제자가 아니라 소송대리인과 재판부인데….” 너무 의기소침해진 것 같아서 임 판사가 덧붙였다. “처음에 흔히 하는 실수이니 앞으로 조심하면 돼요.”

첫 재판 후 박 판사는 매일 야근이다. 처음에는 아무리 간단한 사건도 자신이 없어 찾아보고 또 찾아보기 마련이다. 엄지손가락에 파란색 고무 골무를 끼고 사건 기록을 넘기다가 곳곳에 빨간색 노란색 포스트잇을 붙이고, 사건 메모지에 깨알같이 메모를 하고, 판례를 검색하고, 고민하고.

기록을 한참 뒤적거리던 박 판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임 판사님, 첫 재판날 결심한 사건들을 검토하고 있는데요, 영 마음에 걸리는 사건이 있어요.” “어떤 사건이죠?” “대여금 사건이에요. 식당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자식 혼사 때문에 동네에서 돈놀이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500만원을 빌렸대요. 할머니 주장은 힘들게 일해서 모두 갚았다는 것인데, 아주머니는 이자만 일부 받았을 뿐 원금은 그대로라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차용증 원본을 증거로 제출하면서 만약 돈을 다 갚았으면 차용증을 자기가 아직도 갖고 있겠냐고 하고. 할머니는 그때그때 현금으로 갚았다는데 증거는 내지 못하고.” “돈 갚은 증거가 없으면 어쩔 수 없어요.” “네, 그런데 할머니가 비뚤비뚤한 글씨로 써낸 서면을 읽다 보니 돈 갚은 경위나 일시, 장소 등이 아주 상세하고, 어느 달은 이자 갚느라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이틀을 굶었다는 하소연도 있고, 도저히 거짓말 같지가 않아요.” “1년 가까이 끌면서 동네 사람들이 여럿 증인으로 나오고 한 사건이던데 더 이상 나올 증거는 없을 거예요.”

허리가 아파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던 임 판사의 눈에 띈 것이 있다. 박 판사 책상 한편에 있는 유독 두껍고 오래되어 보이는 사건 기록이다. ‘이상하다. 첫 재판 때 저런 정도의 깡치사건(오래되고 복잡한 사건)은 없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손해배상 사건인데 이미 대법원까지 거쳐 확정된 사건 기록이다. “이 기록은 뭔가요?” “아, 그거요. 아들이 수술받다 사망해서 병원 상대로 소송했다가 증거가 없어서 진 뒤 1인시위 하는 그 할머니 사건 기록이에요.” “이미 확정된 사건이고 우리 재판부 사건도 아닌데 왜?” “하도 억울해하시길래 법적으로는 방법이 없더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 쉽게 설명이라도 해 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마음은 알겠지만 맡은 사건들도 많은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에요?” “재판부 일에 방해되지 않게 짬짬이 볼게요.” “저는 먼저 퇴근해요. 좀 쉬어가면서 하세요.” “네.”

“법정에서 아는 변호사랍시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지 않나
사건 당사자에게 상세하게
얘기 듣는다며 전활 하지 않나
당신 판사 자격 있는 사람이야?”

창백한 얼굴로 고개 숙인 박 판사
주중 내내 새벽까지 일했으면서
또 내일 납품할 판결초고 위해
상속지분 계산한다며 야근 준비
임 판사가 그 고집을 꺾었지만…

“경험 많은 사채업자? 그 근거가 뭐지?”

다음날 오후, 한 부장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박 판사! 어젯밤에 대여금 사건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었어?” 박 판사는 놀라 대답했다. “네. 기록을 보다가 제가 놓치고 있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려고….” 부장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당신 판사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법정에서 양쪽 입장을 들으며 하는 게 재판이지 한쪽에 전화질해서 하는 게 재판이야?” 박 판사가 고개를 푹 떨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상대방은 소송 경험 많은 사채업자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도저히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요.” “경험 많은 사채업자?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뭐지?” “할머니가 줄곧 그렇게….” “경험 많은 사채업자였으면 애초에 월세 보증금부터 담보로 잡았을 거야. 차용증 하나 달랑 받고 이웃에게 돈 빌려준 아주머니가 경험 많은 사채업자라?” “….” “그리고 그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 박 판사 전화를 받은 후 곧바로 상대방에게 전화를 해서 뭐라고 했는지 알기나 해? 바뀐 아가씨 판사가 사실 자기 먼 친척이다. 재판해 보나 마나 일은 끝났다. 방금도 통화했다. 내가 여기저기 힘 있는 친척들에게 말을 넣어서 그 아가씨가 맡게 된 거다. 쓸데없이 고집부리지 말고 소송 취하해라. 취하하면 내가 인간적으로 100만원까지는 해 줄 생각이 있지만 계속 고집부리면 대법원 아니라 헌법재판소까지 가도 한 푼도 못 준다. 이 소리 들은 상대방 아주머니가 민원실로 찾아와서 울고불고 난리야. 우리 부에서 판결 못 받겠다고 난리라고!”

얼굴이 창백해진 박 판사는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고 할 따름이었다. 한 부장이 혀를 차며 돌아간 뒤 판사실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임 판사는 뭐라 위로해 보려다가 박 판사의 굳게 다문 입술을 보고는 관두고 조용히 자기 일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받아보니 오지랖 대왕 옆방 정보왕 판사다. “임 프로(친한 판사끼리의 농담조 호칭), 야근 안 해? 내가 서초동 최고의 김치찌개와 육개장을 배달시킬 예정인데 박 판사와 같이 이 방으로 건너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은 잘 먹어야지.” “됐어. 그럴 분위기 아냐.” “허허, 박 판사 요즘 저녁도 제대로 안 먹고 야근하는 눈치던데 알고나 있어? 능력 있어서 일 빨리하시는 임 판사님, 그래도 주변은 좀 둘러보며 삽시다. 박 판사 얼굴이 핼쑥하던데.”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박 판사 입술에 핏기가 없다. 마음이 무거웠다. “박 판사님, 옆방 정 판사가 같이 저녁 먹자는데 어때요?” “괜찮아요. 나중에 알아서 먹을게요. 먼저 퇴근하세요.” “아니 오늘은 나도 할 일이 좀 있어서 어차피 식사해야 해요. 그리고 다른 방 판사들과 그나마 얼굴 보고 얘기 나눌 기회가 이런 때 외에는 잘 없으니 같이 가요.”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는 정 판사의 전화를 받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테이블에 신문지를 펼치고 뚝배기와 접시들을 꺼내어 각자 비닐 랩을 열심히 벗긴다. 정 판사의 너스레에도 박 판사는 조용하기만 하다. 식사를 마친 뒤 임 판사가 그릇을 치우려 일어나니 박 판사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힌다. “제가 치울게요.” 그런데 박 판사의 코에서 주르륵 핏방울이 떨어져 하얀 블라우스를 적신다. 놀란 임 판사가 티슈를 건넸다. “죄송해요. 별것 아니에요.” 임 판사가 물었다. “어제 몇 시에 퇴근했어요?” “그냥 좀 늦게요.” “몇 시에 퇴근했냐니까요.” “… 세 시 반쯤요.” “설마 이번주 내내 새벽까지 일한 거예요?” 묵묵부답이다. 자기도 모르게 임 판사의 언성이 높아졌다. “박 판사 왜 그렇게 무모해요? 평생 판사 할 거 아니에요? 프로페셔널이면 자기 컨디션 관리도 해야죠. 판사 일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평생 묵묵히 달리는 마라톤 같은 거예요. 혼자 오버페이스하다가 낙오하면 함께 일하는 재판부에 폐만 끼치는 거라고요.” 박 판사는 맺히는 눈물을 애써 참아낸다. “네, 죄송합니다.” “어서 퇴근해요. 내일 일에 지장 없게.”

임 판사는 남은 국물을 한 뚝배기에 모아 화장실로 갔다. 임 판사가 뻘건 국물을 변기에 버리고 있는데 정 판사가 따라와 히죽거린다. “뭐가 우스워?” “아니 그냥.” “그냥 뭐?” “오름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말을 참 복잡하게도 한다 싶어…. 엇! 조심해. 국물 나한테 다 튀잖아!”

방으로 돌아와 보니 박 판사는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박 판사님, 퇴근하시라 그랬잖아요!” “내일까지 납품해야 할 판결 초고가 있는데요, 내용은 다 썼는데 상속 지분 계산하고 표 만드는 게 아직 안 되어서요. 곧 다 하고 갈게요.” “그 종중 땅 사건? 피고 33명인 거?” “네.” “그거 계산 프로그램 돌리면 30분이면 할 수 있으니 놔두고 가요.” “네? 제 사건인데요. 방법을 알려주시면 제가 할게요.” “설명하는 데 30분 넘어요. 그냥 내가 할 테니 어서 가요.” 박 판사가 고개를 번쩍 든다. “전 보호가 필요한 어린애가 아니에요. 제 일은 제가 할게요.” “합의부는 팀으로 일하는 거예요! 어린애 같은 소리 말고 팀에 지장 없게 컨디션 회복이나 해요!” 잠시 임 판사를 노려보던 박 판사가 한숨을 쉰다. “알았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복잡한 상속토지 지분 계산, 밤을 새워버리다

새벽 2시. 임 판사는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번 상속이 반복된 사건이다. 그사이에 민법의 상속분 규정도 여러 번 바뀌었다. 이놈의 집안은 왜 이리 가족관계가 복잡한 거야. 자꾸 계산이 틀린다. 33명 피고가 상속한 토지 지분을 계산하니 공통분모는 127,548,960에 분자는 21315, 85260…. 분모가 억 단위다. 지분을 모두 더하면 1이어야 하는데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잠 많은 임 판사가 난생처음으로 날을 새워야 할 모양이다. 화장실에서 찬물 세수를 하고 돌아오기를 몇 번.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겨우 계산이 다 맞는다. 내용을 저장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7시까지 잠시 눈을 붙였다가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박 판사 출근하면 나와야겠다. 휴대폰 알람을 맞춰 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소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핏기 없는 얼굴의 소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연주를 하고 있다.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말리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소녀의 손끝에서 핏방울이 배어나와 하얀 건반을 적신다. 오름아, 오름아. 그만. 이제 그만.

새벽 6시. 전날 일을 마무리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일찍 출근한 박 판사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임 판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구깃구깃 구겨진 몰골이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침이 숫자로 가득한 메모지를 적시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하며 뒤척이는 그의 얼굴을 그녀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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