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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8) 마지막 재판 ③
(지난주 내용 요약: 불륜을 들켜버린 아내가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을 죽여버린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에스엔에스(SNS)상에서 먹잇감이 된 박 판사에 이어 한세상 부장판사도 사고를 쳐버렸다. 여론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드디어 국민참여재판일이 다가왔고, 한 부장은 배심원과 예비배심원 10명을 선정했는데….)
“여러분 중 한 분은 예비배심원으로서 9명의 배심원 중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분이 발생할 경우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방금 추첨으로 예비배심원을 선정했습니다만, 어느 분이 예비배심원인지 지금은 알려드리지 않습니다. 일단 열 분 모두 배심원이라는 생각으로 재판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건 심리가 모두 끝난 후, 배심원 평의에 들어가기 직전에 누가 예비배심원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평의가 시작되기 전에는 사건에 관한 견해를 밝히거나 다른 사람과 의논하시면 안 됩니다. 재판절차 외에서 따로 사건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셔도 안 됩니다.”
설명을 마친 한세상 부장은 잠시 멈춘 후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배심원들은 모두 일어나십시오. 1번 배심원께서 대표로 선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낡은 양복을 입은 60대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선서서를 낭독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방청석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 숙제로 법정 방청 중인 고등학생들이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법정 내 백여 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얼마 만인지조차 모르겠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봐주는 것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어젯밤 늦게까지 단벌 양복을 다림질한 보람이 있었다.
피고인의 얼굴, 판사 엄마의 얼굴
“피고인은 피해자가 1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부엌으로 달려가 총길이 23㎝, 칼날길이 12㎝의 과도를 가져와 방구석의 빨래더미 밑에 숨기고는…”, “피해자의 복부를 1회 깊이 찔러 복부자상에 의한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검사가 공소장을 낭독하는 동안 노인은 피고인을 노려보았다. 서방 죽인 년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뻔뻔스럽게….
사실 사건 내용은 뉴스에 여러번 나와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요즘은 인력소개소에 가봤자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아서 종일 폐지 주우러 돌아다니는 것이 고작. 티브이 보는 것이 큰 소일거리다. 이 재판에 배심원으로 불려 오게 되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지.
아나운서가 고래고래 큰 소리로 흥분하여 전하던 사건 내용 중 노인을 가장 격분시킨 것은 죽은 남편이 건설 현장 따라다니며 일하는 동안 피고인은 집에서 바람을 피웠다는 부분이었다. 어린이 전집 판매 영업사원과. 웃기는 건 애도 없는 부부였다는 점이다. 애도 없는 집에 어린이 전집 판매원이 드나드니 금세 동네에 소문이 났고, 소식을 들은 남편이 열불이 나서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 여자를 닦달하다가 그만 일이 난 것이다. 세상에 바람피운 년이 방에 칼까지 숨겨놓고 있다가 서방을 찔러 죽이다니 이런 천벌을 받을 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변호사란 놈은 자꾸만 여자가 좀 맞은 사진이랑 진단서 나부랭이를 보여주며 물타기를 하려 드는데, 아니 그럼 제 놈은 마누라가 집구석에서 외간 사내놈과 눈이 맞아 더러운 짓을 한 걸 보고도 주먹이 나가지 않을 것 같은가? 정말 이건 남편이 때려죽였어도 할 말이 없는 사건 아닌가?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자꾸만 20년 전에 집안에 돈 될 것 다 들고 집을 나가버린 여편네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노인은 심사가 불편했다. 변호사는 자꾸만 과거지사를 들추며 죽은 남편을 알코올 중독 환자에 상습 폭력배로 몰아가고 있었다. 옆에 앉은 2번 배심원 여자는 자꾸만 눈물을 질질 짜고 있다. 점심식사 때 들으니 피고인과 비슷한 또래인 30대 후반의 애엄마인 모양이다. 검사는 도대체 왜 저런 여자가 배심원석에 앉도록 놔둔 건지 모르겠다. 일처리 하는 꼴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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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힐끔거리는 9번 백수 배심원
질문지 내는 진지파 5번 배심원
박 판사는 자꾸만 손이 떨려왔다
‘아빠도 엄마를 때릴 때 그랬었지’ 피고인의 미필적 고의 설명한
검사는 정당방위 주장을 반박
변호인은 아내가 반격 안했다면
남편에게 살해됐을 거라 재반박
피고인은 고개 숙여 울기만 했다 그 텅 빈 눈을 언젠가 보았지 박 판사는 이런 눈을 본 일이 또 있다. 첫 출근 때 법원 앞에서 1인시위 중이던 할머니의 눈이다. 박 판사는 그때 할머니 옆에 앉아서 대형 병원에서 수술 중에 아들을 잃고 제대로 된 설명조차 듣지 못한, 그리고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했지만 증거가 없어서 지고 만 사연을 몇 번이고 들어드렸었다. 이미 종결되어 확정된 재판 기록을 찾아서 읽고는 할머니에게 힘닿는 데까지 설명해 드리기도 했다. 법적으로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지만 최소한 어찌된 일인지라도 알려드리려고 말이다. 가을쯤부터 법원에 나오지 않던 할머니를 일주일 전부터 다시 보게 되었다. 할머니는 박 판사를 공격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노인과 싸우러 나오고 계신다. 마치 친손녀를 지키려는 것 같은 기세로 노인과 삿대질을 하며 싸움을 벌이더니 박 판사를 모함하지 말라는 피켓까지 만들어 와서 맞시위를 벌이고 있다. 박 판사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박 판사는 법대 위에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길 잃은 아이처럼 두렵고 무기력했다. 지금 재판하고 있는 사건, 엄마가 겪어야 했던 일들, 자기를 둘러싸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뒤섞여서 박 판사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1번 배심원 노인은 5번 배심원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대학원생이라는 저 여자애는 증인신문 때마다 메모지에 뭘 잔뜩 써서는 질문해 달라고 판사에게 제출하는데, 들어보면 죽은 남편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변호사의 장난질에 맞장구치는 내용이다. ‘매 맞는 아내 증후군’이니 ‘학습된 무기력’이니 하는 요상한 말을 써가며 잘난 척, 아는 척을 하는 어투라 더욱 심사가 뒤틀린다. 노인은 종일 폐지를 줍고 소주 한잔 걸친 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때면 종종 젊은 애들에게 말을 걸곤 한다. 옷차림이 그게 뭐냐고 야단치기도 하고, 애국애족에 대해서 훈계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저런 잘난 계집애들은 무슨 동네 미친개 보듯 질색을 하며 다른 칸으로 옮겨 가버리곤 한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투명인간이니 미친개 취급이라도 받는 것이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혼자 사는 쪽방으로 돌아오면 잠이 오지 않아 고물 텔레비전을 친구 삼아 시간을 보낸다. 아나운서가 목청 높여 시원시원하게 떠들고 흥분하는 뉴스쇼를 한참 보고 있으면 아직은 세상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직은. 노인은 변호사가 피고인의 친정 여동생이니 이웃이니 하는 한통속들을 불러내어 고인을, 열심히 일한 한 집의 가장을 모욕하는 소리들을 듣고 있기가 힘들었는데, 검사가 최후 변론에서 조목조목 변호인의 주장을 반박하자 속이 다 시원했다. 검사는 먼저 살인할 고의가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설사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칼로 사람의 중요한 장기가 모여 있는 복부를 깊이 찌른 이상 범행 순간 상대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면서도 이를 용인한 것이어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는 부분을 공을 들여 설명했다. 그러고는, 변호인 쪽의 정당방위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 시작했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정당방위가 성립하려면 침해행위에 의하여 침해되는 법익의 종류, 정도, 침해의 방법, 침해행위의 완급과 방위행위에 의하여 침해될 법익의 종류·정도 등, 일체의 구체적 사정을 참작하여 방위행위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것이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비록 피해자가 쓰러진 피고인을 걷어차는 등 심하게 구타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피해자는 맨손이었고, 만취 상태여서 비틀거리기도 했습니다. 흉기를 든 것은 피고인입니다. 상대방의 소중한 생명을 빼앗는 것 외에는 달리 자신을 방어할 방법이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피고인입니다. 불륜행위를 저질러 부부간의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이를 알게 된 피해자가 흥분하여 어느 정도 폭력적으로 행동하였다 해도, 이를 빌미로 오히려 피해자의 목숨을 앗아간 행위는 우리의 사회통념상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상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피고인은 피해자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는 과도를 가져와 숨겨놓기까지 했습니다. 순수한 방위행위였는지조차 의심이 가는 측면입니다. 이런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해주면 이를 악용하여 적반하장의 패륜적 범행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예비배심원이 결정되다 검사는 배심원들 한 명 한 명을 차례로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원론적인 말씀도 드려보겠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중에는 평소 우리나라에서는 정당방위가 너무나 좁게 인정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가졌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실제로 상대가 사망한 사건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된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정당방위가 폭넓게 인정되는 것이 정말로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일까요? 자기집 뒷마당에 행인이 실수로 들어오기만 해도 엽총을 꺼내들어 겨누는 미국 영화 같은 살벌한 세상을 원하십니까? 정당방위는 복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자기보호 본능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남용되면 사회의 평화와 법질서를 저해할 위험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앉아서 당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지요. 단지 그 결과에 대해 사후적으로 평가할 때 경우에 따라 일부의 책임을 지울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정당방위를 좁게 인정하고 있지만 양형에 있어서는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를 충분히 참작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가 우리 사회의 평화를 지키는 데 나은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 중에도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구타당하던 당시의 상황을 심각하게 평가하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입니다. 그런 중대한 결과가 발생한 사건에서는 더더욱 정당방위를 손쉽게 인정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검사는 대학원생인 5번 배심원의 눈을 오래도록 주시하며 말을 마쳤다. 변호인은 공판 내내 하던 주장들을 되풀이했다. 새로운 것은 “당시 피고인이 반격하지 않았다면 피해자는 피고인을 때려죽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흉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하니 살인의 고의가 없다며 폭행치사나 상해치사 정도로 기소되었겠지요. 피해자의 불륜을 알고 격분했다는 범행 동기와 만취 상태였다는 점까지 참작하여 관대한 처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반격한 피고인의 행위는 파렴치한 살인죄로 평가받아야 합니까?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라는 일갈이었다. 피고인은 고개를 숙인 채 울기만 할 뿐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죄송합니다”라는 울음 섞인 작은 목소리를 냈다. 최후 변론까지 모두 끝났다. 이제 배심원들의 시간이다. 한 부장은 배심원들에게 평의 절차 및 주의사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후, 이렇게 말을 맺었다. “배심원 여러분, 오랜 시간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비배심원이 어느 분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1번 배심원입니다. 예비배심원은 평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절차가 모두 끝날 때까지 별도의 방에서 대기하여 주십시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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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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