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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4) 초등학생도 아는 정의(하)
(지난회 내용 요약: 고깃집에서 떨어진 불판에 중학생 아들이 화상을 입었다며 최사장과 정업원을 상대로 5천만원 손해배상소송을 건 사모임. 1심 판결 패소에 앙심을 품은 사모임이 돌을 던져 가게 유리창을 박살냈다며 영업방해로 1억원 맞소송하겠다는 최사장. 원만한 해결 종용하는 재판장 한 부장은 박 판사에게 조정을 일임하지만, 양쪽이 진심으로 승복하지 않았음을 안 박 판사는 다음날 조정실에서 합의서를 찢으며 다시 재판을 하자고 말하는데…)
“그래, 그 ‘초등학생도 아는 정의’를 찾기 위해 무슨 증거를 더 조사하시려고?” 한세상 부장이 물었다.
“…최소한 당사자 본인들은 진실을 알겠죠.” 박차오름 판사의 대답이었다.
“당사자본인신문을 해보시겠다? 이렇게 원수 지경이 되어 싸우는 사건의 항소심에서?” “저도 자신은 없습니다, 부장님.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최선은 다해보고 싶어요. 이대로 입증책임에 따라 형식적인 결론을 내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형식적인 결론? 그래, 우리 위대한 정의의 여신 박 판사님께서 칼을 휘둘러보고 싶으시면 하셔야지. 눈먼 칼에 누가 찔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디 멋대로 한번 해봐!”
부장판사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정업원의 말은 또렷했고연변 말투도 거의 없었다
최사장이 놀라 쳐다보았다
정업원은 힘겹게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왜 아들을 원고에서 뺐냐는
박 판사 질문에 묵묵부답이던
원고 사모임의 입술 사이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파서요.” “네?” “아파서요.” “피고, 스치지도 않은 게 맞나요?” “2015나51623호 사건 나오세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피고 최사장, 피고 정업원, 원고 사모임이 앞으로 나왔다. 한 부장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내뱉었다. “당사자본인신문을 실시하겠습니다. 세 분 모두 오른손을 들고 피고 최사장이 대표로 선서서를 낭독하세요.” “네? 선서서라고 하시면….” “거기 증인석 위에 있지 않습니까.” “네. 선! 서!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 진술을 하면 그에 대한 제재를 받기로 맹세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우렁찬 선서가 끝나자 한 부장은 팔짱을 끼더니 박 판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박 판사가 말문을 열었다. “네, 주심판사인 제가 신문을 진행하겠습니다. 대질신문으로 동시에 진행하려고 하니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판사님! 저부터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최사장 피고는 불판이 떨어지는 순간을 보신 것도 아닌데 무슨 말씀을….” “우리 정씨 아주머니는 조선족이고 평소 말수도 없어서 말이 서툴 테니 제가 설명드릴게요. 그때 저는 카운터에 있었어요. 근데 테이블 쪽에서 와장창 소리가 나길래 놀라서 바로 뛰어가봤죠. 불판이 떨어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학생을 이리저리 살펴봤죠. 아무렇지도 않던데요? 요란한 소리에 좀 놀랐을지는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기스 하나 없이 말짱하더란 말이에요.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정씨 아줌마한테 잔소리를 좀 했죠. 아 왜 불판을 떨어뜨리고 난리냐고. 조심 좀 하라고.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학생을 부둥켜안고 요란을 떨고 있던 이 아주머니가 빽, 소리를 치는 거예요. 애가 불판에 맞았는데 어떡할 거냐면서. 그래서 정씨 아줌마한테 정말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펄쩍 뛰는 거예요. 학생한테는 스치지도 않았는데 뭔 소리냐고요.” “피고 정업원씨, 스치지도 않은 게 맞나요?” 정업원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사장이 다시 끼어들었다. “아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생각했죠. 또 삥 뜯으려는 인간 만났구나, 지긋지긋허다. 그래도 꾹 참고 고기 일인분 서비스 드릴까요? 했더니 아주 발악을 하는 거예요. 누가 보면 무슨 중환자 나온 줄 알겠더라고요. 저도 더이상 못 참겠어서 소리 좀 질렀죠. 억지 부리지 말라고. 정 억울하시면 경찰 부르자고. 경찰 소리 나오니 학생이 지 엄마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라고요. 무섭기도 하고 창피한 거죠. 중학생인 것 같던데 안 창피하겠어요? 그때서야 저 아주머니도 꼬리 내리고 아무 말 없이 휙 나가버리더라고요. 먹는 장사 하다 보면 이런 일이 허다해요. 국에 머리카락이 빠졌다는 둥, 반찬이 상했다는 둥, 고기 그램 수가 틀리다는 둥. 서비스 일인분 준다고 그러면 금세 헤벌쭉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더라고요. 판사님, 저희 같은 서민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에요. 퇴직금 다 털어넣고 대출받아서 가게 차렸는데, 장사는 안 되지, 진상은 많지, 신의도 없이 수시로 그만둔다고 성화 부리는 조선족 아줌마들은 호시탐탐 삥땅할 것 없나 살피지. 치매 걸린 노인네 요양병원비 대느라 허리가 휘는데 건물주는 세 올려달라 성화지. 이젠 악밖에 남은 게 없다니깐요.” 최사장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울음기마저 섞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던 박 판사의 시선은 그를 지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업원에게 머물렀다. “피고 정업원씨, 재중동포시지요?” “동포? …하이고, 동포란 말 참 좋네요. 내 이 나라 와서 거룩한 동포 양반들한테 눈물겨운 동포애 참 많이많이 받았네요. 동포고 뭐고 일없고, 나는 그냥 중화인민공화국 사람임다.” 정업원의 말은 또렷했고 연변 말투도 거의 없었다. 최사장은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 나이 열여섯에 브로커 따라서 전남 장성, 나이 오십 먹은 중늙은이한테 팔려 온 건지, 시집온 건지 와서는 낮에는 허리가 휘도록 농사일하고, 밤에는 또 밤대로 시달리고, 얻어맞고. 어린 나이에 애가 들어섰다가 유산한 것만도 두번인데 시어머니에 시누이들 몸종 노릇 하랴, 종일 밭일하랴 몸은 망가져만 가고. 결국 못 견디고 집 나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산 지 오래임다. 직업소개소 사기꾼놈들한테 피 같은 소개료 떼인 것만도 여러 번이고. 식당일 한다고 우스워 보이는지 새파란 것들이 반말하고, 음흉한 노인네들은 엉덩이 슬쩍슬쩍 만져대고, 잘난 아줌마들은 손님이 왕인데 부르면 빨리빨리 튀어오지 않는다며 길길이 날뛰고. 전 모국에서 하루하루가 이리 천국인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것같이 부티 귀티 나는 저 아주머니는 지 아들이 무슨 황태자인지 금지옥엽인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오만 호들갑을 떨고 유세를 떨고 그러데요. 다 큰 학생을 무슨 갓난애처럼 끌어안고는….” 최사장이 끼어든다. “그러니깐 말이에요. 오바도 그런 오바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경찰 부르자니까 슥 도망가놓고는 석달이나 지나서 뜬금포도 유분수지 오천만원 달라는 소장을 휙 던져놓고. 그것도 귀하디귀하신 자제분은 코빼기 한번 안 비치고. 어디 얼마나 심히 다치셨는지 궁금하다니까요.” “돌아보니… 오줌을 지렸더군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박 판사가 원고에게 물었다. “원고 사모임씨, 소송을 제기하면서 아드님을 원고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를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직접 피해자는 아드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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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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