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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22 19:10 수정 : 2016.01.24 10:05

gomnme@naver.com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7) 술 권하는 사회(상)

“내가 누군지 알어? 내가 누군지? 싸가지 없는 놈들.”

늦은 밤 지하철, 한적한 객차 안에 존재론적인 질문이 역한 술 냄새와 섞여 퍼져 나갔다.

야근으로 지친 임바른 판사의 멍한 머리는 그 질문에 조건반사적으로 관련 검색어 찾듯 맥락 없는 답변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부터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까지.

맞은편에 앉은 초로의 사내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꼼꼼한 저주의 말을 세 정거장째 퍼붓고 있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한국 사회는 위에서 아래까지 예외 없이 포유류 식육목 개과 동물(그중에서도 미성숙 개체인 새끼)들로 채워져 있다. 지친 임 판사는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단언하는 크레타인을 떠올리며 ‘저 주장이 참이라면 한국어로 유창하게 욕을 퍼붓고 있는 자기 자신 역시 영장류가 아니라는 주장이고’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늦은밤 지하철에서 생긴 일

그때, 지하철 문이 열리며 한 젊은 여성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친구들과 한잔했는지 얼굴이 발그레하다. 사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여성을 위아래로 관찰하더니 레퍼토리를 바꾸었다. 성균관에서 오신 것인지 어느 향교에서 오신 것인지 동방예의지국이 어떻고 법도가 어떻고 말세가 어떻고 하며 망국의 선비마냥 통탄의 말을 뱉어내는데, 눈길은 그녀의 미니스커트 밑으로 죽 뻗은 다리를 집요하게 핥고 있다.

겁먹은 여성은 못 들은 척, 자는 척하고 있지만 먹잇감을 찾은 사내는 아예 몸을 그녀 쪽으로 돌리고 자기 딸이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는 등의 가정법 협박을 시작했다.

일상생활에서는 불개입주의, 평화주의로 일관하는 임 판사지만, 오늘은 왠지 참기가 힘들어서 한마디 했다. “아저씨, 그만 좀 하시죠.”

질릴 정도로 예측 가능한 답이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너 몇 살이냐. 어디서 어린놈이 싸가지 없이….

임 판사는 대학 신입생 환영회 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은 긴장한 신입생들에게 짬뽕 그릇에 소주를 가득 부어 원샷할 것을 요구했고, 신입생들은 차례로 입가에 술을 흘리며 시체처럼 널브러졌다. 집안 내력으로 술을 못하는 임 판사는 집행 순서를 기다리는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지만, 자신의 알코올 분해 능력에 관한 변론을 하는 것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마시기 싫습니다. 왜 마셔야 하죠?” 욱하는 심정으로 내뱉은 한마디는 무수한 ‘싸가지 없는 ××’라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임 판사는 가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싸가지’라는 신비의 동물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다방 종업원 성폭행한 트럭기사도
사소한 말다툼 끝 칼부림한 이도
음주운전하다가 도망간 의대생도
모두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
전과 26범 70세 노인은 또 어떤가

“정신병자나 중증 치매환자처럼
음주사고를 달리 취급할 수 있죠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달라요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
원인은 뭐고, 자유는 뭐냐고요?”

“약주 하셨다고 남에게 민폐 끼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나이 어리다고 참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차피 없다는 싸가지, 임 판사의 말투도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원시시대로부터 진화된 인간의 생존 본능은 만취 상태에서도 작동한다. 사내의 시선은 여자의 허벅지를 떠나 임 판사의 얼굴과 몸집으로 향했다. 상대가 아무리 ‘어린놈’이더라도 위협적인 체구였다면 헛기침이나 하면서 자는 척했을 사내는, 상대가 책벌레 백면서생류에 속한다는 것을 삽시간에 파악하고는 비비원숭이처럼 공격적인 신호를 보내며 다가와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결국 한밤의 소동은 다음 역에서 지하철 경찰대가 출동해서야 마무리되었다. 경찰 제복 역시 위협적인 신호에 해당하지 않는지 사내의 고성과 몸부림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밤 경찰서는 꽤나 시끄러울 듯하다. 단추가 떨어져나간 앞섶을 추스르며 돌아서던 임 판사는 구두에 느껴지는 물컹한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누군가 역 구내에 술자리 안주의 흔적들을 철퍼덕 펼쳐 놓았다. 임 판사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구두를 문질러 닦았다. 공들여 닦은 구두에 묻은 토사물은 마치 청결하고 안전한 문명 세계에 침입한 바이러스 같았다. 이 순간 임 판사가 느끼는 감정 역시 원시시대로부터 진화되어 온 것이다. 혐오감.

다음날 판사실, 임 판사는 읽던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휙휙 접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국민에게 송구하다’는 굵은 글씨 밑에 유명 정치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이 있다.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손녀뻘인 여기자에게 성희롱과 폭언을 했다는 내용인데 ‘취중의 실수’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다.

실은 신문 읽기 전까지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오늘 오전에만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 주장이 세 건째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형을 감해 달라는 것이다. 여관으로 커피 배달을 시킨 후 다방 종업원을 성폭행한 트럭기사도, 사소한 말다툼 끝에 식칼을 건설현장 동료 노동자의 배에 꽂은 사람도, 심지어 음주운전하다가 사고를 낸 후 도망간 의대생도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 주장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 임 판사가 취객에게 평소와 달리 예민하게 반응한 데에는 요즘 형사재판을 맡은 후 매일 검토하고 있는 내용들의 영향도 있는지 모르겠다.

4번 타자처럼 네번째 사건이 등장했다. 전과 26범의 70세 노인이다. 범죄경력 조회에 온통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공갈, 협박, 폭행이 가득했다. 죄명은 무시무시한데, 첨부된 자료에 적힌 사건 내용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동네 담배가게에서 담배 집어가다가 말리는 할머니에게 쌍욕, 동네 식당에서 라면에 소주 네 병 먹고는 돈 없다며 도리어 탁자 뒤집어엎고 행패, 대낮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서 술 마시다가 항의하는 아이 엄마 뺨 때리기, 영업하는 포장마차 앞에서 기겁한 여주인이 푼돈 쥐여줄 때까지 바지 내리고 소변보기….

형량 뒤 판사들의 표정과 한숨

선고된 형량들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읽다 보면 그걸 선고한 판사들의 표정 같은 것이 느껴진다. 피해가 소소하니 도리 없지, 라는 느낌의 벌금 30만원에서 시작해서 벌금액이 차례로 올라가다가 더 이상 못 참겠어!라는 듯이 집행유예. 하지만 유예기간 중에 재범하면 실형을 선고하겠다는 엄중한 경고인 집행유예는 어젯밤 출동한 지하철 경찰의 제복처럼 그다지 위협적인 신호가 아니었나 보다. 집행유예 기간 중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죄명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엄중하게 경고했던 실형이 아니라, 또 벌금이다. 집행유예 기간 중에는 다시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고, 실형 아니면 벌금을 선고해야 하는데, 실형을 선고하면 앞에 유예했던 징역형까지 되살아나므로 두 배의 실형을 복역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집행유예로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를 걷어찬 피고인의 잘못이지만, 뒤에 범한 범죄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그다지 무거운 것은 아니라서 차마 실형을 선고하여 앞의 집행유예까지 실효되도록 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벌금의 액수는 비교적 컸다. 이 숫자 뒤에는 그걸 선고한 판사의 한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소소한 동네 말썽꾼인 노인네를 길게 징역 보내는 건 망설여지고, 어차피 벌금도 못 내서 벌금 대신 노역장에 유치되어 몸으로 때울 것이 뻔하니 석 달 정도 실형을 보낸다는 맘으로 벌금액을 정했을 것이다.

임 판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숫자 뒤에서 판사들의 표정을 엿보며 굳이 이해하려 하는 것도 어차피 밖으로는 굽지 않는 동업자의 팔 같은 거다. 동업자조차 솔직히 답답해지는데 이런 범죄경력 조회로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집행유예가 세 번 반복되고 난 후에야 판사들의 인내심이 고갈된 모양이다. 징역 4월의 첫 실형 이후 숫자는 사채 원리금 늘어나듯 불어나서 징역 10월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교도소의 교정행정은 노인을 전혀 ‘교정’하지 못한 것 같다. 출소 후 석 달도 안 되어 이번에는 처음 등장하는 죄명으로 법정에 돌아왔다. 형법 제337조 강도상해,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죄다. 그런데 범행 내용은 죄명에서 상상되는 그림과는 조금 다르다.

노인은 전에도 수시로 무전취식을 일삼던 만만한 동네 식당에 들어가 막무가내로 소주를 시켜 세 병째 마시다가 여주인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소주를 아예 박스째로 들고 나가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여주인이 놀라서 붙잡으려 하자 노인은 손에 잡히는 소주병으로 여주인의 머리를 내려친 것이다. 단순 절도범이라도 체포를 면하기 위해 사람을 폭행하는 순간 형법 제335조의 준강도로 신분이 바뀐다. 그 폭행으로 사람이 다치면 처음부터 칼 들고 들어가 돈을 뺏으려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강도와 마찬가지로 형법 제337조의 강도상해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제대로 맞지는 않았는지 여주인의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노인은 이번에는 제대로 위험천만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온종일 술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 사건기록과 씨름을 했는데, 야근할 때만 되면 귀신같이 찾아오는 옆방 정보왕 판사는 법원 앞 단골 카페에 가서 맥주 한잔만 하자고 졸라댔다. 박차오름 판사도 맞장구치는 바람에 따라나섰지만 임 판사의 머릿속은 여전히 사건 검토 모드다. 푸념하듯 두 판사에게 노인의 범죄 히스토리를 죽 설명하고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뱉었다.

“도대체 부장님이 이해가 안 돼. 실형이야 피할 수 없지만 형량이 너무 무겁게 될 테니 작량감경(정상을 참작하여 하는 감경)도 하고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도 하자시는 거야.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서 3주 진단 정도지만, 그건 우연한 결과일 뿐이고 사람 머리를 병으로 내리친 사건 아냐? 일생 술 먹고 상습적으로 동네 사람들을 괴롭힌 사람인데, 술을 먹었다는 이유로 가중처벌은 못할망정 감경이라니 그걸 누가 납득하겠어?”

박 판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해도, 경찰 수사방법도 마음에 안 들어요. 제 주심 사건 중에도 이른바 ‘주폭’ 사건이 여러 건 있는데, 어떤 건은 사소한 경범죄로 입건된 사람의 1년 전, 2년 전 행동까지 묶어서 사건을 키워 놓았더라고요. 경찰이 동네 상인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에게 피해 입은 기억 없냐고 일일이 물어보고 다녔더군요. 경찰서별로 실적 경쟁을 벌이는 것 같아요. 게다가 잡혀 온 사람은 모두 이 사회 밑바닥의 취약 계층 사람들이라고요.”

그놈의 사회적 약자 타령?

임 판사의 말투는 까칠했다. “또 그놈의 사회적 약자 타령? 자기가 힘들면 남에게 합법적으로 피해 끼칠 권리라도 부여되는 건가요? 그건 응석 아닌가요? 우리 사회는 술 먹은 사람들의 응석에 너무나도 관대해요. 좋은 사람인데 술 때문에 실수했다, 사회가 팍팍하니 술에라도 의지해서 견디는 거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술 먹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아니잖아요. 거의 대부분 남성, 그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그러죠. 알량하지만 남자라는 권력, 나이 먹었다는 권력을 면허증 삼아 술을 핑계로 세 살 먹은 애처럼 떼쓰고 행패 부리는 거라고요. 그런 미성숙한 저지레를 왜 사회가 오냐오냐 받아줘야 하는 거죠?”

“이야, 임 판사, 금주령이라도 내릴 기세인데? 알 카포네가 밀주하던 시대가 도래하는 건가?” 정 판사가 끼어들었다.

“금주령은 아니 되옵니다! 소녀 굶어 죽습니다.” 카페 여사장도 합세했다. “그렇긴 한데, 아까 그 주정뱅이 노인네 사건은 심하긴 심하네요. 아니 여자 머리를 소주병으로 내리쳤다면서요. 술 먹고 상습적으로 사고 치는 인간을 술 먹었다는 이유로 감경해준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 판사님들이 화성에 사느냐는 소리를 듣지.”

“법이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기 의사로 죄를 선택했다는 점을 비난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아이, 정신병자나 중증 치매 환자의 행위는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지 않고 보호처분이나 치료 대상으로 삼는 거지요. 그래서 심한 음주로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없거나 약한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 역시 법적으로 달리 취급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달라요.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actio libera in causa)거든요.”

“네? 그건 또 무슨 외계어예요? 원인이 어떻고 자유가 어떻다고요?”

“쉽게 말하자면, 술에 취하면 비슷한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은 것을 뻔히 알면서 술을 먹고 만취하여 결국 사고를 친 경우에는 심신미약 감경을 할 수 없다는 얘기죠. 형법 제10조 3항이 그렇게 정하고 있어요. 나중에 저지른 짓은 정상적인 판단 능력 하에서 한 것이라 보기 어렵더라도, 자신을 그런 상태로 만든 원인 행위 자체는 자유 의지로 행한 것이니 책임지라는 거죠.”

“우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멋있는 말 같은데요? 자유 의지가 어떻고, 책임이 어떻고.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 뭐 어쨌든 판사님들은 술 드셔도 샌님같이 얌전한 분들이니 자유롭게 술 더 시키셔도 되잖아요?” 여사장은 능청스레 메뉴판을 펼쳐 보였다. <다음주에 계속>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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