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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2.26 18:41 수정 : 2016.02.28 10:02

gomnme@naver.com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8) 마지막 재판 ④

(지난주 내용 요약: 불륜 들켜버린 아내가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을 죽여버린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서방 죽인 년이 무슨 할 말이 있냐’고 생각하는 1번 배심원 60대 노인은 변호인의 정당방위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보지만 어쩌나. 배심원 평의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예비배심원으로 밀려나는데…)

“유무죄에 대한 평결은 배심원 여러분의 만장일치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만장일치에 이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끝까지 의견 일치가 되지 아니할 때에는 다수결에 의한 평결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평결에 앞서 반드시 재판부의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평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잘 상의하셔서 배심원 대표를 뽑으시기 바랍니다. 번호가 가장 앞인 2번 배심원이 사회자가 되어 대표를 뽑으시는 방법을 권해 드립니다.”

한세상 부장과 두 판사가 먼저 퇴정하여 판사실로 향한 후, 참여관의 인솔하에 배심원들은 평의실로 향했다. 1번 배심원만 홀로 남겨졌다. 재판 내내 곧게 펴져 있던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그는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독거노인으로 되돌아갔다. 잠시나마 세상에 속해 있다는 벅찬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익숙한 고독만 텅 빈 법정에 함께했다. 실무관이 노인을 대기 장소로 안내했다.

가부장주의? 윤리도덕?

평의실, 배심원들은 종일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어야 했던 갑갑함에서 벗어나 기지개도 켜고 서로 힘들지 않았냐며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별도로 뽑기도 번거로우니 그냥 2번 배심원을 배심원 대표로 하자는 데 금세 좌중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2번 배심원은 싫다고 한사코 손사래를 쳤지만 도리가 없었다. 공판 내내 눈물을 닦던 30대 후반 여성이다. 대표로 추대되었지만 소극적으로 앉아만 있는 그녀를 대신하여 5번 배심원이 논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증인신문 때마다 적극적으로 질문사항 메모지를 재판부에 전달하던 대학원생이다.

“우리, 순서대로 먼저 살인의 고의가 인정되는지부터 토론해 봐요.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고의가 인정될까요?”

“에이, 그래도 그 아줌마가 계획적으루다가, 고의적으루 막 그런 건 아니잖아유. 난리통에 어쩌다보니 확 찌른 거지. 안 그류?” 순댓국집 주인이라는 50대 남성이다.

5번 배심원 대학원생이 웃으며 말했다. “에구, 아저씨, 재판 내내 검사가 설명하던 거 안 들으셨어요? 꼭 계획적으로 범행한 경우만 고의가 인정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이러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일을 저지른 경우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잖아요.”

순댓국집 주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류? 여학생은 어찌 그리 복잡한 내용을 잘 알아들었슈? 법대생이유? 그니깐 그 말인즉슨, 꼭 사람을 아주 고의적으루 죽인 경우가 아니래두 살인죄가 되기두 한단 말이쥬?”

“전 사회학 전공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고의적이라는 말은요….” 대학원생은 참을성 있게 다시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 때문인지 다른 배심원들은 미필적 고의 인정에 이의가 없었다. 대학원생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 쟁점으로 넘어갔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정당방위의 인정 여부예요. 우리나라 사법부는 이런 사건에서 가정 내 약자인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억압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둔감해요. 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야….”

“이데올로기유? 이게 무슨 사상범 사건인가유?” 눈을 껌뻑거리는 순댓국집 주인의 질문에 대학원생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말씀이 아니구요, 우리 사회의 남성우월주의 프레임에 갇힌 채 이 사건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죄송한데, 논의를 좀 더 진행해도 될까요?” 그녀의 말투에 희미하게 섞인 짜증을 느꼈는지 순댓국집 주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배심원들은 가타부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초조해진 대학원생의 말이 빨라졌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매맞는 아내 증후군’, ‘국제앰네스티 보고서’ 등의 용어가 반복되자 9번 백수 청년은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50대 남성이자 중학교 교감선생인 배심원이 대학원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먼저 윤리도덕의 문제를 생각합시다. 혼약을 깨뜨리고 불륜을 저지른 사람을 약자나 피해자로만 볼 수 있습니까? 남편은 피해자가 아닙니까? 법은 잘 모르지만 정당방위라고 하려면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어야지요. 사실 간통죄를 없애버린 것부터 잘못된 일이오. 가정을 파괴당한 사람의 분노를 법이 처벌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분노가 어디로 가겠소. 이런 비극이 생길 수밖에.”

“불륜과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는 별개 문제예요. 논리적으로 생각하셔야죠. 그리고 애초에 먼저 상습적으로 불륜행위를 하고 다닌 건 남편이에요. 노래방 도우미, 동네 과부, 초등학교 동창 등등 동네에 소문난 바람둥이였는데, 뻔뻔하게도 그걸 아내에게 감추려 들지도 않고 당당했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는 아까 못 들은 것 같은데?” 교감선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에 어떤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데 국선변호인이 그 부분을 제대로 못 짚길래 답답해서 제가 좀전에 다시 검색해 봤어요.”

한편, 판사실에서는 임바른 판사가 쉬는 시간에 인터넷 검색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차오름 판사 관련 기사와 반응들이다. 박 판사를 옹호하는 할머니의 1인시위가 화제다. 할머니는 기자들의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훔쳐가며 박 판사와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들 잃은 할머니를 헌신적으로 도운 초임 여판사의 미담 기사가 하나둘 늘어가는 사이에, ‘미스 함무라비 판사와 A대학의 악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있었다. 할머니 아들이 수술받은 대형 병원이 A대학병원이라는 점에 주목한 기사다. 물론 박 판사도 A대학이사장 아들의 준강간 사건 재판 때 이 이야기를 꺼낸 적 있긴 하지만, 워낙 큰 수술을 많이 하는 유명 병원이기도 하고, 서로 아무 연관도 없는 사건들이라 무심히 넘겼었다. 하지만 어떤 기자의 창의적인 펜은 마치 두 사건 사이에 대단한 인과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얼기설기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임 판사는 한숨을 쉬었다. 검색목록 맨 위에 ‘단독, A대학병원에서 만난 의외의 얼굴’이라는 제목이 뜨길래 클릭하려는데, 한 부장이 판사실 문을 열었다. “법정으로 갑시다. 배심원 대표가 할 말이 있다는군.”

증인신문 때마다 질문 메모지를
재판부에 내던 대학원생 5번 배심원
평의실에서 논의 이끌다가 잘리고
그 자리에 1번 배심원이 들어왔다
다시 온 그 60대 노인은 어리둥절

재개된 평의, 논쟁은 뜨거웠다
“정당방위요? 온정주의는 안돼요”
“전날도 남편이 죽도록 때렸대요”
“아내가 미리 칼 준비했다잖아요”
“80㎏ 남편이 40㎏ 아내의 배를…”

2번 배심원의 폭로

2번 배심원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재판장님, 평의하기 전에는 배심원끼리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하셨죠? 만약 누가 평의 전에 자꾸 다른 배심원을 설득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누가 그랬지요?”

“5번 배심원이요. 점심식사 때와 휴정할 때 저한테 와서는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자꾸 얘기하더라고요. 어차피 꼴통 영감들하고는 말이 안 통할 거라면서.”

5번 배심원은 당황해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리고요, 재판 외에 따로 사적으로 사건에 대해 알아보면 안 된다고도 하셨는데,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얘기를 토론 때 한참 하기도 했어요.”

“5번 배심원! 그게 사실입니까?” “….”

“중대한 의무 위반이 발견된 이상, 더 이상 배심원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5번 배심원을 해임합니다. 귀가하세요.” 한 부장이 단호하게 선언하자 5번 배심원은 망연자실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5번 배심원의 공석은 예비배심원이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실무관은 어서 1번 배심원을 모시고 오세요.”

평의실, 다시 평의가 시작되었다. 1번 배심원 노인은 아직도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선서를 할 때만 해도 기세가 대단했었는데, 혼자 따로 대기하면서 풀이 죽은데다가, 한참 진행되던 논의 중간에 끼어들게 되어 어렵기도 했다.

2번 배심원은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정말 아까 그 여학생 얘기 듣느라 힘들었어요. 온갖 아는 척은 다 하면서 어쩜 아들 잃은 엄마 마음은 하나도 모르죠? 저도 사고로 남편 잃고 혼자서 중학생 아들 하나 키우고 있어요. 이 녀석이 벌써 사춘기라고 여자친구 꽁무니만 따라다니는데 얼마나 밉고 서운한지….” 그녀의 눈에 또 눈물이 맺혔다. “전 걔 없으면 못 살아요. 며느리 손에 아들을 잃은 그 할머니 얼굴 다들 보셨지요? 그게 산 사람 얼굴인가요? 이건 두 사람을 동시에 죽인 사건이라고요. 전 그 할머니 볼 때마다 울음이 나서….” 몇몇 배심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의 내내 별말이 없던 50대 주부 배심원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아들 죽은 것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아들 죽인 며느리가 정당방위라고 하면 그 할머니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어요. 이 사건 티브이에도 나오고 유명한 사건인데 우리가 그렇게 판결했다가는 나가서 돌 맞을걸요?”

교감선생이 맞장구쳤다. “온정주의로 흐를 사건이 아니지요. 평소 가정폭력이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찔러 죽일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정당하게 해결했어야죠.”

“법적으로요? 어떻게요?” 30대 어린이집 교사인 여성 배심원이 반문했다. “아까 피고인이 그랬잖아요. 남편이 서랍장 구석에 숨겨놓은 이혼신고서 찾아내서는 반죽음이 되도록 때렸다고요. 집을 나갔더니 남편이 술 먹고는 기름통 들고 친정에 찾아가서 딸 찾아오지 않으면 불 질러서 다 죽여버린다고 난리를 쳐서 무서워서 들어왔다고도 했잖아요. 비명 소리 듣고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는데 출동한 경찰이 부부싸움에 개입할 수 없다면서 돌아갔다는 얘기, 아까 다들 안 들으셨어요?”

“그래도 변호사를 찾아가든지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방법을 찾으면 있었을 텐데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아줌마가 매일 죽도록 두들겨 맞으면서 어떻게 제정신을 차리죠?”

2번 배심원이 끼어들었다. “칼을 미리 준비한 건 어쩌고요. 남편이 문 여는 소리 듣고는 칼을 가져와서 숨겨놨다잖아요. 그게 어떻게 정당방위예요. 일 터진 김에 죽여버리려는 거지.”

“아, 그 전날도 늦게 들어왔다고 죽도록 맞았다잖아유. 남편이 낌새를 채고 있었던 거쥬. 남편이 쿵쾅거리며 문 걷어차고 들어오는 소리 듣는 순간 이제 죽었구나 싶지 않았것슈?” 순댓국집 주인이 흥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까 사진 안 봤슈? 그게 사람 꼴이유? 남편이 주먹질을 하다가 여자가 넘어지니까 등산화 발로 배를 몇 번이나 힘껏 걷어찼다잖아유. 남자는 팔십 몇 킬로고 여자는 사십 몇 킬로라는데, 생각 좀 해 봐유. 좀만 더 있었으면 어찌 됐것슈? 남편이 너무 세게 걷어차려다 헛차서 자빠졌다가 일어나는 사이에 칼을 꺼내 들었으니 망정이지….”

“다수결 투표 안 됩니다!”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40년 전, 자신의 배로 날아들던 군홧발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행동이 굼뜨고 자신감이 없던 노인은 고문관으로 불리며 툭하면 고참들에게 구타당했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심심풀이로 괴롭히는 고참들 사이에서도 유독 집요하게 괴롭히는 병장이 한 명 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자기를 싫어하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어서 더 두려웠지만 피할 방법이 없었다. 사소한 실수를 이유로 엎드려뻗쳐를 시킨 후 엉덩이를 각목으로 내리치던 병장은 노인이 못 견디고 바닥에 나뒹굴자 군홧발로 배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살려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었다. 광기 어린 병장의 얼굴을 보며 느꼈던 죽음의 공포는 평생 잊히지 않았다.

“…하긴, 그 아줌마, 옷 입은 채로 소변을 봤다면서요. 저도 그 심정 알아요. 중학교 때 왕따였거든요. 일진 애들한테 맞다가 너무 무서워서 소변을 지렸더니 더럽다고 웃으면서 발로 마구 짓밟는데, 정말 그땐 창피한 것도 모르겠고 살려만 주면 고맙겠더라고요.” 내내 시큰둥하게 앉아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9번 백수 청년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교감선생이 나섰다. “자자, 이러다 날 새겠소. 벌써 여덟 시가 다 되어 가요.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어차피 만장일치는 틀린 것 같으니 다수결로 합시다. 판사 의견 들어야 한다니 듣고 바로 표결하자구요. 그게 낫겠죠?” 토론에는 적극 참여하지 않았지만 교감선생이 뭐라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리던 60대 여성 배심원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배심원 대표인 2번 배심원은 메모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노인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안 됩니다! 더 합시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토론합시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 아니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힘 닿는 데까지 토론합시다. 그게 도리 아닙니까….”

<다음주에 계속>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그린다. 소설은 처음 써보는 거라 떨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열혈 정의파 초임 여성 판사가 주인공이다. 초보인 작가만큼이나 소설 속의 미숙한 그녀를 응원해주시길.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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