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omnme@naver.com
|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8) 마지막 재판 ④
(지난주 내용 요약: 불륜 들켜버린 아내가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을 죽여버린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서방 죽인 년이 무슨 할 말이 있냐’고 생각하는 1번 배심원 60대 노인은 변호인의 정당방위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보지만 어쩌나. 배심원 평의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예비배심원으로 밀려나는데…)
“유무죄에 대한 평결은 배심원 여러분의 만장일치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만장일치에 이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끝까지 의견 일치가 되지 아니할 때에는 다수결에 의한 평결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평결에 앞서 반드시 재판부의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평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잘 상의하셔서 배심원 대표를 뽑으시기 바랍니다. 번호가 가장 앞인 2번 배심원이 사회자가 되어 대표를 뽑으시는 방법을 권해 드립니다.”
한세상 부장과 두 판사가 먼저 퇴정하여 판사실로 향한 후, 참여관의 인솔하에 배심원들은 평의실로 향했다. 1번 배심원만 홀로 남겨졌다. 재판 내내 곧게 펴져 있던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그는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독거노인으로 되돌아갔다. 잠시나마 세상에 속해 있다는 벅찬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익숙한 고독만 텅 빈 법정에 함께했다. 실무관이 노인을 대기 장소로 안내했다.
가부장주의? 윤리도덕?
평의실, 배심원들은 종일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어야 했던 갑갑함에서 벗어나 기지개도 켜고 서로 힘들지 않았냐며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별도로 뽑기도 번거로우니 그냥 2번 배심원을 배심원 대표로 하자는 데 금세 좌중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2번 배심원은 싫다고 한사코 손사래를 쳤지만 도리가 없었다. 공판 내내 눈물을 닦던 30대 후반 여성이다. 대표로 추대되었지만 소극적으로 앉아만 있는 그녀를 대신하여 5번 배심원이 논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증인신문 때마다 적극적으로 질문사항 메모지를 재판부에 전달하던 대학원생이다.
“우리, 순서대로 먼저 살인의 고의가 인정되는지부터 토론해 봐요.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고의가 인정될까요?”
“에이, 그래도 그 아줌마가 계획적으루다가, 고의적으루 막 그런 건 아니잖아유. 난리통에 어쩌다보니 확 찌른 거지. 안 그류?” 순댓국집 주인이라는 50대 남성이다.
5번 배심원 대학원생이 웃으며 말했다. “에구, 아저씨, 재판 내내 검사가 설명하던 거 안 들으셨어요? 꼭 계획적으로 범행한 경우만 고의가 인정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이러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일을 저지른 경우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잖아요.”
순댓국집 주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류? 여학생은 어찌 그리 복잡한 내용을 잘 알아들었슈? 법대생이유? 그니깐 그 말인즉슨, 꼭 사람을 아주 고의적으루 죽인 경우가 아니래두 살인죄가 되기두 한단 말이쥬?”
“전 사회학 전공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고의적이라는 말은요….” 대학원생은 참을성 있게 다시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 때문인지 다른 배심원들은 미필적 고의 인정에 이의가 없었다. 대학원생은 미소를 지으며 다음 쟁점으로 넘어갔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정당방위의 인정 여부예요. 우리나라 사법부는 이런 사건에서 가정 내 약자인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억압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둔감해요. 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야….”
“이데올로기유? 이게 무슨 사상범 사건인가유?” 눈을 껌뻑거리는 순댓국집 주인의 질문에 대학원생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말씀이 아니구요, 우리 사회의 남성우월주의 프레임에 갇힌 채 이 사건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죄송한데, 논의를 좀 더 진행해도 될까요?” 그녀의 말투에 희미하게 섞인 짜증을 느꼈는지 순댓국집 주인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배심원들은 가타부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초조해진 대학원생의 말이 빨라졌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매맞는 아내 증후군’, ‘국제앰네스티 보고서’ 등의 용어가 반복되자 9번 백수 청년은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50대 남성이자 중학교 교감선생인 배심원이 대학원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먼저 윤리도덕의 문제를 생각합시다. 혼약을 깨뜨리고 불륜을 저지른 사람을 약자나 피해자로만 볼 수 있습니까? 남편은 피해자가 아닙니까? 법은 잘 모르지만 정당방위라고 하려면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어야지요. 사실 간통죄를 없애버린 것부터 잘못된 일이오. 가정을 파괴당한 사람의 분노를 법이 처벌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분노가 어디로 가겠소. 이런 비극이 생길 수밖에.”
“불륜과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는 별개 문제예요. 논리적으로 생각하셔야죠. 그리고 애초에 먼저 상습적으로 불륜행위를 하고 다닌 건 남편이에요. 노래방 도우미, 동네 과부, 초등학교 동창 등등 동네에 소문난 바람둥이였는데, 뻔뻔하게도 그걸 아내에게 감추려 들지도 않고 당당했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는 아까 못 들은 것 같은데?” 교감선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에 어떤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데 국선변호인이 그 부분을 제대로 못 짚길래 답답해서 제가 좀전에 다시 검색해 봤어요.”
한편, 판사실에서는 임바른 판사가 쉬는 시간에 인터넷 검색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차오름 판사 관련 기사와 반응들이다. 박 판사를 옹호하는 할머니의 1인시위가 화제다. 할머니는 기자들의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훔쳐가며 박 판사와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들 잃은 할머니를 헌신적으로 도운 초임 여판사의 미담 기사가 하나둘 늘어가는 사이에, ‘미스 함무라비 판사와 A대학의 악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있었다. 할머니 아들이 수술받은 대형 병원이 A대학병원이라는 점에 주목한 기사다. 물론 박 판사도 A대학이사장 아들의 준강간 사건 재판 때 이 이야기를 꺼낸 적 있긴 하지만, 워낙 큰 수술을 많이 하는 유명 병원이기도 하고, 서로 아무 연관도 없는 사건들이라 무심히 넘겼었다. 하지만 어떤 기자의 창의적인 펜은 마치 두 사건 사이에 대단한 인과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얼기설기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임 판사는 한숨을 쉬었다. 검색목록 맨 위에 ‘단독, A대학병원에서 만난 의외의 얼굴’이라는 제목이 뜨길래 클릭하려는데, 한 부장이 판사실 문을 열었다. “법정으로 갑시다. 배심원 대표가 할 말이 있다는군.”
증인신문 때마다 질문 메모지를재판부에 내던 대학원생 5번 배심원
평의실에서 논의 이끌다가 잘리고
그 자리에 1번 배심원이 들어왔다
다시 온 그 60대 노인은 어리둥절 재개된 평의, 논쟁은 뜨거웠다
“정당방위요? 온정주의는 안돼요”
“전날도 남편이 죽도록 때렸대요”
“아내가 미리 칼 준비했다잖아요”
“80㎏ 남편이 40㎏ 아내의 배를…”
|
|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