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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5) 중학생 논쟁 활극
토요일 새벽 3시 반, 동창 모임에서 한잔 거나하게 걸친 한세상 부장판사는 아파트 문을 조심조심 열었다. 벌써 배달된 조간신문을 안으로 들여놓고는 소리없이 옷을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간다. 중앙정보국(CIA) 중앙컴퓨터실로 침투하는 톰 크루즈 못지않다. 다행이다. 모로 돌아누운 마나님은 곤히 잠든 듯하다.
안심하고 잠들려는 한 부장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은 찌라시야?” 순간 한 부장의 온몸이 경직된다. “…왜 나가서 다음날 조간신문하고 같이 들어와?”
토요일 낮, 한 부장은 거실 낡은 소파 오른쪽 끝에 바짝 붙어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다. 이 위치가 주방에서 가장 눈에 안 띄는 사각지대다. 오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마나님이 점심 준비를 하고 계신다. 칼질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도마를 또 새로 사야 할 것 같다.
맹랑한 후배 판사와의 입씨름 떠올리다
고장난 헬스자전거처럼 조용히 비치되어 있는 한 부장과 달리 중학생인 두 딸은 작은 아파트 안을 뱅글뱅글 돌아다니며 말싸움을 하고 있다. “언니! 또 내 옷 훔쳐 입었어?” “너도 저번에 내 옷 훔쳐 입었잖아.” “아니거든! 난 분명히 허락받고 입었거든!” “그건 니가 일방적으로 빌려간다고 한 거지. 난 아무 말 안 했어.” “그게 허락한 거잖아!” “확실하게 허락을 받았어야지.” “말도 안 돼. 게다가 내 옷은 한 번도 안 입은 새 옷이란 말야!” “어쩜, 내 옷은 헌 옷이라 마음대로 가져다 입어도 되는 거니? 그런 거야? 그런 거였구나….”
‘승부가 났군.’ 한 부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말꼬리 잡기의 명인인 첫째는 상대가 흥분할수록 더 천천히 말하기 시작한다. 먼저 흥분하는 쪽이 결국 지기 마련이다. 갑자기 첫째가 얄미워진다. 맹랑한 초임 배석판사 박차오름과 입씨름을 하다가 벌컥 화를 내곤 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나중에라도 상대방 말꼬리 잡지 말라고 엄히 훈계해야겠다.
점심식사가 시작되었다. 첫째가 걱정거리가 있다며 말을 꺼낸다. 월요일 국어시간에 수행평가로 조별 찬반토론을 해야 한단다. 8명씩 한 조가 되어 선생님이 내준 주제에 대해 찬성팀, 반대팀으로 나뉘어 토론을 하면 나머지 조 학생들과 선생님이 토론 내용을 평가한다나. 첫째가 속한 조는 의약품 개발을 위한 동물실험에 찬성하는지에 대해 토론하게 되었는데, 가위바위보에 져서 찬성팀이 되고 말았다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봉구를 애틋하게 쳐다본다.
“토론수업일 뿐인데 뭐. 너 시험공부는 싫어해도 말싸움은 도사 아니냐. 뭐가 걱정이니?” 한 부장은 한마디 했다가 마나님이 눈을 흘기자 바로 입을 닫았다. 마나님과 첫째가 대화를 이어간다. “팀장 떠맡았다고 투덜대면서도 지난주 내내 이것저것 검색해서 열심히 준비 잘 했잖니?” “그렇긴 한데… 엄마, 상대 팀장이 좀 이상해.” “누군데?” “김앤젤라.”
둘째가 끼어든다. “전교 회장 앤젤라 언니? 그 언니 완전 이쁘고 너무너무 착하잖아. 남자애들이 다 우리 학교 여신이라고 부르던데?” 마나님도 거든다. “그래, 엄마들 사이에서도 유명해. 걔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발라서 선생님들이 다 좋아하시더라. 집안도 좋다며? 아빠는 큰 건설회사 하시고, 엄마는 교육학자시고. 핀란드 교육법에 관한 책도 쓰셨던데? <아무도 뒤처지지 않는 학교>. 지난번 엄마들 모임 때 나눠주시더라고.”
첫째가 뾰로통하게 대꾸한다. “여신인지 공주마마인지 모르겠지만 시간 약속은 잘 못 지키시더라구.” 마나님이 묻는다. “무슨 약속?” “걔가 지난주에 나한테 와서는 양 팀이 토론 때 주장할 주요 내용을 교환하자고 하더라구. 그래서 우리 것은 줬는데 자기네 팀 것은 준다 준다 하면서 아직도야. 외부 봉사활동 때문에 바빠서 준비를 못하고 있다나.” “주장할 내용을 미리 교환한다고? 그래도 되는 거야?”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토론 내용이 충실해야 찬반 양 팀 모두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하더라구. 여러 조가 차례로 토론을 하는 거니까 우리 조 전체가 돋보이려면 서로 상대 주장에 대한 반론 준비를 많이 해서 수준 높은 토론을 해야 한다나? 전교 회장이 그렇게 말하니 그렇겠지 뭐.” “그래? 여튼 준다고 했으면 주겠지. 월요일에 토론인데 어쩌니?” “내일 일요일이니까 걔네 집에 한번 들러보려구. 아무리 바쁘셔도 설마 전날까지는 준비 마치겠지.”
일요일 낮, 앤젤라네 집에 갔던 첫째가 돌아왔다. 마나님이 묻는다. “그래, 받아 왔니? 얼른 반론 준비해야겠네? 어차피 너희 팀 남자애들은 시켜도 안 하는 애들이니 그냥 니가 준비하는 게 빠르겠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첫째가 대답했다. “…엄마, 나 완전히 당한 것 같아.”
“뭐? 당했다니?” “갔는데, 문도 안 열어줘. 집이 비었나 하고 전화해봤더니 걔가 받는데, 대뜸 짜증을 내더라. 시시한 수행평가 하나 가지고 자꾸 귀찮게 한다고.”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기는 특목고 입시 준비하느라 바빠서 팀 애들에게 다 맡겨서 모른대. 걔네가 게으른 걸 자긴들 어쩌겠냐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는 외대부고나 하나고 못 가면 집에서 쫓겨나니까 자꾸 공부 방해하지 말아달래.” “어쩜 그럴 수가… 선생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는 것 아니니?”
“부정행위를 공모한 공범이 되어버렸으니 말씀드릴 입장이 아니지.” 듣고 있던 한 부장이 한마디 하자 마나님의 날카로운 대꾸가 돌아온다. “당신은 집에서도 판사 노릇 할 거유?” 첫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 말이 맞아. 선생님께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어. 찬반토론인데 서로 미리 주장 내용을 교환하다니 이상하잖아. 그냥 내일 가서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뭐.”
월요일 저녁, 토론 결과가 궁금해서 일찍 귀가한 한 부장은 첫째를 붙잡고 어찌 되었는지 물었다. “아니 뭐 그냥….” 첫째는 시큰둥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토론 시간, 첫째는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으로 찬성팀 입론을 발표했다. 실험동물들이 불쌍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의학이 발전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인체실험을 함부로 할 수도 없으니 동물실험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과거와 달리 학계에서도 요즘은 최대한 실험동물들의 희생과 고통을 줄이기 위한 원칙을 정하여 실시하고 있다. 첫째는 말미에 야심적으로 준비했던 구체적인 사례를 덧붙였다. “1937년 미국에서 만든 항생제 설파닐아미드를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채 사람에게 사용하였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무려 1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만약 동물실험을 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팀 입론은 뜻밖에도 팀장 앤젤라가 아닌 남자애가 우물쭈물하며 발표했다. 동물도 고통을 느끼는 생명인데 동물실험은 너무 잔인한 것 아니냐.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으로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다. 여자들 화장품 만드느라 희생되는 동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예상 가능한 주장이었고 구체적인 사례도 없었다. ‘앤젤라가 진짜로 바쁘긴 바쁜가 보다. 남자애들이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봐서 대충 준비한 것 같군.’ 첫째는 생각했다.
말꼬리 잡기의 명인 첫째 딸수행평가 조별 찬반토론서
동물실험 찬성팀이 되었는데
상대 팀장은 ‘여신’ 김앤젤라
시작도 전에 당한 느낌은 뭐지? 동물실험 불가피성 설파하자
돌아온 ‘부작용 깨알 사례’ 반론
근데 동물과 공유 질병이 1.16%?
머리에 불이 번쩍해서 질문공세
메르스에서 페스트까지 좔좔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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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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