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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02 19:04 수정 : 2015.10.05 10:40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9) 잊혀질 권리

gomnme@naver.com
잊혀질 권리. 라이트 투 비 포가튼(Right to be Forgotten). 작게 소리내어 읽어본다. 묘한 뉘앙스가 있는 용어다. 왠지 로맨틱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정보 삭제권’으로는 도저히 이런 느낌이 나지 않는다.

임바른 판사는 소장을 읽으며 잠시 생각했다. 묘한 사건이다. 청구금액 천만원짜리 소액 사건에 원고 측 대리인은 국내 최대 로펌, 피고 측 대리인은 사회 참여 활동으로 유명한 중형 로펌. 양측 변호사 비용이 청구금액의 몇 배일지. 당사자들도 대단하다. 피고는 유력한 정론지 H신문, 원고는 근래 차세대 리더로 떠오른 유명 정치인 강요한 의원이다.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는 임 판사도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스타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법조계로 진출하지 않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다양한 사업을 연이어 성공시키고 혁신적인 사회적 기업과 엔지오(NGO) 활동으로도 붐을 일으킨 뒤 정계에 진출했다.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40대 후반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젊은 얼굴. 책벌레인 임 판사는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떠올리곤 한다.

유력 정치인이 신문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건 정치적으로 득일까 실일까. 무슨 의도일까.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법제화되지 않은 ‘잊혀질 권리’의 침해를 이유로. 강요한 의원은 H신문 기사 데이터베이스에서 특정 사진 한장을 삭제하고, 이 사진이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되지 않게 해줄 것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손해배상청구를 했다.

원전반대, 그 빛나던 순간

그 사진은, 강 의원의 갓 스물 대학생 시절 사진이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도 그의 외모는 눈에 띈다. 분명히 시위 현장을 찍은 사진인데, 강 의원 때문에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후줄근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그맘때만 뿜어져나오는 8월의 태양 같은 눈부심이 있다. 그건 그의 곁에 있는 여학생도 마찬가지다. 남녀 학우들과 어깨를 겯고 연좌농성중인 모습이다. 머리띠에는 선명하게 ‘원전 반대’라는 구호가 쓰여 있다. ‘반전 반핵’ 깃발이 휘날리고 로마 제국의 병사 같은 전경들이 양 끝자락의 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있는 살풍경한 모습인데도 학생들의 얼굴은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 의원은 가장 가운데에서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세상에는 주인공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생각에 잠긴 임 판사의 왼쪽 뺨에 뭔가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고 은은한 비누 향기가 풍겨왔다. “뭘 그리 홀린 듯이 봐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돌아보니 박차오름 판사가 바로 뒤에서 허리를 굽힌 채 어깨 너머로 임 판사가 보고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별거 아니에요. 오후에 조정할 사건 기록.” 임 판사는 애써 마음의 동요를 감추며 대답했다.

“어디 보자. 잊혀질 권리의 침해? 재미있는 사건이네요. 에휴, 저야말로 요즘 제발 좀 잊혀지고 싶다구요. 이상한 별명까지 붙어서 제 온갖 동영상과 사진이 떠돌고 있는 거 아세요? 미스 함무라비라니, 하필 내가 싫어하는 성차별적 호칭 ‘미스’까지. 근데 원고가 누군데 이런 최신 트렌드의 사건을 제기한 거죠?” “강요한 의원이라고 알죠?” “네?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임 판사는 키보드를 두들겨 강 의원 사진을 찾아 모니터에 띄웠다.

“어, 이 사람 낯이 익은데…. 가만, 아니 그때 그 얌체 에쿠스?” 순간 임 판사는 지난주에 수석부장이 보여준 박 판사의 고속도로 대활극 동영상을 떠올렸다.

“이 아저씨 얌체같이 고속도로 진출로로 끼어들기 하다가 저랑 한바탕한 에쿠스 차주인 것 같아요. 얼마나 대단한 양반인지 모르겠지만 운전기사만 내보내서 저와 상대하게 하고 자기는 뒷좌석에 그림같이 앉아서 나 몰라라 하더라고요. 재수 없엇!”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던 박 판사는 순식간에 분기탱천한 얼굴이다.

“강 의원은 연예인 못지않게 여성 팬이 많은 인기남인데 박 판사에게는 먹히지 않나 보네요?” 박 판사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임 판사는 얼른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며 키보드를 눌러 강 의원의 사진 몇 장을 더 띄워 보여준다.

“전 저런 웃음이 싫어요.” “어떤?” “한순간에 온 얼굴을 무너뜨리며 가늘어지는 눈꼬리, 얼굴 주름에 가지런한 치열까지 모든 걸 보여주는 웃음.” “그게 매력 포인트던데요?” “그런 웃음을 생면부지의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명함 꺼내듯 꺼내 보일 수 있다니, 왠지 싫어요.” “그야 직업이니까…. 나같이 종일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보단 낫잖아요?”

박 판사는 그제야 싱긋 웃었다. “자기가 종일 시큰둥한 표정인 걸 알긴 아나봐요?”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니 뭐…. 여하튼, 이 사람이 굳이 왜 20여년 전 대학 시절 사진 한장을 삭제하려 하는지는 기록을 봐도 잘 모르겠네요. 추상적인 주장만 가득하고. 그러니 1심에서 간단히 청구 기각당했죠. 한 부장님이 저보고 조정을 해보라고 하는 것도 속내를 들어보라는 말씀인 것 같아요.” 오늘따라 박 판사의 말투가 나긋나긋하자 당황한 임 판사는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다.

국내 최대 로펌 동원된 소액 사건
유력 정론지 H신문을 상대로 한
강요한 의원의 손해배상청구
자신의 젊은 시절 시위 사진을
포털서 검색 안되게 해달라는데

변호사들의 팽팽한 법리논쟁
도저히 조정 여지를 못 찾자
강 의원과 마주앉은 임 판사
“원고는 이길 생각도 없으면서
왜 소송을 내신 것인가요?”

그 여자는 누구죠?

오후, 조정실이다. 양측 변호사들은 팽팽하게 법리 논쟁을 벌이고 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한 변호사가 예전에 집을 경매당했을 때 신문에 실렸던 경매공고를 구글 검색 결과에서 삭제해달라는 신청을 받아준 바 있습니다. 비록 아직 잊혀질 권리에 관한 독자적인 법률이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 등을 통해 얼마든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정보 삭제권을 도출할 여지가 있습니다. 무분별한 신상털기와 관음증의 도가니가 되어가는 인터넷으로부터 자신의 소중한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는 이 시대의 중요한 기본권인 것입니다.”

“공적 인물인 정치인의 과거 행적은 모두 유권자들의 검증 대상입니다. 보수-진보의 대립구도를 낡았다고 비웃으며 철저한 실용주의를 주창하는 강요한 의원은 원자력만이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화석 연료의 대안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핵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젊은층으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그가 젊은 시절에는 전혀 다른 정치적 소신을 갖고 급진적인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정보이고, 사회는 그에게 왜 이런 극단적인 생각의 변화를 겪었는지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정치인의 잊혀질 권리가 국민의 알 권리보다 우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고 측이 언급한 유럽사법재판소 판결도 구글 검색 결과의 삭제를 명했을 뿐, 원본인 신문기사 자체의 삭제를 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성장하면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인데 피고 신문사는 원고가 어린 학생이던 시절의 사진 한장을 용케도 찾아내어 집요하게 정치적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에 지금의 원고 얼굴을 합성하여 희화화한 사진이 에스엔에스(SNS)에 유행하고 있을 지경입니다.”

도저히 조정할 여지를 찾지 못하겠다. 원고 본인이 나와야 뭔가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싶어 임 판사는 원고 대리인에게 기일을 속행할 테니 원고도 함께 출석하도록 하라고 당부하고는 마무리했다.

다음 기일, 정기국회 회기 중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강요한 의원이 변호사와 함께 출석했다. 실물도 사진 못지않게 매력적이었다. 지난 기일에 이어 피고 측의 날카로운 맹공이 이어져도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를 하며 경청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임 판사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는 그의 미소에 기가 질리기 시작했다. 저 미소는 철가면이다. 이래서는 굳이 본인을 출석시킨 의미가 없다. 뭔가 판을 흔들어봐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변호사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줄 것을 부탁했다. 강 의원과 단둘이 마주 앉은 임 판사는 대뜸 물었다. “원고는 이길 생각도 없으시면서 왜 소송을 내신 것인가요?”

강 의원의 미소는 요지부동이었다. “판사님, 전 뭘 하든 언제나 이길 생각뿐인 사람이랍니다. 국민은 패배자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길 수 있을 만한 명확한 주장을 하지 않으시는 거죠? 이 사진 한장으로 인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고 계시다는 건지 제대로 밝히신 적이 없더군요. 추상적인 사생활 침해, 악의적 왜곡 등만 반복하시고. 그런 정도로는 피고 측 논리를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을 법률가 출신인 원고도 잘 아실 텐데요.”

“저는 충분히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강 의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임 판사는 다시 불쑥 물었다. “아까 뭔가 계속 메모지에 쓰시던 거, 글자가 아닌 것 같더군요.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비로소 강 의원의 눈꺼풀에 미동이 생겼다. “아, 그건 별것 아니라….” 빤히 응시하는 임 판사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접어놓았던 메모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여자의 얼굴이다. 동그랗고 큰 눈동자, 미소 띤 작은 입. 단순한 선 몇 개로 휙휙 그렸는데도 특징이 잘 드러난 그림이다. 어딘가 낯이 익다.

“실례지만 어떤 분 그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왠지 낯이 익네요. 티브이(TV)에서 사모님을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모님인가요?”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강 의원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하지만 판사님이 이미 본 적 있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비록 사진 한장으로 보셨을 뿐이지만.”

임 판사는 놀라 기록을 들춰보았다. 그림은 연좌농성중인 강 의원과 어깨를 겯고 있는 눈이 큰 여학생과 꼭 닮아 있었다. 처음 사진을 봤을 때 강 의원 못지않게 눈부시다고 생각했던 그 여학생이다.

“대학 때 저랑 같은 동아리였던 여학생입니다. 쑥스럽지만, 이때 우리는 학교 내에 소문난 커플이기도 했지요.” 강 의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이 그린 그림의 얼굴선을 따라 긴 손가락을 움직였다.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눈을 감고도 그녀를 그릴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이 모습 이대로니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말이 이어졌다. “그녀는 이날 시위 중에 누군가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고, 그 후유증으로 오래 병상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누군가가 진압하던 쪽인지, 혼전중이던 동료인지도 모른다는 게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죠.”

“그랬군요. 그래서 이 사진을 보기가 힘드셔서….” 강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사진 원본을 얼마 전까지 사무실 책상 서랍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주 꺼내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 소송은 저 때문에 낸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 때문에 낸 것입니다.” 강 의원의 손가락은 사진 오른쪽 구석에서 강 의원 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학생을 가리켰다. “제 처입니다.”

인간의 묘한 기억

그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갔다. “처가 관심도 없던 동아리에 들어오고, 시위에도 따라 나온 게 다 저 때문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지요.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처가 연락을 해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는 저를 저 이상으로 잘 아는 사람이지요. 결혼 후에도 제가 누구 얼굴을 잊지 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마음도 몸도 결혼 서약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남편 흉내만 내며 살았죠.”

그의 미소는 어느새 처연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 처는 많이 아픕니다. 몸 안에 좋지 않은 것이 생겨서 말이죠.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지경인데도 처는 이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면 하염없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저와 그녀가 어깨를 겯고 꼭 붙어 앉아 있는 모습에서.” 그는 임 판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 소송은 저의 잊혀질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제 잊을 의무에 관한 것입니다.”

결국 조정은 불성립으로 끝났다. 그날 저녁, 임 판사는 박 판사, 옆방 정 판사와 함께 법원 앞 단골 카페를 찾았다. 조정 결과를 캐묻다가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박 판사는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수다쟁이 정 판사도 조용했다. 이윽고 길어진 침묵이 부담스럽다는 듯 박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구석에 놓인 작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듀크 엘링턴의 ‘스타크로스트 러버스’(Star-crossed lovers)였다. 불운한 연인들에 관한 곡이다.

임 판사는 피아노를 치는 박차오름의 뒷모습에 중학생 때의 모습을 겹쳐 보며 생각했다. 인간의 기억이란 참 묘해서 완결된 것은 곧 망각하고, 미완의 것은 오래오래 기억한다. 해피엔딩을 이루고는 익숙해져가는 사랑과 안타깝게 못 이루어 평생 그리워하는 사랑 중 어느 것이 더 달콤한 것일까. 아니, 어느 것이 더 슬픈 것일까.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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