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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1) 헬조선 항공의 풍경
“혹시 비상구 좌석 있으면 주시겠어요?”
박차오름 판사는 상큼하게 웃으며 물었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 체크인 카운터다. 밤 비행기로 귀국하고 바로 출근해야 한다. 눈이라도 제대로 붙이려면 비상구 좌석에 앉아 다리라도 뻗어얄 텐데. 모처럼의 3일 연휴 동안 여행을 와서 정말 오랜만에 재판 생각 모두 잊고 푹 쉬었다.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바보가 되니 매일 야근만 하지 말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임바른 판사가 일주일 내내 잔소리를 해댄 덕분이다. 혼자 정처 없이 수상버스를 타고 짜오프라야 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바라본 풍경, 특히 새벽사원의 일몰이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었다. 이제 전쟁터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다.
“어? 오름이 아니니? 여기서 다 보네.” “어, 형!” “옛날 운동권도 아니고 형이 뭐니 형이. 넌 오빠라는 호칭에 거부감이라도 있는 애 같다.”
박 판사는 씩 웃었다. 대학 때 수화 동아리인 손말사랑회를 함께 했던 민 선배다. 그는 ‘나이스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남자였다. 깔끔한 외모에 세련된 매너. 모나지 않고 너그러운 성품. 그의 친한 친구들은 다 스키나 스킨스쿠버 동호회에 모여 있는 눈치였는데, 그는 손말사랑회에서 수화 공부에 열심이었다. 봉사활동에도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적극성’의 규모는 대학 졸업 후 신문기사를 통해 비로소 알았다. 그는 지체장애인협회에 해마다 수억원을 기부했고, 장애인고용공단에서 감사장도 받았다.
“너 비행기 내리면 바로 출근해야지? 이코노미는 너무 힘들 텐데. 퍼스트에 빈자리 많으니 나랑 같이 타자. 우리 집 비행기인데 그 정도는 이 오빠가 모실게.”
그렇다. 애교 있게 찡긋 윙크를 보내는 그는 이 항공사를 비롯하여 가전, 식품, 백화점, 대형병원, 건설 등 많은 대기업을 거느린 엠제이(MJ)그룹 회장의 아들이다. 지금은 식품 부문 부사장 직함을 가지고 있다.
“아니, 괜찮아. 비상구 좌석이라 편해.” 그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대신 자기 티켓을 박 판사 옆자리로 바꿔 오더니 슬쩍 박 판사의 기내 가방을 가로채 끌며 원래 동행이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앞서 갔다. 이게 그의 방식이다. 그는 대학 때부터 줄곧 박 판사에게 호감을 표시해왔지만, 결코 부담스러울 만큼 노골적이거나 집요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인연이 이어지는 것 같다.
“자격지심 참 무시무시하지?”
이코노미석 줄은 끝도 없이 길었다. 귀국하는 패키지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향우회 깃발 아래 모인 아저씨들은 아직도 해외여행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시끌벅적했고, 효도관광을 온 듯한 노인들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민 선배를 알아본 항공사 직원들은 줄 끝에 서 있는 그를 보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박 판사에게 법원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기내로 들어와 널찍하고 여유로운 비즈니스석을 지나 다닥다닥 붙은 이코노미석으로 향했다. 이코노미석으로 가려면 늘 비즈니스석을 지나야 하지만, 퍼스트석은 아예 맨앞에 분리되어 있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너희도 언젠가는 비즈니스석에 탈 순 있겠지만, 퍼스트석은 어차피 못 탈 테니 관심 갖지 말라는 배려일까.
탑승을 마친 후 승무원이 비상구 좌석 승객들에게 안내를 시작했다. “이곳은 비상시 저희 승무원을 도와주셔야 하는 좌석입니다. 협조해주시겠습니까?”
“글쎄, 하는 것 좀 보고.” 아까 향우회 깃발 아래 있던 단체관광객 두 명이 왼쪽 비상구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단히 재치 있는 농담이라도 한 양 킬킬댔다. 승무원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레버는 비상착륙시에 비상구를 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 이따 비행기 뜨면 바람 통하게 한번 열어봐야겄네. 답답하구만.” 또 킬킬대는 그들에게 승무원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손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규정상 이 좌석에 앉으실 수 없습니다. 다른 좌석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움찔한 그들은 입을 닫았고, 승무원이 재차 묻자 마지못해 비상시 협조하겠다고 답했다.
이륙을 앞두고 승무원은 그들과 마주보는 보조석에 앉았다. 그들은 코앞에 있는 승무원을 투명인간 취급 하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따, 무서워서 못 앉아 있겄네.” “손님이 왕인데 왕이 농담 한마디 했다고 대하는 꼴 좀 보소.” 승무원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오른쪽 비상구 좌석에 앉아 있던 박 판사는 몇 번이나 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망설이다 못하고 말았다. 평소와 달리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 항공사 경영자 집안 사람과 함께 앉아 있기 때문일까.
민 선배는 아랑곳 않고 아까부터 하던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 요즘 관심을 갖고 추진하고 있다는 사회적 기업에 관한 얘기였다. 대학 졸업 후 스탠퍼드에 유학을 다녀온 그는 미국 기업가들의 사회 공헌 활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특히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많은 것은 선천적으로 걷지 못하는 여동생의 영향일 듯했다.
일요일 밤 귀국 비행기는 언제나 만석이다. 기내는 시끌벅적했고 승무원들은 지쳐 보였다. 비행기는 언제나 이륙 직후 기내식을 준다. 먹는 동안은 승객들이 조용해지기 때문 아닐지. “쇠고기 요리와 생선 요리 중에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어느 게 더 맛있나, 아가씨는 어느 걸 더 좋아해?” 아까 그 인간들이 또 킬킬대며 바쁜 승무원을 붙잡고 있었다.
승무원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번에는 뒤쪽에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어두운 표정, 큰 몸집의 젊은 여성이다. “지금 나 무시하는 거예요? 이까짓 이코노미 기내식 평소에는 줘도 안 먹어요. 나 평소에는 혼자 비즈니스 타고 유럽 자주 여행하고 그래요. 저녁을 못 먹어서 좀더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승무원의 얘기를 들어보니 쇠고기와 생선 두 가지 다 달라는 요구에 승객이 많아서 여분이 없을 것 같아 죄송하다고 답했다가 생긴 사단이다. 결국 사무장이 자기 몫의 식사를 들고 왔지만 승객은 자기를 거지로 아느냐며 더 길길이 뛰었다.
“자격지심이란 참 무시무시하지?” 모른 척 신문만 보고 있던 민 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펼친 신문 헤드라인에는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난 평소 궁금한 게 있어. 한국 사람들은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얻은 것만이 귀한 것이고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건 부당한 것이라고들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런데 전지현, 김수현 같은 타고난 외모에 대해서는 우월한 유전자라며 숭배하지. 김연아, 류현진 같은 스포츠 천재도 여신이나 영웅 취급 하고. 물론 이들도 노력은 했겠지만, 과연 타고난 재능이나 극히 예외적인 미모 없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지능은 물론 인내심이나 집중력같이 노력에 필요한 성격조차 거의 절반 정도는 유전되는 거야. 슬프게도 대자연은 원리적으로 불공평해.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유독 타고난 것 중에 부에 대해서만 이를 갈고 저주하는 거지?”
방콕 공항서 만난 대학 선배누가 봐도 ‘나이스 가이’ 인 그는
항공사 거느린 MJ그룹 회장 아들
옆자리서 두런두런 대화 나누다
함께 겪고 만 비행기 회항 소동 우리나라 고객들은 미개하다며
왜 타고난 것 중 부에 대해서만
유독 이 갈고 저주하냐는 선배
듣다듣다 못 참은 박차오름 판사
침착하게 하나씩 반박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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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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