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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8) 타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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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 내용 요약 :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등법원 주최 민사실무연구회 세미나에 참석한 임바른 판사. 성공충 부장판사의 지루한 발표가 끝나자마자 손들고 일어나 신들린 듯 자기 의견을 발표한 것까지는 좋았다. 한달 뒤 그 의견이 성공충 부장판사의 이름으로 발표된 학술지 논문에 그대로 도용될 줄이야. 후배 박차오름 판사와 대책을 의논하던 임 판사는 수석부장 판사실의 문을 두드리는데….)
“임 판사, 말 나온 김에 걱정되는 점을 더 말씀드릴게요.”
수석부장은 자사호(보이차를 우려내는 다기)를 내려놓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네요. 한번 보시죠.”
임바른 판사는 수석부장이 내미는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트위터 검색 화면이 떠 있었다. 맨 위에는 낯익은 제목이 보였다.
‘대박! 여판사 니킥 작렬!’ 링크된 동영상에는 지하철 성추행 사건 당시 박차오름 판사가 고오환 교수 사타구니에 니킥을 날리는 장면, 피해 여학생에게 언성을 높이는 장면이 담겨 있다. “학생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욧!”
그다음에는 ‘니킥 여판사, 초미니 출근!’이라는 제목 아래 초미니 차림의 박 판사가 법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무채색 양복의 무리가 홍해가 갈라지듯 뒤로 물러서는 사진이 있었다. 성추행 피해 여성의 옷차림을 탓하는 한세상 부장과의 말싸움 다음날의 일이다.
“아니 법원 구내의 모습을 누가 올린 거죠?” 놀란 임 판사가 물었다.
“법원 앞 지하철역에서의 모습, 출근길에서의 모습 모두 같은 사람이 찍어서 올린 것으로 보여요. 말투나 전에 올린 내용 등으로 봐서 법원 공익근무요원 아닌가 싶네요. 악의는 없는 것 같지만, 경솔한 행동이죠.” 수석부장의 말은 차분히 이어졌다.
박차오름 판사의 활극 담긴
동영상 보여주며 수석부장 왈
“길거리서 분쟁 해결하는 후배
잘 이끌어야 할 임 판사마저
평지풍파 일으켜서 되겠습니까?”
성공충 부장판사의 논문 도용
항의하려다가 순치된 임 판사
어떻게 됐냐 묻다가 짜증만 들은
박 판사는 그 뒤 말조차 걸지 않고
뭔가 연구하더니 엄청난 사건을…
여기 ‘튀는 법관’을 보라
“더 밑으로 내려 보세요. 가장 많이 리트위트된 동영상이 있을 거예요.”
‘정의의 사도 모닝’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고속도로 위의 모습이었다.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에서 서초인터체인지로 나가는 출구에 순서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런데 출구 직전 위치에 비상등을 켠 채 옆 차로에서 출구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검은색 에쿠스가 보인다. 에쿠스를 가로막고 있는 건 자그마한 빨간색 모닝이다. 서 있던 줄에서 거의 직각으로 좌회전하여 출구 전체를 가로막고 있다.
늘어선 차량은 옴짝달싹 못하고 빵빵 클랙슨만 울려대고 있다. 동영상은 늘어선 차량들 중 한 운전자가 찍은 듯하다. 잠시 후 모닝 차문이 열리고 젊은 여성이 내린다. 낯익은 모습. 박 판사다. 이 시점부터는 촬영한 사람도 차에서 내렸는지 카메라 앵글이 달라진다.
박 판사는 성큼성큼 다가가 시커멓게 선팅된 에쿠스의 뒷좌석 창문을 탕탕탕 두들긴다.
“이봐요! 남들은 시간이 남아도는 바보라서 30분씩 줄 서서 기다린 줄 알아요? 어디서 얌체짓이에요!” 선팅된 창문은 요지부동이다.
잠시 후 운전석에서 운전사로 보이는 남자가 내리더니 다짜고짜 언성을 높인다.
“아니 젊은 여자가 어디서 행패야!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 다 그럴 만한 중요한 일이 있어서 들어온 건데 길을 막아? 미친 거 아냐?”
박 판사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는 당신은 뭔데 초면에 반말이지? 젊은 여자한테는 아무나 반말해도 되는 거니? 이 양반이 어떤 분인지 내가 왜 몰라! 일 킬로가 넘게 줄 서 있는 사람들 옆을 쌩 달려와서 출구 바로 옆에서 끼어들고는 운전기사만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분이지. 그럴 만한 중요한 일이 있으시다니 응급환자이신지, 곧 출산할 산모이신지 좀 말해주시지?” 선팅된 창문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운전사는 힐끗 뒷좌석 쪽을 보고는 다시 언성을 높이려다가,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닫는다. 다시 뒷좌석 쪽으로 잠깐 귀를 기울이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차에 올라타더니 차를 돌려 바깥 차로로 빠져나간다.
늘어선 차량 쪽에서는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 야유 소리가 들린다. 박 판사는 아직도 길 한가운데 서 있다. 장판교에서 장팔사모를 치켜들고 단기필마로 조조의 백만대군을 막아선 장비 같다. 박 판사는 이번에는 늘어선 차들 쪽으로 말문을 연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경우 없이 끼어드는 사람들에 대해 왜 항의하지 않는 거죠? 왜 반칙을 응징하지 않는 거죠?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구요!”
… 이 마지막 말 한마디가 힌트가 되었나 보다. 동영상이 리트위트될 때마다 어디서 본 여자 같다는 소리가 나오더니, 결국 누군가가 ‘대박! 여판사 니킥 작렬!’ 동영상을 같이 링크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초미니 출근 동영상도.
묘하게도 초미니 출근 동영상까지 출현하자 비로소 폭발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정의보다 섹시함에 더 반응한다. 초미니 여판사와 아이돌의 몸매 비교가 속출했다. 에이오에이(AOA) 설현, 걸스데이 유라… 너희들 멸치 다리와 올챙이 배나 걱정하라는 메갈리안들의 급습이 있은 후 난장판은 더 심해졌다.
그런 와중에 박 판사 찬양파도 늘어가고 있었다. #정의의 여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의 해시태그가 등장하더니, 결국 하나로 모아지는 분위기였다. #미스 함무라비.
임 판사는 핸드폰을 수석부장에게 돌려주었다. 수석부장은 나긋나긋한 어조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물론 박 판사가 젊은 혈기와 의협심에서 한 행동인 것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판사의 할 일은 법정에 온 분쟁을 냉정하게 중립적으로 해결하는 일이지, 길거리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아닐 거예요. 게다가 성추행범으로 의심 가는 사람과의 몸싸움도 그렇고, 끼어드는 차량을 자기 차로 막아서는 일도 그렇고, 모두 자칫 도를 지나치면 불법적인 일이 될 여지가 있어요.”
어조는 점점 단호해졌다. “게다가 경위야 어떻든 법관 개인이 이렇게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희화화되고 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요. 법관은 매사에 신중해야 하고, 개인적인 공명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튀는 법관’은 법원에 대한 신뢰를 해칠 우려가 있어요. 사소한 일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어요.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싸라기눈 같아서 쌓이기는 어렵지만 흩어지기는 참 쉽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겠지요?”
‘그래, 넌 지나치게 감정적이야’
수석부장은 임 판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임 판사. 이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임 판사를 아끼고 믿으니까 감히 말씀드릴게요. 임 판사를 44부에 배치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박 판사는 연수원 때부터 비슷한 튀는 행동을 보인 적이 있어요. 연수원 교수마다 평가가 엇갈리더군요. 정의감과 사명감을 좋게 평가하는 분도 있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평도 있지요. 임 판사같이 진중하고 뛰어난 우배석 판사가 잘 이끌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수석부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한세상 부장님은 진솔하고 사심 없는 분이지만, 법정에서 가끔 흥분하셔서 전에 막말 판사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지요? 임 판사는 개성 강한 두 분 사이에서 차분하게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주셔야 해요. 그런데 임 판사까지 성공충 부장 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면 되겠습니까? 44부 자체가 너무나 튀는 재판부가 될 우려가 있어요.”
수석부장은 미소를 지었다. “부디 제 뜻을 깊이 헤아려 주세요.”
임 판사는 조용히 판사실로 돌아왔다. 박 판사는 목을 빼고 임 판사가 돌아오기만 기다린 눈치였다. “어떻게 됐어요? 수석부장님이 나서 주신다고 하나요?”
임 판사는 뒤에 들은 이야기는 다 빼고 앞에 들은 이야기만 간략히 전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이 일에 무슨 토끼며 거북이 얘기가 나오죠? 누구든 반칙을 했으면 페널티를 받는 것이 공정한 규칙 아닌가요?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고요. 임 판사님이 곤란하시면 저라도 나서서 문제 제기할래요. 게다가….”
임 판사는 박 판사의 흥분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평”이라는 말이 자꾸 뇌리에 떠올랐다. 임 판사는 박 판사의 말을 잘랐다.
“박 판사님, 이 일은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떻게 알아서 하신다는 거죠?”
“세미나 때 성 부장님도 제 질문 내용을 듣고는 같은 생각인데 지면이 부족하여 다 쓰지 못한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어차피 논문을 발표한 것도 아니니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충실한 논문을 써서 발표해주시면 좋은 일이죠. 어차피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란 없어요. 서로의 생각을 토대로 발전시켜나가는 거죠. 사회적 약자를 돕자는 내용인데 더 비중 있는 분이 발언해주셨으니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그런게 아닌 거 잘 알잖아요!”
임 판사는 박 판사의 반발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흥분할 일 아니에요. 성 부장님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가질 필요도 없고요. 어느 사회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가끔은 독특한 분도 있기 마련이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많을 거예요.”
“그분이 좋은 분인지 나쁜 분인지는 당연히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감히 판단할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어떤 행동이 옳은 행동인지 그른 행동인지는 당연히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임 판사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박 판사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가리는 것이 그렇게 늘 쉽던가요? 그렇게 항상 옳은 소리만 하면서 살면 힘들지 않아요? 그렇게 살면 세상이 조금 달라지기는 하나요?”
박 판사는 놀라서 뚫어져라 임 판사를 쳐다보았다. “임 판사님…. 아니, 바른 오빠! 내가 중학교 때 알던 그 오빠 맞아요? 그땐 이렇지 않았잖아요. 그때 오빠는 어른이든 선생님이든 틀린 건 틀리다고 얘기하는 사람이었어요. 기억나요? 그 정독도서관 독서교실 첫날, 제 자리에 있던 책을 옆으로 치우고 자기 자리라며 엎드려 자고 있던 아저씨를 깨워서 도서관 자리 소유권에 관한 논쟁을 벌인 거? 저는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고 있었는데….”
그 ‘각주’에 눈이 휘둥그레지다
박 판사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힌 것도 같았다. “그 피아노 선생 얘길, 그리고 우리 아빠 얘길 한 것도 오빠가 나와 다른 용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어떤 맘으로 그 얘기를 했는지 알아요? 오빠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임 판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왕좌의 게임 대사 같군. 유 노 너싱, 존 스노.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야. 박차오름.’
임 판사는 그때 피아노 선생 얘길 들은 후 자기가 벌였던 일과 그 결말을 떠올리다가, 무표정하게 내뱉었다. “그때의 내가 어땠는지는 기억 못하겠네요. 철이 없었겠죠. 지금은 세상이란 옳고 그른 게 분명하지도 않고, 결코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는 걸 알 정도는 철이 든 것 같네요. 난 고3 때 한·일 월드컵 거리 응원을 했던 03학번이에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사회에서 겪은 10여년은 세상이 축구 경기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말이죠.”
“알았습니다. 임 판사님. 더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박 판사는 입을 닫았다.
이후 한동안 박 판사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임 판사는 원래 남에게 말을 잘 거는 편이 아니었다. 옆방 정보왕 판사가 이따금 놀러와 너스레를 떨었지만 냉랭한 분위기 타파에는 역부족이었다.
박 판사는 몇 주째 어려운 사건이 있는지 참고서적도 도서실에서 빌려오고 이것저것 연구하는 분위기다. 물어보면 좀 도와주고 싶은데 쳐다보지도 않으니 임 판사도 도리가 없어 먼저 퇴근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 판사가 출근해 보니 또 밤새워 일했는지 박 판사가 엎드려 곤히 자고 있었다. 깨우기도 그렇고 하여 그냥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 판사가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나타났다. ‘코트넷 민사집행법연구회 게시판에 들어가보기 바람.’
또 뭐지? 임 판사는 법원 내부 전산망인 코트넷 중 판사들의 전문분야 연구회 게시판을 클릭했다. 박 판사가 올린 논문이 맨 위에 있었다. 바로 어젯밤 올린 것 같다. 경매 시 소액 임차인 보호에 관한 논문이었다. 지난번 세미나 때 임 판사가 발언했던 주제다. 현재 실무상 문제되는 케이스들과 해결 방안들이 상세하게 논증되어 있었다. 마우스 휠을 움직여 화면을 밑으로, 밑으로 스크롤해가던 임 판사의 눈에 ‘검토의견 및 입법론적 제안’이라는 목차가 들어왔다. 성 부장 논문 결론 부분과 같은 목차였다. 그리고, 내용도 똑같았다.
다만, 다른 것은 각주였다. 문단 하나마다 비슷한 내용의 각주가 달려 있었다. ‘임바른, ○○연구회 발표 의견. 동지(同旨: 같은 취지) 성공충, ○○○ 42면 1행에서 7행.’ ‘임바른, ○○연구회 발표 의견. 동지 성공충, ○○○ 42면 8행에서 16행.’ ‘임바른….’
끝없이 이어지는 각주의 행렬을 보고 있는 사람은 또 있었다. 수석부장 역시 자기 방에서 스크롤을 내리며 물끄러미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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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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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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