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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6) 사법부 신뢰, 해법 논쟁(상)
“이건 뭐 만물상도 아니고… 작은 지원도 아니고 큰 법원에서 이게 뭐야.”
임바른 판사는 요즘 입이 한참 튀어나와 있다. 44부가 형사재판도 겸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허허, 한세상 부장님의 용단을 폄하하는 거야?” 정보왕 판사가 이죽거렸다.
“용단은 무슨. 누가 내 등 밀었어, 상황이지.”
자초지종은 이렇다. 하반기에 형사부에 비상이 걸렸다. 피고인 수십 명, 피해자 수천 명인 초대형 금융사기 사건이 접수된데다 일반 사건 접수도 대폭 증가한 것이다. 과부하가 걸린 형사부 판사들이 쓰러질 지경이다. 법원장 주최 회식날, 한세상 부장은 건배 몇 잔 후 거나해진 상태에서 법원은 업무량 급변에 대한 유연한 대처가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점잖게 한마디 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석부장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공감해주셔서 정말로 고맙다고 한껏 한 부장을 칭송하더니, 한 부장 부가 형사재판을 겸임하고 한 부장 부의 민사사건 절반을 다른 민사부로 재배당하는 방식으로 민사부가 고통을 분담하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한 부장은 헛기침만 연발했다.
“저는 좋은데요? 이제야 진짜 판사가 된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재판, 하면 형사재판만 머리에 떠오르잖아요. 죄에 대해 벌을 주는 것이 가장 판사다운 모습 아닌가요?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요.” 초임 판사인 박차오름 판사의 한껏 들뜬 어조에 임 판사와 정 판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 판사가 싱글거리며 물었다. “박 판사, 뭔가 포부가 대단해 보이시는데? 대한민국 형사사법을 내 손으로 바꿔 놓겠다, 뭐 이런 기상이 엿보여.” 박 판사가 펄쩍 뛰며 말했다. “어휴,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어요.” 그러고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솔직히 고시 공부를 하면서 내가 판사가 된다면 이렇게 해야지 하고 다짐한 것이 한 가지 있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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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재판도 겸임하게 됐는데
첫 공판은 재단 이사장 장남인
사립대 교수의 준강간 사건
법정엔 항의와 야유가 쏟아졌다 “고관대작도 가차 없이 작두로 싹둑”
“가난한 환경운동가가 건설업체
찾아가 기사로 협박한 경우는?”
한 부장이 열변 토하며 반박하자
박 판사는 ‘궤변’이라 씩씩대고 99명 도둑 놓치더라도? 왜 99명이지? 다음날 점심시간, 구내식당 메뉴는 된장국에 꽁치구이였다. 박 판사는 열변을 토하느라 아직 밥그릇 뚜껑도 열지 않았다. “어제 그 변호사를 보니 강자의 논리가 뭔지 잘 알겠더라고요. 여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 수컷에게 꼬리치는 게 당연하고, 그러다가도 원래 주인인 남자에게 들키면 살려고 배신하는 존재다. 그런 게 약자의 생존 방법이다. 이런 생각이 깔려 있는 것 아닐까요? 하긴 교수인 것만으로도 대학원생에게는 생살여탈권을 쥔 존재인데, 재단 이사장 아들이라니 그냥 강자가 아니라 거의 신이네요. 사실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법관이란 그저 왕족이든 고관대작이든 잘못하면 가차 없이 작두로 목을 썽둥썽둥 자르는 포청천 아닐까요. 미국 연방대법원이 어떻고 독일 제도가 어떻고 밤낮 복잡하게 연구하는 거, 다 헛짓하는 거 아닐까요.” 묵묵히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한 부장은 불쑥 입을 열었다. “99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 사람들이 흔히들 하던데 난 그 말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어.” 임 판사와 박 판사는 한 부장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 말은 원래 영국의 18세기 법학자 블랙스톤 경이 한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면 안 된다’(It is better that ten guilty persons escape than that one innocent suffer)는 법언인데, 왜 사람들 입과 입을 떠돌면서 99명으로 대폭 늘어났을까? 그리고 도둑으로 죄명도 특정되고 말야.”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보는 두 판사는 아랑곳 않고 한 부장의 말은 이어졌다. “내 추론은 이래. 우선 ‘열 사람이 지켜도 한 도둑을 막지 못한다’는 속담 영향으로 도둑이 들어오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영향으로 도둑 수가 대폭 증원되기 시작해서 화끈하게 99명까지 늘어난 것 아닌가 하는 거지.” 한 부장은 싱긋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왜 하필 ‘도둑’일까에 대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도둑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흔한 범죄이면서, 아주 치명적인 피해까지는 주지 않는, 때에 따라서는 불쌍하기까지 한 경우도 있는 범죄지. 놓치더라도 받아들이기 그나마 좀 쉬운 범죄란 말이야. 만약 앞부분이 ‘99명의 연쇄살인범을 놓치더라도’, ‘99명의 소아강간범을 놓치더라도’, ‘99명의 회사 돈 빼돌리는 재벌을 놓치더라도’라면 사람들이 그 전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런 경우에는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은 어쩔 수 없다’로 원칙이 수정되어야 하나?” 어느새 한 부장의 시선은 박 판사에게 향해 있었다. “박 판사, 강자와 약자에 대해 얘기했었지. 내가 재판한 사건 중에는 가난한 환경운동가가 피고인인 경우가 있었어. 그는 토목공사하면서 오수를 함부로 흘려보내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면서 건설업체를 찾아가 항의했지. 그러고는 자기가 발행하는 지역 환경 신문에 광고를 내라고 요구했어. 응하지 않으면 시리즈 기사를 쓸 것을 암시하며. 이 경우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지? 어떤 영세주거지역 재개발 사건에서는 재개발 지구 한가운데 위치한 열 가구가 시세의 열 배 보상금을 요구하며 몇 년을 법정투쟁하는 사이 자금 부담으로 시행사가 부도나고 수천 가구가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어. 자, 이런 경우는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지?” “부장님, 그건 강자 약자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제가 말씀드린 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는 관대하게 처벌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국민들의 분노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래? 그럼 이렇게 물어보지. 사회는 사실 불평등하지. 그것도 구조적으로 불평등해. 그런데 그 불평등한 구조는 범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도 그대로 반영돼. 돈과 권력을 가진 자는 실제로 자기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 보스 대신 기꺼이 손을 더럽힐 머리 좋은 참모와 충성스러운 행동대원이 줄을 서 있거든. 보스는 그저 부하들의 제안에 대해 ‘법의 테두리 내에서 적절히 하라’고 하면 족해. 말리는 척하기도 하지. 부하들은 법정에서 다 자기들이 알아서 한 과잉충성이고 보스는 아무것도 모르신다고 목놓아 외쳐대지. 수사기관에서 일부 자백한 것도 법정에 오면 줄줄이 번복되고, 공판중심주의는 수사기관 자백이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로 유죄를 밝힐 것을 요구하지. 이런 상황에서 판사는 무얼 할 수 있지? 강자에게는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야 할까?” “그, 그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서 진실을 밝혀야죠. 형사재판은 민사재판과 달라서 재판부도 당사자끼리의 싸움에 심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잖아요. 그리고 부장님도 잘 아시다시피 판례가 범행을 공모하는 것에만 참여하고 범죄 실행을 담당하지 않은 사람도 함께 형사책임을 지도록 하는 공모공동정범을 인정하는 것처럼 그런 불평등한 구조에 법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죠.” “때로는 보스는 진짜로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알 필요조차 없이 부하들이 다 알아서 하고 책임도 지도록 구조를 만들어놓아서. 이익은 보스에게 귀속되지만 말야. 이 경우 보스에게 형사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정의를 세워야 하잖아요” “쉽지는 않지만 포괄적인 공모는 없었는지, 그리고 확정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미필적 고의라도 인정되지는 않는지 꼼꼼히 따져봐야죠.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유죄가 입증된 사건에서 어이없이 관대한 양형을 해서는 안 되고요.” “양형, 물론 중요하지. 그럼 다시 물어볼게. 1억을 사기치거나 횡령한 사람이 피해액을 모두 갚으면 보통 집행유예를 해주지. 그런데 횡령, 배임 액수가 100억인 재벌이 피해액을 모두 갚으면? 그리고 심리해본 결과 액면상 피해액은 100억이지만 자기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거의 없고 상황이 어려운 계열사 지원 등 장부상 오간 돈이 대부분이라면? 그나마도 대부분 변제했고. 그래도 100억이니까 징역 100년 해야 정의로운 판결인가?” “부장님! 그건 너무 한쪽 면만 말씀하시는 거예요. 경영자의 자의적 판단으로 그룹 전체가 부실화되어 근로자들과 사회에 큰 피해를 낳을 위험성도 고려해야죠.” 거의 언쟁이 되어가는 상황을 임 판사가 겨우 말렸다. 박 판사는 판사실로 돌아와서도 계속 씩씩거렸다. “부장님은 궤변을 늘어놓고 계셔요. 우리 책임은 그런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아니에요?” 재판부 내에 냉랭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이, 준강간 사건 다음 공판기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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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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