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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2.12 20:29 수정 : 2016.02.13 14:57

gomnme@naver.com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8) 마지막 재판 ②

(지난주 내용 요약: 대학원생 제자를 모텔로 데려가 준강간한 사건의 피고인 교수가 옥중에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 주심판사였던 박차오름 판사는 항소심 변호인 쪽으로부터 근거 없는 의혹 제기를 당하며 SNS상에서 먹잇감이 되는데…. 하필 박 판사가 요즘 준비중인 재판은 불륜을 들킨 아내가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을 죽인 사건이다. 피고인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이게 뭐요?” “…”

한세상 부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박차오름 판사의 손에서 봉투를 낚아채서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거칠게 갈기갈기 찢었다.

“사직서? 일신상의 사유? 이것 봐 박 판사, 당신 지금 판사 된 지 이제 겨우 열 달 좀 넘었어. 이런 거 쓸 만큼 머리가 굵었다고 생각해?”

“부장님, 제 성급한 판단으로 피고인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 부장이 성난 어조로 말을 중간에 끊었다. “책임? 어디서 그런 건방진 소리가 나와! 지금까지 혼자 재판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여긴 합의부야. 세 명의 판사가 토론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는 곳이라구. ‘제 성급한 판단’이라니, 그럼 재판장인 나와 우배석인 임 판사는 허수아비인가?”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게다가 성급한 판단은 지금 하고 있구만. 아직 그 재판은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판사는 신이 아니야. 결과적으로 결론이 틀렸다 해도,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최선을 다했고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면 되는 거야.”

“…전 제가 최선을 다했는지,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지도 자신이 없어요.”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초임 판사인 박 판사가 아니라 재판장인 내가 더 져야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돌아가서 다음주 선고할 판결 초고나 빨리 가져와!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나 들여다보느라 계속 자기 할 일 소홀히 하고 있으면 내가 나서서라도 그만두게 만들 거야!”

국민참여재판, 그거 정말 좋아?

막무가내로 소리치는 한 부장의 기세에 눌려 박 판사는 힘없이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와서 국민참여재판 관련 자료들을 펼쳐 보았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눈을 반짝거리며 공부하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언론과 네티즌들의 관심이 박 판사에게 집중되다 보니 때마침 박 판사가 속한 부에서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다는 것 역시 뉴스가 되었다. 사건 내용 자체도 충분히 관심을 끌 만했다. 불륜을 들켜 남편에게 추궁당하던 아내가 남편을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니까.

임 판사는 박 판사 눈에 띄지 않도록 모니터를 살짝 돌려서 관련 기사와 댓글들을 읽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여론은 험악했다. 그런 여자가 판사로 있는 부에 그런 사건을 배당한 것 자체가 일방적으로 아내 쪽에 유리하게 하려는 것 아니냐, 전관예우일 거다, 배심원이 있어봐야 들러리고 결론은 정해져 있을 거다, 간통죄 없애더니 바람피운 년이 도리어 서방에게 칼을 꽂는 지경까지 왔다…. 박 판사와 피고인을 싸잡아 성적 모욕을 가하는 댓글까지 읽으며 임 판사는 이를 악물었다. 법적 조치를 취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쓰나미 같은 지금 상황에서는 신중해야 할 것 같았다.

저녁 시간, 내심 박 판사를 혼자 남겨두기 싫었지만 오래전부터 약속한 고교 동창들과의 식사 자리에 가볼 수밖에 없었다. 일 때문에 바빠서 두 번이나 연기한 죄가 있어서다.

“오, 임 판사님! 이제야 귀한 얼굴 한번 보여주시누만!” “이거 판사 된 친구놈 얼굴 보기 너무 어려운데?” 왁자지껄하게 쏟아지는 타박 속에 삼겹살 지글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허튼소리가 한참 오간 후, 소주가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동창들은 처음에는 임 판사 눈치를 보느라 꺼내지 않던 진짜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요즘 유명한 그 미스 함무라비 판사, 실물도 이쁘냐? 늘 미니스커트 입고 출근하냐? -너랑 혹시 섬싱 없냐? 뭐하고 있냐, 처녀 총각이 한방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그 여판사 진짜 그리 과격하냐? 거의 탈레반이라며?

임 판사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한 친구가 화제를 돌렸다. -야, 이번에 국민참여재판 한다며? 나 그거 한번 보러 가고 싶더라. 미국 영화 보면 멋있잖아. 국민이 직접 재판한다, 그거 진짜 민주적이고 좋잖아. 역시 선진국이라 달라.

아까 읽던 댓글들이 식사 자리에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였을까. 임 판사는 별 얘기도 아닌 친구의 말에 뾰족하게 대꾸했다. “글쎄다. 그 선진국 국민들께서 직접 하신 재판 때문에 폭동까지 일어났었지 아마?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백인 경찰들에게 자비롭게도 무죄평결을 내린 배심원들 때문에. 그뿐이야? O.J. 심슨 사건은 또 어떻고. 한번은 어느 학회 때 엘에이(LA)에서 일하는 재미교포 변호사들과 만난 적이 있는데, 물어보더라구. 한국 법원은 왜 굳이 주도적으로 미국 배심제를 도입했냐고. 정작 미국에서는 배심원들의 인종적 편견과 미숙한 판단, 배심원으로 불려 나가는 시민들의 불편 등등 때문에 불만이 많다면서.”

“문제점도 좀 있겠지만, 그래도 국민이 직접 결정한다는 건 좋은 거잖아. 난 솔직히 판사도 국민이 직접 선거로 뽑으면 좋겠어.”

“그래? 그럼 넌 국민이 직접 선거로 뽑은 국회의원들과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늘 엄청 만족해 왔겠구나. 현명한 국민들이 늘 옳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말야. 판사도 그런 분들 중에 진실한 분들로 뽑으면 되겠네.”

“…너 어째 말이 좀 삐딱하다?”

“그래? 내가 원래 비뚤어진 놈이었잖니. 예전부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국민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면 늘 옳다고들 생각하는 거야? 진짜로? 유태인은 열등한 인종이니 살처분해야 한다는 것이 독일 국민 다수의 뜻이었고, 흑인은 백인과 같은 버스를 타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라는 나라 국민 다수의 뜻이었지. 여자아이를 강제로 할례하고 민간인을 납치해서 참수하고 고대 유적을 파괴하는 행위들도 진심으로 옳은 일이라 믿으며 열광하는 사람들의 지지 위에서 벌어지지. 난 말이야, 소수의 악마들이 선량한 국민들을 총칼로 위협해서 인류의 어리석은 악행들이 벌어졌다는 식의 얘기는 모두 사기라고 생각해. 실은 선량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동참했었다구. 권력은 언제나 부패하니까 분리하여 견제해야 한다는 권력분립론은 누구나 얘기하지만, 실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있어. 국민 역시 견제받아야 한다구.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철저한 불신 위에 국민, 의회, 정부, 법원, 언론, 정당 모두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인 거야.”

“뭐 임마? 요즘 영화 보니까 대중은 개돼지라고 내뱉는 신문쟁이놈이 나오더라. 너도 알량한 판사질 한다고 국민들이 우스워 보이냐?” 잔뜩 취한 동창의 주먹이 날아와서 신들린 듯 이어지는 임 판사의 독백을 멈추게 했다. 자리는 파장이 되었고, 임 판사는 찢어진 입안에 흐르는 찝찔한 피를 삼키며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피고의 자살 시도에 충격받은
박 판사는 사표 냈지만 타박만
다음은 불륜을 들켜버린 아내가
폭행남편 죽인 사건 국민참여재판
온통 관심은 박 판사로 집중됐다

다른 강간 사건 공판기일 중에
부장판사도 사고를 치고 말았다
세 명 중 두 명이 문제판사인 셈
이게 무슨 난장판이란 말인가
국민참여 공판준비일이 다가왔다

막말 부장판사 한 명 추가요~

다음주, 예정되어 있던 남편 살해 사건 공판기일은 국민참여재판 준비를 위한 공판준비기일로 바뀌어 진행되었다. 여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어서 그런지 공판검사와 국선변호인 양쪽 모두 의욕적이었다. 쟁점은 살인의 고의 인정 여부, 그리고 정당방위 성립 여부였다. 변호인은 남편의 폭력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피고인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우발적으로 찌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부장은 2월말 인사철에는 재판부가 변경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전에 재판을 마치기 위해 다소 촉박하지만 국민참여재판 기일을 3주 후로 지정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진행한 강간 사건 공판기일 중에 발생했다. 대학생이 모바일 채팅으로 만난 가출 소녀를 재워준다며 자취방으로 데려가 강간한 사건이다. 종일 찌푸린 표정이던 한 부장이 재판을 진행하다 말고 갑자기 기록을 탁 덮으며 방청석에 앉아 있는 대학생의 모친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어제 탄원서 냈죠?” “네에.” 모친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에게 기회를 달라고요?” “네, 부디 한번의 실수로 인생을 망치지 않게….” 그 순간, 한 부장은 법대를 오른손으로 내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앞날이 구만리 같기는커녕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할 일이 구만리 같은 자식을 세상에 내놓고 그게 할 소리요? 열다섯 살 여자애한테 당신 자식놈이 한 짓을 알기나 해?”

임 판사는 놀라서 한 부장을 쳐다보았다. 한 부장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판사이기 이전에 딸 둘을 키우는 아빠로서 내 이런 놈들은 화학적 거세가 아니라 그걸 아예 싹둑 잘라 버리고 싶어. 어디서 뻔뻔하게 한번의 실수 운운이야!”

박 판사가 한 부장의 왼팔 법복 자락을 살며시 잡으며 간절하게 말리려 들었다. “부장님, 제발 고정하셔요.”

순간, 한 부장은 팔을 거세게 뿌리친 후 박 판사를 노려보며 법정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어디서 건방지게 재판장이 말하는데 배석이 끼어들어!”

임 판사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는 재판부인데 이 무슨 난장판이란 말인가. 원래 입이 좀 거칠고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평소의 한 부장답지 않았다. 도를 넘었다.

다음날부터 ‘상습 막말 판사’라는 제목 아래 한 부장의 얼굴이 언론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속시원한 일갈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막말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더구나 한 부장은 과거에도 법정에서 거친 언사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번에는 법적으로 대등한 합의부 구성원인 배석판사를 비하하고 무시하는 독재자라는 비난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3주가 지났다. 오전 10시, 법정에는 법원이 관할 구역 내 주민 중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백 명이 넘는 배심원 후보자들이 가득했다. 연령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재판부의 입정을 기다렸다. 세 명의 판사가 법대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셋 중 둘은 요즘 유명세깨나 타고 있는 얼굴들이다. 호기심 어린 눈길이 법대 위로 모였다. 그들의 기대와 달리 한 부장은 진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국민참여재판은 사법권도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참석하여 주신 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중에서 아홉 분의 배심원과 한 분의 예비배심원을 선정하겠습니다.”

배심원 선정 절차가 시작되었다. 한 부장은 배심원 결격 사유에 해당하는 몇 가지를 물었다. 법조인이나 법원공무원, 경찰관 등은 직업상 다른 배심원들에게 과도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배심원이 될 수 없다. 문제는 “기사나 보도를 통해서 이 사건을 알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절반 이상이 손을 들었다. 한 부장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워낙 알려진 사건이라 도리가 없군요. 그렇다면, 이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이미 읽은 기사가 아니라 앞으로 이 법정에서 제시되는 증인의 증언과 같은 증거에만 기초해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렁찬 “예!”라는 답이 돌아왔다.

검사와 변호인의 무이유부기피신청

공통질문이 끝나자 법대 밑 책상에 앉은 참여관이 번호가 적힌 탁구공이 든 상자에서 공을 무작위로 꺼내었다. 번호가 불린 후보자 열 명이 앞으로 나와 배심원석에 앉았다. 검사와 변호인은 후보자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범죄 피해를 받아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자녀가 있으세요? -간통죄 폐지에 반대하셨던 분 있으세요? -사형 제도에 관한 의견은 어떠세요?

검사와 변호인은 각각 5명까지 무이유부기피신청(이유를 밝힐 필요 없이 배심원에서 제외시키는 신청)을 할 수 있다. 검사는 피고인에게 동정적일 가능성이 높은 후보자를, 변호인은 피고인에게 적대적일 듯한 후보자를 골라 기피신청했다. 처음 뽑힌 열 명 중 절반이 자리로 돌아가고 다시 무작위로 뽑힌 후보가 그 자리를 채운 후 다시 질문에 답했다. 이번에는 세 명이 기피당했다. 같은 일을 반복한 끝에 결국 열 명이 확정되었다.

배심원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재판부 쪽을 바라보았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이구야, 잘못 걸렸네. 종일 이 자리에 앉아서 징역살이해야 하는 거야? 전립선 때문에 화장실 자주 가야 하는데….

-무서워…. 살인범이 나 쳐다보면 어떡해. 꿈에 나올 것 같아. 무서워….

-근데 법정에 왜 망치가 없지?

-잘됐어. 조심조심 애매하게 답하길 잘했어. 내가 어떻게든 매 맞는 아내들의 고통을 배심원들에게 설득해서 분위기를 바꿔놓겠어. 이 사건은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거야.

-잘됐구만! 서방질한 년이 적반하장으로 남편을 찔러 죽이는 패륜을 내 어찌 가만두리. 모든 게 거꾸로 돌아가는 이 엉터리 같은 놈의 세상을 바로잡고 말겠어. <다음주에 계속>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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