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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07 18:44 수정 : 2015.08.21 17:33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6) 직장 성희롱 사건(상)

“농담 좀 심하게 했다고 가장의 밥줄을 끊어서야 되겠습니까?”

머리를 올백 스타일로 빗어넘긴 변호사는 목소리를 높이며 팔을 휘둘러댄다. 금세 ‘국민 여러분!’을 외칠 것 같다. 역시 전직 국회의원답다. “원고는 홍보 분야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A그룹에 크게 기여한 인재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고용한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을 얼른 팀에 융화시키려는 조급한 마음에 회식도 자주 하고 친해지려 애쓰다 그만 오버한 것입니다.”

한세상 부장판사가 사건기록을 뒤적이며 말했다. “40대 후반의 부장이 20대 초반 아르바이트생에게 오빠라고 부르라며 매일 카톡 보내서 밤에 따로 만나자고 한 것이 다 그런 노력들이군요.” “그 친구가 유독 자신감이 없고 회사에 적응을 못 하길래 멘토 노릇을 하려고 한 것이죠.” “흐음, 가슴이 물방울 다이아몬드처럼 명품이라며 어머님이 누구냐고 물은 것도 자신감을 주기 위한 것이겠네요. 원고가 수풀 무성한 자기 가슴 사진을 보내며 상남자 냄새가 나지 않냐, 섹시하지 않냐 문자 보낸 걸 보면 확실히 자신감이 놀라울 만큼 넘치는 멘토긴 하네요.”

묵묵히 앉아 있던 원고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역 널듯 공들여 넘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리고 풍만한 뱃살이 출렁거렸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변호사가 변론을 이어갔다.

“…물론 실수도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어딜 만진 것도 아니고, 말 몇 마디 때문에 해고는 너무한 것 아닙니까? 요즘 사회 분위기가 남성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격의 없이 친근하게 대하다 보면 실언도 한두마디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요즘은 직장 상사고 대학교수고 할 것 없이 여직원이나 여학생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예 기피하고 꼭 필요한 업무상 연락만 하곤 합니다. 여자 때문에 오해받아 패가망신할까봐 팀워크도 스승으로서의 책임도 포기하게 되는 거죠.”

‘아, 부디 포기라도 해 주시길.’ 주심 판사 임바른은 속으로 되뇌었다. 해고무효확인소송 첫 기일이다. 피고 회사 측 변호사가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해서 다음 기일이 정해졌다. 상세한 성희롱 내용을 다음 기일에 직접 피해자 입으로 듣게 될 것 같다.

참 다양한 중년 아저씨들의 사건, 사건

오전 재판이 끝나고 구내식당에서 재판부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여자 때문에 오해받아 패가망신할까봐 여직원이나 여학생을 피한다? 여성이 무슨 취급 인가 필요한 인화물질인가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아까 그 변호사 정말 어처구니없었어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까지 했죠?” 박차오름 판사가 씩씩거린다.

“그런 사람이니까 했죠. 그런 국민 또한 충분히 많으니까 그런 민의를 대변하는 거죠. 이 나라 민주공화국이잖아요.” 임 판사가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그 양반, 의원 시절 여기자들과 회식하다가 어딜 만져서 물의를 일으킨 전적도 있어요. 뭐, 그런 분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서클을 만들어도 될 정도지만.”

듣고만 있던 한 부장이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해. 변호사가 어떻든 사건에 집중해야지. 분명 원고가 한 짓이 찌질하고 추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철저히 개인적인 혐오감을 배제하고 원고의 행위에 대한 여러 징계 수위 중 해고를 선택한 것이 과도한 것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하는 거야. 혼은 당연히 내야 하지만, 정직 처분과 손해배상 등 다른 방법으로 혼내는 것은 어떤지도 따져봐야지.”

수저를 내려놓고 먹던 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한 부장이 덧붙였다. “…누구에게나 밥줄이란 목숨과도 같은 거야. 그걸 끊어버리는 일에는 신중해야 해. 40대 가장이 일생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건 가벼운 일이 아냐.”

밤 10시, 임 판사와 박 판사는 야근 중이다. 임 판사는 오늘 진행한 성희롱 사건 기록을 넘기고 있다. 회사 상벌규정상 징계사유에는 ‘회사의 위신을 실추시킨 자, 회사의 질서를 문란케 한 자, 풍기문란 등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 등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번엔 대법원 판례를 검색했다. “직장 내 성희롱의 전제요건인 ‘성적인 언동 등’이란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나 남성 또는 여성의 신체적 특징과 관련된 육체적, 언어적, 시각적 행위로서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객관적으로 상대방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대법원 2008. 7. 10. 선고 2007두22498 판결 등 참조).” 별 도움이 안 된다.

하급심 판례들을 검색해 본다. 비슷한 사안에서 해고를 인정한 판결들도 있지만, 해고는 너무 과하다고 본 판결들도 있다.

갑자기 판사실 문이 덜컥 열린다. 옆방 정보왕 판사다. “자자, 일만 하면 바보가 됩니다! 야근하다 나가서 한잔하며 부장 흉이라도 보는 것이 배석판사들의 유일한 낙 아니겠어?” “또 요 앞 호프집?” “아냐, 오늘은 오랜만에 양주 한잔하자구. 까짓것 내가 쏠게! 실은 우리 부장님이 요 앞 단골 카페에 킵해놓으신 게 한병 있는데, 언제든 맘대로 마시라고 하셨어.”

카페 여사장이 들고 온 술병에는 옆방 부장님 함자가 큼직큼직 호탕하게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남아있는 술은 10분의 1 정도. 꼼꼼하시기도 하지, 술병에는 남은 술 높이에 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자리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과연 대인배셔. 우리 양껏 먹고 남으면 다시 줄을 그어 맡겨 놓자구.” 임 판사가 한마디 하자 정 판사가 정색한다. “알았어 알았어. 술 모자라면 내가 새로 시켜줄게, 까짓것.”

“그나저나 요즘 학력, 지위, 직업 불문하고 참 다양한 중년 아저씨들이 도처에서 성희롱 사건을 일으키는 것 같아. 그러니 재판도 줄을 잇지. 교원 징계 사건, 해고무효확인 사건, 손해배상 사건….” 얘기하며 임 판사가 박 판사에게 술을 따라 주다가 몇 방울 흘리자 정 판사가 득달같이 병을 채 간다. “이런, 조심해야지! 양주 한방울 안 나오는 우리나라에서 피 같은 술을….”

20대 알바생한테 오빠라 부르라며
매일 카톡 보내 밤에 보자 하고
성적 언동 일삼은 40대 부장의
해고무효확인소송 첫 기일
과연 해고는 너무 심한 징계일까

젊고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아직은 수컷이고 싶은 공작새들
사회적 성취가 성적 매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근자감’으로
인맥 자랑, 박사 자랑, 명품 자랑…

왜 그리들 ‘러브샷’에 굶주리셨는지

몇 번의 건배 후, 볼이 빨개진 채 조용히 앉아 있던 박 판사가 불쑥 말을 꺼낸다. “그 사건, 전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너무나 익숙한 일이거든요.” “직접 보기라도 했어요?” “음대를 휴학하고 라이브 카페에서 피아노 치는 알바를 한 적이 있었어요. 손님들이 노래할 때 반주도 해주고요.” 임 판사가 깜짝 놀란다. “저, 박 판사네 부유하지 않았어요? 우리 중학생 때 아버님이 사업을 꽤 크게 하셨던 걸로 아는데….” 박 판사가 싱긋 웃는다. “그랬었죠. 리먼브러더스 사태 후 아빠 회사가 부도를 맞기 전까지는요. 살던 집 경매로 날아가고, 엄마는 앓다가 돌아가시고. 뭐 흔하디흔한 스토리. 여튼 휴학 후 애들 레슨, 반주, 밤에는 카페 피아노 알바. 뭐 가릴 처지가 아니었죠.” 임 판사는 놀라 멍하니 박 판사를 바라봤다.

“얘기가 엉뚱한 데로 샜네요. 여하튼 그 카페 알바하는 몇 달 동안 정말 다양한 아저씨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봤죠. 나름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는 괜찮은 카페여서 유명한 교수님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도 많이 오셨어요. 제가 피아노를 치면 박수도 많이 쳐주시고 어디서 배웠냐며 와서 묻기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제가 괜찮은 학교 학생이라는 걸 아는 순간 이분들이 하는 말이에요. 어, 내가 그 학교 어느 교수랑 동창인데 내가 오름 양 잘 좀 봐주라고 얘기해 줄게. 내가 예술의전당 사장이랑 불알친구인데 한번 큰 무대에 서볼 생각 없어?” 어느새 카페 여사장도 박 판사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왠지 수컷 공작새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있잖아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호화찬란한 꼬리를 활짝 펴고 암컷에게 어필하려고 애쓰는 공작새들. 무늬는 다양하더군요. 인맥 자랑, 미국에서 박사 한 자랑, 집안 자랑, 몸에 걸친 명품 자랑…. 저보다 스무살, 서른살 많은 어른들이 꼬맹이인 저 앞에서 필사적으로 자랑들을 하시니 감탄해드리는 것도 지치더라고요. 심지어는 해외 출장 때 샀다는 명품 넥타이를 뒤집어 라벨까지 보여줘요. 스무살 여자애 눈에는 시장표든 이탈리아제든 그냥 아저씨들이 양복에 매는 물건일 뿐이라구요. 뭐, 이 정도는 괜찮아요. 술 거나하게 하시고는 피아노 알바인 제게 굳이 와서 왜 그리도 ‘러브샷’을 조르시는지. 정말 세상에는 사랑이 부족한가 봐요. ‘러브샷’에 굶주린 분들이 그리도 많은 걸 보면. 싫다는데 굳이 손금 봐주겠다는 아마추어 역술가분들도 참으로 많고요. 전화번호를 달라는 둥,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는 둥, 그러다가 제가 계속 거절하면 나를 무시하는 거냐, 내가 이래 봬도…. 결국 못 견디고 알바를 그만뒀죠. 더 다니다가는 남성 혐오증 걸려서 연애도 못 하겠더라고요.”

카페 여사장이 한마디 한다. “그 정도를 못 견딘 걸 보면 역시 온실 속 화초였네요. 하긴 임 판사님, 정 판사님도 기껏해야 30대 초반, 박 판사님은 20대 후반이죠? 아직 다들 온실 속 화초세요. 중년 아저씨들 세계에 대해서는 제가 판사님들보다 백배는 전문가죠.” 정 판사가 지지 않고 입을 연다. “저도 나름 공부를 했다고요. 진화심리학으로 설명 가능해요. 박 판사가 적절하게 비유한 것처럼 수컷의 본능이죠. 비록 이제 짝짓기 경쟁에서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젊고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아직은 수컷이고 싶은.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사회적 성취가 바로 성적 매력으로도 이어질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죠. 출세만 하면 돈, 명예, 여자가 자연히 따라온다는 쌍팔년도 어른들 말씀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 걸까요? 공대 교수가 대학원생 제자 성희롱한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는데, 외모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미안하지만 지극히 토속적인 체형을 가진 분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여학생한테 찢어진 틈 사이로 손을 넣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지 않냐고 했대요. 거울은 보고 다니냐고 물어볼 뻔했다니까요.”

“성욕보다도 권력의 문제 아닐까?”

“결국 성욕보다도 권력의 문제 아닐까. 주로 자기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약자에게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하잖아. 자기보다 한 칸이라도 밑에 있는 존재들에게 손을 대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거라고. 갑질과 통하는 얘기지.” 임 판사가 말했다.

박 판사가 맞장구쳤다. “맞아요.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의 기본이 대등한 존재 사이의 배려와 존중이 아니라 윗사람, 아랫사람으로 서열 줄 세우기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인간적 감정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죠. 알바 시절 느낀 건데, 그렇게 공부 많이 한 분들이 젊은 여성인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 놀라울 만큼 무지하시더라고요. 수컷의 짝짓기 본능이라면, 최소한 상대를 유혹할 가능성이 있는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상대에게 전혀 먹힐 리 없고 오히려 혐오감만 일으키는 방법으로 그 본능을 표출하니 놀라울 뿐이죠. 친절함, 자상한 배려, 위트, 공감 능력이 아니라 인맥 자랑, 돈 자랑, 음담패설, 러브샷 강요, 손금 보자며 손 만지작거리기라니…. 오늘도 대기업 간부가 자기 가슴털 사진을 보내며 20대 여성을 유혹하려 든 케이스를 봤잖아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인간관계의 면에서는 미성숙 상태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왜일까 생각해봤는데, 결국 상대방을, 특히 이성을 대등한 존재로 존중하면서 관계를 형성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 같아요. 유혹이란 대등한 존재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행위예요. 상하관계에만 익숙한 사람들이 멋진 유혹자가 될 수 있을 리가요. 뭐, 중년뿐이겠어요? 클럽에서 여자 꼬시는 비법, 원나이트 비법을 가르치는 소위 ‘픽업 아티스트’에게 비싼 수강료를 내는 청춘들이 과연 어떤 중년으로 늙어갈지….”

“하이고, 고담준론들 하고 계시네.” 카페 여사장이 답답하다는 듯 테이블을 내리쳤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그냥 껄떡대고 싶은 발정 난 수캐들이 만만한 대상을 찾는 거예요. 자기 나와바리에서 자기 알량한 권력으로. 본능을 내세우며 남한테 피해 끼치는 놈들은 그냥 수캐로 취급하면 되는 거예요. 개가 아무 데나 달라붙어 허리 흔들며 흉한 짓 하려들면 몽둥이로 때려서 버릇을 고쳐야죠. 그거 하라고 판사님들이 있는 것 아녜요? 못된 놈들에게 몽둥이질하라고. 무슨 심오한 심리분석 하려 들지 마시고, 국민의 혈세로 월급 받았으면 똥개들 매질이나 좀 시원하게 해주시라니깐요!” <하편에 계속>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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