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7) 성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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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mn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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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법 주최 민사실무연구회 세미나
성공충 부장판사의 발표 끝나자
짜증 못 참고 손을 든 임 판사
한달 뒤 다가온 ‘충격과 공포’ “반칙이 아니냐고요? 맞아요
근데 한참 선배에게 치명적으로
따지면 임 판사도 상처 받아요
사람됨이 더 중요한 거니까”
수석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학술지를 휘두르며 육두문자 쏟은 사연 다음달, 임 판사의 컴퓨터 화면에 업무용 메신저 대화창이 떴다. 옆방 정보왕 판사다. ‘도서실에 가서 변협 발간 학술지 이번달 호를 보기 바람.’ ‘뭐지?’ 마침 자료 찾을 일도 있어서 도서실에 내려가 신간 학술지 코너를 찾았다. 목차를 보니 성 부장 논문이 실려 있었다. 지난 세미나 때 발표문과 똑같았다. 마지막 부분만 빼고. ‘검토의견 및 입법론적 제안’이라는 소제목하에 임 판사가 그날 발언한 내용 거의 모두가 마치 녹취라도 한 듯 적혀 있었다. 덧붙여진 것이라고는 본인이 얼마나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는지 회고하고, 법조계가 그들의 고통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며 준엄하게 질타하는 마무리뿐이었다. 충격과 공포였다. 임 판사는 학술지를 대출하여 판사실로 돌아왔다. 기가 막히게 시간 맞추어 정 판사가 나타났다. “지금쯤 도서실에서 돌아왔겠다 싶었지. 역시 빌려왔군.” 박차오름 판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임 판사는 아무 말 없이 학술지를 건넸다. 잠시 후, 박 판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 얼굴이 시뻘게진 박 판사가 손에 든 학술지를 휘두르며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 판사가 말렸다. “자자, 그만해. 한 부장님 방까지 들리겠어. 성공충 부장님, 알고 보면 한세상 부장님과 연수원 동기라구. 비록 가고 있는 길은 엄청 다르지만.” “도대체 어떤 길인 거지? 이런 분이 가는 길이란 건?” 임 판사가 물었다. “성공의 길이지.” 정 판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성 부장님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 돼. 그분은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평생 달려온 분이야. 고향이 낳은 천재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서울 법대에 낙방해서 한번 꺾이고. 법관 발령 받을 때에는 기대만큼 임관 성적이 안 나와서 지방 초임이라고 또 한번 꺾이고. 그 두가지가 한이 되어 실적으로 보여준다며 평생 미친 듯이 노력하셨대. 다른 판사들 사건 처리 통계까지 다 체크하면서 언제나 사건 처리 1등을 놓치지 않고, 대법원이 조정을 강조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정률 1등이 되고.” “평생 노력하신 건 대단하긴 하네.” “대단하지. 문제는 방법. 통계수치에만 목을 매다보니 거의 반 공갈 협박으로 조정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아서 바깥엔 원성이 자자해. 조정될 때까지 집에 가질 못하게 한대. 그리고 배석판사로 여판사가 오면 노골적으로 싫어하시지. 임신 출산으로 사건 처리 늦어질까봐. 배석들이 야근 및 주말 근무 하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여 일요일에 사건 합의하자고 하기도 하고. 가장 흉흉한 소문 들려줘? 이 근처 아파트에 사시는데 밤마다 법원 건물 어디어디 불이 켜져 있나 관찰한대. 만약 자기 배석판사들 방 불이 꺼져 있으면 전화해서 뭐 하느냐고 물어본다는 거야.” “설마…. 만찬 때 보니 엄청 사교적이고 친절하시던데? 젊은 판사들한테 일일이 잔 권하며 다니고.” “평판에도 엄청 신경 쓰시니까. 그날 건배사 시리즈 봤지? 스마트폰에 건배사며 인기 유머 시리즈며 잔뜩 저장되어 있대. 판사로서는 드물게 사회성 높고 활달하다며 윗분들에게 호평받는 비결의 하나지. 드문 건 사실이지. 내 고교 동창놈이 법원 출입기자인데, 기자에게 무관심한 대부분의 판사와 달리 성 부장님은 수시로 기자들 불러서 밥을 사신대. 한번은 거나하게 취하셔서는 ‘내가 이래 봬도 동기 중 첫번째로 고등부장이 된 놈이야. 선두주자라고. 난 국가관도 투철하고, ○○지역 대표성도 있고. 비서울대라서 오히려 대법관 티오도 있고. 이제 결승점이 머지않았다니까’ 이러시더래.” “그럼 우리 한 부장님의 길은 뭐지? 고등부장 승진에도 관심 없고, 통계에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본인 하고 싶은 대로 재판하잖아. 원장님 앞에서도 거침없이 할 말 다 하시고.” “제일 무시무시한 판사, 출포판의 길이지. 출세를 포기한 판사.” 학술지를 다시 꼼꼼히 읽고 있던 박 판사가 말했다. “볼수록 놀라워요. 기억력은 정말 탁월한 분이네요. 한번 들은 얘기를 어쩜 이렇게 정확히 적었을까요.” 정 판사가 싱글거리며 답했다. “○○지역이 낳은 천재라니까.” “이거, 이대로 지나가지 말아요. 그냥 모른 척 지나치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겠어요? 우선 수석부장님께 말씀드려 보면 어떨까요? 수석부장님은 합리적인 분이고 성 부장님보다도 위 기수니까.” “토끼라고 생각해요, 거북이라고 생각해요?” 박 판사의 거듭된 성화에 결국 임 판사는 수석부장판사실을 노크했다. “오, 임 판사 잘 왔어. 일하느라 고생이 많지? 한 부장님 모시는 게 어렵진 않아?” 수석부장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맞아 주었다. “마침 잘 왔어. 지난주에 기가 막힌 보이차를 구했는데, 먹을 복이 있는 사람이구먼.”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수석부장은 다기를 꺼내어 우아하게 보이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몇 잔의 보이차를 연거푸 마신 후, 임 판사는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된 일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마음이 쓰입니다. 그 세미나 자리에 있었던 다른 판사님들도 많은데 나중에 이 논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방법이 무엇일지….” 수석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임 판사. 임 판사는 자신이 토끼라고 생각해요, 거북이라고 생각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언제나 남들 앞에서 유유히 달리는 데 익숙한 토끼는 앞사람들 등을 쳐다보며 끝도 없이 기어가야 하는 거북이의 처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 “임 판사는 서울 법대 재학중 합격에 동기 중 임관 성적 1등으로 중앙지법에 왔죠? 연수원 때도 날카로운 질문으로 교수들을 쩔쩔매게 만든다고 유명했더군요. 누구 체면도 봐주지 않고 틀렸다 싶으면 바로 손들고 지적하고요. 당연하겠죠. 임 판사는 열등감이라고는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린 것일 뿐, 틀린 걸 지적당한 사람의 자격지심 같은 건 이해하지 못할 테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성 부장의 모자란 점들, 나도 잘 압니다.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무리할 정도로 애쓰죠. 그러다 보니 이번 일 같은 실수도 저지르고. 임 판사같이 깔끔한 엘리트 눈에는 가당치도 않겠죠. 그런데, 이 조직은 임 판사 같은 예외적인 엘리트가 바글바글한 곳이에요. 성 부장 같은 거북이의 입장에서는 무리해서라도 따라잡고 싶을 만큼 불안 초조해지는 곳이죠.” 수석부장은 임 판사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임 판사는 젊고 뛰어난 사람이니 앞으로도 빛날 기회가 무궁무진합니다. 성 부장 같은 사람에게도 빛날 기회를 양보하면 안 될까요. 조직에는 성 부장 같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천재는 아니지만, 평생 성실하게 노력하는 성취 동기가 강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어야죠.” “수석부장님, 그래도 이건 반칙 아닙니까.” “임 판사,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장유유서와 인정이 지배하는 사회예요. 임 판사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한참 선배인 성 부장에게 치명적인 문제제기를 하면 임 판사도 상처를 받습니다. 사회에는 평판이란 게 중요해요. 야박한 사람, 모난 사람으로 비치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됨이 더 중요하니까.” 점점 수석부장의 표정이 굳어지고 목소리는 낮아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수석부장은 다시 보이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정답만 있는 건 아니니 조급해하지 말아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지요. 조금 억울해도 그 또한 다 지나갑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들 하잖아요?”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는 다시 나긋나긋했다. 달콤한 솜사탕처럼.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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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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