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4) 초등학생도 아는 정의(상)
“자, 다음은 2015나51623호 사건 나오시죠. 원고 사모임씨, 피고 최사장씨, 피고 정업원씨.” 한세상 부장판사의 호명에 세 사람이 앞으로 나와 원고석과 피고석에 각각 앉았다.
사건 내용을 메모한 메모지를 보며 한 부장이 사건 개요를 정리한다. “원고가 피고들 상대로 5천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청구한 사건이네요. 피고 최사장이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원고가 중학생인 아드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불판을 갈던 피고 정업원이 불판을 떨어뜨려 아드님 얼굴에 화상을 입혔다는 주장이고요. 1심에서 증거가 없다고 패소하여 항소했고. 그런데, 왜 아드님을도 원고로 하여 치료비 등을 청구하지 않고 어머님만 원고로 하여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만 청구하는 거죠?”
“그게 다 저 여자가 삥 뜯으려 엉터리 소송을 한다는 증거 아닙니까! 애가 화상 입었다면서 병원 진단서도 없고, 애는 나타나지도 않고. 게다가 정작 당일엔 떼 좀 쓰다가 맘대로 안 되니까 별말 없이 포기하고 가더니, 갑자기 석 달이나 지나서 뜬금없이 소송을 내고….”
삥 뜯으려 엉터리 소송?
“최사장씨! 자리에 앉으세요! 지금 원고에게 질문한 겁니다.” 날카로운 한 부장 목소리에 최사장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원고 답변하시죠.” “누굴 원고로 하든 제 맘 아닌가요? 그냥 애까지 법정에 세우기 싫어서 그랬어요.” “어차피 미성년자니까 친권자가 대리하게 되어 있는데요?” “… 애 이름이 원고로 되는 것도 싫어요.”
“하! 그리 귀하신 몸이신가?” 끼어들던 최사장이 한 부장의 험악한 눈초리에 입을 다문다.
“원고, 1심 재판 기록을 보니 원고의 주장만 있고 증거는 없네요. 피고 정업원 말에 따르면 불판을 떨어뜨린 것은 맞지만 식탁 위에 떨어졌을 뿐 사람에게 맞은 것이 아니고, 단지 불판이 떨어지는 통에 숯불에서 작은 불똥이 아드님 얼굴 쪽으로 튀긴 했는데 상처는 전혀 없었다는데요.”
“그건 저 조선족 아줌마가 뻔뻔스럽게 거짓말하는 거예요! 분명히 불판이 애 얼굴을 살짝 스치면서 떨어졌어요. 그때는 사색이 돼서 죄송하다며 얼음물을 가져오고 난리를 치더니 상처가 눈에 잘 안 띄니까 말을 바꾼 거예요.”
“설령 상처가 있더라도 별로 크지 않은 건 맞는 거네요? 유일한 증거로 제출하신 사진을 아무리 봐도 상처를 잘 확인하지 못하겠던데요.” “….”
“판사님! 저 여자가 덮어씌우는 겁니다. 우리 정씨 아주머니가 연변에서 와서 말이 좀 어눌하니까 우습게 보고 공갈을 하는 거예요! 영업집이니까 시끄러워지면 골치 아파서 몇 푼 쥐여줄 줄 알고요. 아니 설령 저 여자 말이 맞다고 쳐도,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상처 때문에 돈 5천만원을 물어내라는 게 말이 되는 얘깁니까!”
“최사장 피고! 법정이 도떼기시장입니까? 이 여자 저 여자 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판사님. 너무 억울해서 그럽니다. 이놈의 코딱지만한 고깃집 하나 하는데 삥 뜯어가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동네 건달들이 수시로 와서 고기에 술 처먹고는 그냥 가고, 신고해도 무소식이라 파출소 순사들에게 회식비라도 찔러줘야 하고, 구청 식품위생과 나리들은 봉투 안 내놓으면 현미경으로 먼지 한 톨까지 찾아내서 영업정지 먹이고, 세무서 양반들 회식 때 갈비짝이라도 미리미리 보내두지 않으면 세금폭탄 때려 맞고, 소방서 나리들은 명절 때 유독 불이 잘 나는지 뜬금없이 소방검사 한다고 나와서 떡값 받아가시고, 하다못해 동네 유선방송 피디라는 작자가 카메라 들고 와서 먹거리 Z파일을 찍는다며 겁을 줘서 용돈 받아가고, 상습범 동네 할망구는 식당마다 돌아다니며 찌개에 슬쩍 파리 집어넣고는 신고한다 기자 부른다며 악을 쓰고. 이건 뭐 정글이에요 정글. 식당 주인이 무슨 국민호구입니까? 게다가….”
방언 터진 최사장에게 압도당해 있다가 잠시 숨 돌리는 틈에 한 부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끼어든다. “최사장씨, 재판장도 잠깐 얘기 좀 해도 되겠소?”
“예, 죄송합니다.” 최사장이 고개를 꾸뻑 숙인다.
“최사장 피고가 원고를 고소했다는 얘기가 기록에 나오던데 무슨 일인가요?”
“저 미친 여…. 죄송합니다, 원고가 1심 판결 난 후에 새벽에 몰래 문 닫은 가게 유리창에 돌을 던져 박살을 냈어요. 시시티브이(CCTV) 덕에 바로 범인 찾았죠.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발악하는 거예요. 저도 손해배상 청구할 겁니다. 영업방해, 명예훼손까지 1억원요!”
한 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자, 양쪽 다 이제 재판장 말을 좀 들어보세요. 제가 20년 넘게 재판해봐서 아는데, 솔직히 재판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고통이고 손해예요. 보아하니 양쪽 모두 심각한 피해가 있는 사건은 아닌 것 같은데 언제까지 송사에 매여 사실 겁니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같이 머리끄덩이 잡고 개미지옥으로 들어가지 말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어떻습니까?”
“판사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이래 봬도 해병대 출신인데 불의를 용서할….”
“최사장씨, 거 말씀 잘 하셨소.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죠? 그런 마음가짐이시면 해결이 되겠네요. 무슨 소송을 또 하고 이러지 마시고, 조정 기일을 잡을 테니 서로 대화로 일거에 해결하세요. 조정이라는 게 서로 양보해서 합의하고 소송 끝내는 겁니다. 원고도 그렇게 하세요. 그게 양측 모두에게 최선이에요.”
확신에 찬 한세상 부장의 기세에 양측 모두 움찔했다. “말이 난 김에 내일 오후에 바로 조정하면 좋겠는데. 최사장씨, 가게 연이어 비워도 괜찮나요?”
“그러세요. 어차피 메르스 때문에 손님도 없어요.”
고깃집서 떨어진 불판에 아들이
화상 입었다며 5천만원 손배소송
가게 유리창 깼다며 1억 맞고소
원만한 해결 종용하는 재판장은
박 판사에게 조정을 일임하는데…
“오십보와 백보가 어떻게 같죠?
백보가 그만큼 더 벌을 받아야죠
사과도 용서도 합의도 먼저
무엇이 옳은지 밝힌 후에 해야죠
저 이 사건 조정하지 않겠습니다”
합의서 앞에 두고 쉴새없는 투덜거림
재판을 마치고 판사실로 돌아가며 한 부장이 좌우에 있는 박차오름 판사, 임바른 판사에게 뻐기듯 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영이라더니 내 감히 청하지는 못해도 몹시 바라던 말씀을 피고가 먼저 해 주시는구먼그래. 허허허.”
임 판사가 대꾸한다. “부장님,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씀이시겠죠?”
“응? 내가 방금 그렇게 얘기했잖아.” “…네에.”
박 판사가 말을 꺼낸다. “그런데 부장님, 지금 상태에서 조정하는 게 맞을까요? 시비를 좀더 가려야….” “시비는 뭔 시비. 더 해봐야 객관적인 증거도 없고 맞고소에 소장, 반소장만 쌓이며 세월 갈 거야. 보통 사람들 아니더구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그 위에 나는 놈 등에 붙어 다니는 놈 있고 세상 다 그런 거야. 분쟁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끊어줘야지. 진짜 큰 피해를 본 억울한 사람들 사건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이런 사건까지 오래 붙잡고 있으면 국민에게 피해가 가는 거예요. 박 판사는 초임이라 아직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데, 큰 그림을 봐야 해. 판사 일이라는 게 눈 치우는 일 같은 거야. 치워도 오고, 치워도 또 오고. 무한정 쏟아지는 사건 속에서 선택과 집중을 할 줄 알아야 해. 당사자들은 모두 자기 사건 하나에만 판사들이 매달려서 몇 날 며칠을 자기 얘기만 들어주고 동네 사람 모두 다 증인으로 불러주길 바라지. 재판에 지면 이길 때까지 열 번, 스무 번이라도 다시 재판을 하려 들고. 그 원이 풀릴 때까지 온 국민이 세금을 무한정 내서 무한정 판사를 더 뽑고 법원을 더 지어야 하나? 사법 서비스 역시 경제원칙이 적용되는 거야. 정의도 한정된 자원이라고.”
한 부장은 박 판사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간단한 사건이니까 주심판사인 박 판사가 혼자 들어가서 조정해 봐. 명심해.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야말로 돈이 엄청 문제인 사람들이야. 최사장인가 그 사람 유리창 값 톡톡히 받아내려 들 거야. 그냥 서로 소송이고 고소고 다 취하하고 없었던 일로 하는 걸로 마무리해. 양쪽 다 잘못이 있어. 종업원이 불판 떨어뜨리고 불똥 튀고 했으니 다치지는 않았어도 화는 날 만하지. 그래도 그렇지 사모임이라는 그 아줌마, 차림새 보아하니 청담동 분위기던데, 서민들 상대로 5천만원은 너무하잖아? 하긴 남들 피 철철 나는 상처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아픈 법이지.”
“… 그런데 어떤 가시는 진짜 아프긴 하죠.” 무심코 한마디 던진 임 판사는 한 부장이 노려보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다음날, 조정실에서 최사장은 소송 및 고소를 취하하고 더 이상 서로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는 합의서에 서명을 하며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저 여자 면상을 더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합의하긴 하지만 그거 스리 유리(불투명 유리)라서 일반보다 비싼 건데….”
박차오름 판사는 서명하려는 원고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원고는 증거도 충분하지 않은데 왜 소송을 제기한 거죠?”
원고가 내뱉었다. “착각한 거죠 뭐. 판사님에게 자초지종만 얘기하면 알아주실 줄 알았는데.”
박 판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합의서를 접어 찢기 시작했다. 그러곤 놀라서 쳐다보는 양측에 말했다.
“이 사건, 조정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재판기일을 정해서 통지할 테니 그때 나오세요.”
제우스에 도전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주심판사를 조정실에 보내 놓은 부장판사의 마음은 테세우스를 기다리는 아버지 아이게우스와도 같다.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면 배에 흰 돛을, 죽어서 돌아오면 검은 돛을 달기로 했기에 매일 언덕에 올라 바다를 쳐다보던 아비의 심정으로, 목을 빼고 돌아오는 주심판사의 표정을 살핀다.
“오, 박 판사. 어떻게 됐어? 어제 보니 둘 다 속으론 포기한 것 같던데.”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렇지? 수고했어. 그런데 합의서는 어디 있지?”
“죄송합니다. 제가 조정하지 마시라고 하고 돌려보냈어요.”
“뭬야!!!”
비탄에 빠진 아이게우스에서 분노로 불타는 제우스로 변신한 듯, 한 부장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박 판사 제정신이야?”
“부장님, 양쪽 다 진심으로 승복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보다 먼저, 이 사건은 원고든 피고든 어느 한쪽 말이 진실이라면 그쪽이 너무나 억울한 사건 아닌가요. 애가 불판에 맞고도 적반하장으로 공갈범으로 몰린 경우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악질 공갈범에게 소송까지 당하며 시달리는 경우거나.”
“그걸 어떻게 가리냐고! 입증책임에 따라 증거 있으면 이기고 없으면 지는 거지. 게다가 양쪽 다 오십보백보야. 경위야 어쨌든 종업원이 실수한 것 같은데 대충 얼른 사과하고 마무리하지 않고는 잘못한 거 없다고 뻗대는 식당 주인이나, 그날은 그냥 돌아갔다가 영 심사가 불편했는지 석 달이나 지나서 뒤늦게 분풀이하려고 거액을 요구하다가 재판에 지니까 가게에 돌이나 던지는 손님이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일 수 있다고.”
“오십 보와 백 보가 어떻게 같을 수 있죠? 오십 보와 백 보 사이 거리는 출발점에서 오십 보까지의 거리와 같아요. 티끌 하나 없이 고결한 사람만 상대방의 잘못을 물을 수 있는 건가요? 오십 보 백 보면 백 보가 오십 보만큼 더 벌을 받아야죠. 그리고 누구 몸에 묻은 게 겨고 누구 몸에 묻은 게 똥인지도 가려야죠. 이런 걸 가리지 않으면 누가 득을 보죠? 백 보만큼 나쁜 짓을 한 인간, 몸에 똥범벅인 인간들 아닌가요? 그런 인간들이 상대방에게도 서너 보 흠이 있으면 이걸 꼬투리 잡아 오십보백보 운운하다가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겨 묻은 개인 척하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요?”
한 부장의 매서운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박 판사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경위야 어쨌든’으로 시작하는 건 사과가 아니죠. 귀찮으니 먹고 떨어지라는 수사일 뿐. 사과도 용서도 합의도 먼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밝힌 후에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정의도 한정된 자원이라고 말씀하셨죠. 맞아요.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를 다 끝까지 밝히는 건 불가능할지 모르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기준이 액수의 많고 적음인가요? 뻔뻔한 불의가 자행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소송경제, 분쟁의 효율적 해결 다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초등학생도 아는 정의를 제대로 선언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 임무 아닌가요?”
박 판사의 눈빛이 제우스에 도전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파랗게 불타올랐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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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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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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