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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6) 직장 성희롱 사건(상)
“농담 좀 심하게 했다고 가장의 밥줄을 끊어서야 되겠습니까?”
머리를 올백 스타일로 빗어넘긴 변호사는 목소리를 높이며 팔을 휘둘러댄다. 금세 ‘국민 여러분!’을 외칠 것 같다. 역시 전직 국회의원답다. “원고는 홍보 분야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A그룹에 크게 기여한 인재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고용한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을 얼른 팀에 융화시키려는 조급한 마음에 회식도 자주 하고 친해지려 애쓰다 그만 오버한 것입니다.”
한세상 부장판사가 사건기록을 뒤적이며 말했다. “40대 후반의 부장이 20대 초반 아르바이트생에게 오빠라고 부르라며 매일 카톡 보내서 밤에 따로 만나자고 한 것이 다 그런 노력들이군요.” “그 친구가 유독 자신감이 없고 회사에 적응을 못 하길래 멘토 노릇을 하려고 한 것이죠.” “흐음, 가슴이 물방울 다이아몬드처럼 명품이라며 어머님이 누구냐고 물은 것도 자신감을 주기 위한 것이겠네요. 원고가 수풀 무성한 자기 가슴 사진을 보내며 상남자 냄새가 나지 않냐, 섹시하지 않냐 문자 보낸 걸 보면 확실히 자신감이 놀라울 만큼 넘치는 멘토긴 하네요.”
묵묵히 앉아 있던 원고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역 널듯 공들여 넘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리고 풍만한 뱃살이 출렁거렸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변호사가 변론을 이어갔다.
“…물론 실수도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어딜 만진 것도 아니고, 말 몇 마디 때문에 해고는 너무한 것 아닙니까? 요즘 사회 분위기가 남성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격의 없이 친근하게 대하다 보면 실언도 한두마디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요즘은 직장 상사고 대학교수고 할 것 없이 여직원이나 여학생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예 기피하고 꼭 필요한 업무상 연락만 하곤 합니다. 여자 때문에 오해받아 패가망신할까봐 팀워크도 스승으로서의 책임도 포기하게 되는 거죠.”
‘아, 부디 포기라도 해 주시길.’ 주심 판사 임바른은 속으로 되뇌었다. 해고무효확인소송 첫 기일이다. 피고 회사 측 변호사가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해서 다음 기일이 정해졌다. 상세한 성희롱 내용을 다음 기일에 직접 피해자 입으로 듣게 될 것 같다.
참 다양한 중년 아저씨들의 사건, 사건
오전 재판이 끝나고 구내식당에서 재판부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여자 때문에 오해받아 패가망신할까봐 여직원이나 여학생을 피한다? 여성이 무슨 취급 인가 필요한 인화물질인가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까 그 변호사 정말 어처구니없었어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까지 했죠?” 박차오름 판사가 씩씩거린다.
“그런 사람이니까 했죠. 그런 국민 또한 충분히 많으니까 그런 민의를 대변하는 거죠. 이 나라 민주공화국이잖아요.” 임 판사가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그 양반, 의원 시절 여기자들과 회식하다가 어딜 만져서 물의를 일으킨 전적도 있어요. 뭐, 그런 분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서클을 만들어도 될 정도지만.”
듣고만 있던 한 부장이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해. 변호사가 어떻든 사건에 집중해야지. 분명 원고가 한 짓이 찌질하고 추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철저히 개인적인 혐오감을 배제하고 원고의 행위에 대한 여러 징계 수위 중 해고를 선택한 것이 과도한 것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하는 거야. 혼은 당연히 내야 하지만, 정직 처분과 손해배상 등 다른 방법으로 혼내는 것은 어떤지도 따져봐야지.”
수저를 내려놓고 먹던 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한 부장이 덧붙였다. “…누구에게나 밥줄이란 목숨과도 같은 거야. 그걸 끊어버리는 일에는 신중해야 해. 40대 가장이 일생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건 가벼운 일이 아냐.”
밤 10시, 임 판사와 박 판사는 야근 중이다. 임 판사는 오늘 진행한 성희롱 사건 기록을 넘기고 있다. 회사 상벌규정상 징계사유에는 ‘회사의 위신을 실추시킨 자, 회사의 질서를 문란케 한 자, 풍기문란 등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 등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번엔 대법원 판례를 검색했다. “직장 내 성희롱의 전제요건인 ‘성적인 언동 등’이란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나 남성 또는 여성의 신체적 특징과 관련된 육체적, 언어적, 시각적 행위로서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객관적으로 상대방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대법원 2008. 7. 10. 선고 2007두22498 판결 등 참조).” 별 도움이 안 된다.
하급심 판례들을 검색해 본다. 비슷한 사안에서 해고를 인정한 판결들도 있지만, 해고는 너무 과하다고 본 판결들도 있다.
갑자기 판사실 문이 덜컥 열린다. 옆방 정보왕 판사다. “자자, 일만 하면 바보가 됩니다! 야근하다 나가서 한잔하며 부장 흉이라도 보는 것이 배석판사들의 유일한 낙 아니겠어?” “또 요 앞 호프집?” “아냐, 오늘은 오랜만에 양주 한잔하자구. 까짓것 내가 쏠게! 실은 우리 부장님이 요 앞 단골 카페에 킵해놓으신 게 한병 있는데, 언제든 맘대로 마시라고 하셨어.”
카페 여사장이 들고 온 술병에는 옆방 부장님 함자가 큼직큼직 호탕하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술은 10분의 1 정도. 꼼꼼하시기도 하지, 술병에는 남은 술 높이에 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자리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과연 대인배셔. 우리 양껏 먹고 남으면 다시 줄을 그어 맡겨 놓자구.” 임 판사가 한마디 하자 정 판사가 정색한다. “알았어 알았어. 술 모자라면 내가 새로 시켜줄게, 까짓것.”
“그나저나 요즘 학력, 지위, 직업 불문하고 참 다양한 중년 아저씨들이 도처에서 성희롱 사건을 일으키는 것 같아. 그러니 재판도 줄을 잇지. 교원 징계 사건, 해고무효확인 사건, 손해배상 사건….” 얘기하며 임 판사가 박 판사에게 술을 따라 주다가 몇 방울 흘리자 정 판사가 득달같이 병을 채 간다. “이런, 조심해야지! 양주 한방울 안 나오는 우리나라에서 피 같은 술을….”
20대 알바생한테 오빠라 부르라며매일 카톡 보내 밤에 보자 하고
성적 언동 일삼은 40대 부장의
해고무효확인소송 첫 기일
과연 해고는 너무 심한 징계일까 젊고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아직은 수컷이고 싶은 공작새들
사회적 성취가 성적 매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근자감’으로
인맥 자랑, 박사 자랑, 명품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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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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