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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04 19:32 수정 : 2016.03.05 17:21

gomnme@naver.com

[토요판]
[연재소설] 문유석 판사의 미스 함무라비
(18) 마지막 재판 ⑤

(지난주 내용 요약: 불륜을 들켜버린 아내가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을 죽여버린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정당방위를 인정할지 여부를 놓고 배심원들 사이에선 논쟁이 뜨거웠는데, 결국….)

밤 10시 반, 배심원들의 토의는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임바른 판사는 다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아까 읽으려던 ‘단독, A대학병원에서 만난 의외의 얼굴’이라는 기사다. 박차오름 판사와 1인시위 할머니의 사연이 화제가 되자 H신문 기자가 할머니 아들이 수술받다 사망한 사고에 관해 알아보려고 A대학병원을 찾아간 모양이다. 할 말 없다는 병원 측의 완강한 태도에 성과 없이 돌아서던 기자는, 낯익은 얼굴이 특실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A대학 이사장 아들의 준강간 사건 항소심 공판을 취재했던 기자는 단번에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항소심에서 진술을 번복한 피해 여학생이다.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기자는 여학생을 뒤따라가 말을 걸어보았지만 그녀는 대꾸 없이 사라졌다. 병실로 돌아온 기자가 가까스로 알아낸 것은 최근에 여학생의 어머니가 이 병원에 입원했고, 병명은 뇌종양이라는 사실이다. A대학병원에는 대기 환자가 끝도 없이 밀려 있다는 국내 최고의 뇌수술 전문가인 C교수가 재직중이다. 기사는 여기까지였다. 임 판사는 흘깃 박차오름 판사를 쳐다보았지만, 뭐라 말하기에는 내용이 부족한 기사였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때 실무관이 손에 서류봉투를 든 채 나타났다. “판사님, 배심원 평결이 나왔습니다.”

부장님! 박차오름 판사의 비명

임 판사는 봉투를 받아들고 박 판사와 함께 얼른 부장판사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눈을 감고 뭔가 생각에 빠져 있던 한세상 부장은 천천히 눈을 뜨고 평결서 봉투를 받아들었다. 한 부장은 봉인된 평결서를 개봉하여 꺼내들고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재촉하듯 바라보는 임 판사와 박 판사는 아랑곳 않고 조각상처럼 굳어 있던 한 부장은 이윽고 나지막이 내뱉었다. “…무죄네. 만장일치로.”

임 판사와 박 판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재판 전에 이미 피고인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기세등등하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재판 도중에도 곱지 않은 눈초리로 피고인을 노려보던 배심원들이 눈에 띄지 않았는가. 토론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배심원들은 정당방위를 인정했군. 자네들 의견과 같이. 그리고 내 의견과는 달리.” 한 부장은 평결서를 내려놓고 두 판사를 쳐다보았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어. 배심원들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은 하지만, 최종 판단은 우리가 해야 하니까. 난 여전히 반대야. 검사도 지적했지만 우리 대법원은 정당방위를 매우 좁게 인정하고 있어. 이런 유형의 살인 사건에서 인정한 예가 없지. 우리가 무죄를 선고해도 상급심에서 파기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아. 그렇게 되면 잠시 석방되었던 피고인은 다시 구속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되겠지. 무죄로 한껏 자극된 비난 여론은 더더욱 가혹해질 것이고. 임 판사는 말 안 해도 잘 알지?”

“네, 부장님.” 임 판사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감안해서 관대한 형량의 유죄판결로 타협하는 것이 정도일까요? 법원은 법대로 판결하면 그뿐입니다. 형법이 정한 정당방위의 요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 그렇게 판결할밖에요. 부장님, 과거에 어쨌든 판례는 새롭게 바뀝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새로운 의견이 올라가야죠. 깨지더라도.”

임 판사를 응시하던 한 부장은 이번에는 박 판사에게 물었다. “무죄 판결이 과연 사회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남편을 죽인 불륜녀라며 대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어. 물론 법률가들의 합리주의로는 불륜과 위급상황의 정당방위는 서로 다른 문제라고 선언할 수 있지. 하지만 그걸 일반 국민들도 납득할 수 있을까? 출구 잃은 분노는 결국 사법부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오겠지.”

박 판사는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 것이 사람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정의에 대한 생각이겠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부장님, 저 이래 봬도 ‘미스 함무라비’라고 불리고 있잖아요.”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런데요, 생각해 보면 함무라비 시대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 지금과는 다른 의미였을 것 같아요. 평민이나 노예가 귀족이나 힘있는 사람의 털끝 하나만 실수로 건드려도 목이 날아갈 수 있던 때 아닐까요. 그런 시대에 피해와 동일한 만큼의 처벌만 허용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복수를 엄청나게 제한한 것이겠죠. 문명이란, 그리고 법이란 결국 자연 상태의 본능을 절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지 그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건 아닐 거예요.”

두 젊은 판사의 눈을 바라보던 한 부장은 눈이 부신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역시 그렇군. 내가 잘 결심한 것 같구만.”

한 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두 판사에게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얘기하지. 이 책상 서랍 안에 있던 내가 예전에 쓴 사직서, 기억들 하지? 한 달 전에 제출했네. 이번에는 반려당하지 않았어. 오늘이 내 마지막 재판이야.”

“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박 판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임 판사도 놀라 입을 열었다. “부장님, 왜 그런 결정을…. 준강간 사건 때문이라면 아직 재판이 다 끝난 게 아니고 최근 이상한 점도 발견되었다고….” 한 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여러모로 부족한 인간이 너무 오래 이 자리에 버티고 있었구나 싶어서일 뿐이야. 아니, 그 이전에 너무 지쳤어. 진작에 그만뒀어야 하는데.”

미소 짓는 한 부장의 홀가분한 표정을 보며 임 판사는 문득 막말 사건 당시 법정에서 박 판사에게 고함을 지르던 한 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사건 후로 준강간 사건 무죄로 인한 비난 여론의 초점은 박 판사에서 한 부장으로 서서히 옮겨갔었다. 모든 책임은 독불장군인 막말 부장판사에게 있지 새파란 초임 여판사에게 있을 리 없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부장님은 그때 이미?’ 임 판사가 멍하니 있는 사이 박 판사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한 부장의 팔을 붙잡았다. “부장님, 왜 그러셨어요. 안 돼요. 저희는 어쩌라고요.” 한 부장은 씩 웃었다. “뭘 어째. 재판 열심히들 해야지. 그리고 내가 변호사 되어 법정에 나타나면 전관예우나 좀 해줘.” 박 판사는 울다 말고 능청스러운 한 부장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살짝 그를 노려보았다. “부장님!” “자, 됐고, 얼른 눈물 닦아. 판결 선고하러 내려가야지.”

“배심원들은 정당방위 인정했군
자네들 의견과 같이
그리고 내 의견과는 달리”
한 부장은 평결서를 내려놓고
두 판사를 쳐다보았다

피해자 어머니는 대성통곡하고
피고인은 소리죽여 흐느꼈다
어떤 이들은 기쁜 표정으로
어떤 이들은 성난 표정으로
옆 사람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너 쟤 남자친구라도 되냐?”

법정은 눈물바다였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고, 피고인은 고개를 떨군 채 소리를 죽여 흐느꼈다. 눈물 많은 2번 배심원도 어느새 따라 울고 있었다. 순댓국집 주인의 눈에도 백수 청년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방청석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한 부장의 입에서 “피고인은 무죄”라는 한마디가 떨어진 후부터 어떤 이들은 기쁜 표정으로, 어떤 이들은 성난 표정으로 옆 사람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밑으론 몰래 박 판사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보내는 방청객이 있었다. 옆방 정 판사였다. 힘들어하는 박 판사가 마음에 걸리는지 야근할 때마다 방으로 놀러 오더니, 오늘은 재판이 늦어지자 법정으로 찾아온 모양이다. 임 판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점점 커져가는 피해자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자정을 향해 가는 심야의 법정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지친 배심원들은 방청석 쪽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1번 배심원 노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판결 선고를 모두 마친 한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법정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법정 출입문 쪽을 향해 몸을 돌리던 한 부장은 잠시 멈칫하더니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임 판사와 박 판사도 놀라서 따라 몸을 돌렸다. 한 부장은 배심원석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두 판사도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배심원들도 당황하여 허둥지둥 맞절하듯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1번 배심원 노인의 눈에 눈물이 천천히 맺히기 시작했다.

도서관 창밖 나무의 잎사귀마다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봄을 재촉하는 비다. 나무마다 한껏 뿌리로 물을 빨아들여 가지 끝으로 보내며 푸른 봄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독도서관 뜨락에는 회화나무, 은행나무, 벚나무가 가득했다.

하지만 창 안쪽 열람실은 소란스러웠다. 한 안경잡이 소년이 추리닝 차림에 떡진 머리의 고시생과 말싸움을 벌이고 있고, 소년 옆에는 긴 머리에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은 소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다.

“어린놈이 어른한테 예의도 없이 따박따박 말대꾸야! 도서관 자리를 너네들이 전세 냈냐? 이게 왜 쟤 자리야!” “그 자리는 얘가 방학 내내 도서관 문 열기 전부터 와서 기다려서 앉는 자리예요. 독서교실 때문에. 아저씨가 치워버린 책 밑에 독서노트 보이죠? ‘○○여중 1학년 1반 박차오름’이라고 쓰여 있는 것 안 보이세요?” 책상 위에는 낡은 법서와 문제집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고, 구석에는 소설 <앵무새 죽이기>와 노트, 그리고 분홍색 필통이 밀쳐진 채 있었다.

“일찍 와서 앉는다고 자리 소유권이 발생하냐? 도서관은 공공시설이야. 자리만 맡아 두고는 종일 바깥에서 수다 떨고 노닥거리라고 세금으로 도서관을 지은 줄 아니?” “종일이라뇨! 점심시간이라 잠깐 내려가서 도시락 먹고 왔는데요. 30분도 안 걸렸을 거예요.” “뭔 소리야! 내가 여기 앉은 지 한 시간이 훨씬 넘게 지났는데.” “그, 그건, 쟤가 워낙 수줍어하는 성격이라 말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느라….” “자기 자리면 바로 얘기를 했어야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야. 너네 같은 꼬마들이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민법에는 취득시효라는 것이 있어. 남의 땅이라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평화롭게 20년간 점유하고 있으면 땅 주인이 되는 거야. 자기 땅을 방치하고 나 몰라라 했던 원주인은 땅을 뺏기는 거고. 알겠냐?” “그런 날강도 같은 법이 어딨어요!” “민법에 있다고 방금 말했잖아. 근데 저 여자애는 가만있는데 왜 네가 계속 난리야? 너 쟤 남자친구라도 되냐?”

소년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얼굴이 빨개진 임바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제 경찰서에 찾아갔을 때에도 이 질문에 말문이 막혔었다. “네가 뭔데 남의 일에 난리냐?” 피아노 선생이 자꾸 몸을 이상하게 만진다는 박차오름의 얘기를 들은 후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 없었던 임바른은 며칠 동안 도서관에 있는 형법 책들을 뒤졌다. 온통 한자어투성이라 어려웠지만 사전을 뒤져가며 관련 있을 법한 항목을 읽고는, ‘누구나 쉽게 쓰는 법률서식집’이라는 책을 보며 고발장을 썼다. 경찰관은 강제추행죄 고발장을 들고 경찰서 민원실을 찾은 중학생을 진지하게 상대해 주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쫓아내고는 동료들과 키득거리는 그 앞에서 소년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래 놓고는 오늘 또….

움찔하던 그 고시생 이름은…

소년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박차오름은 <앵무새 죽이기>의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를 떠올렸다. 아무도 편들어주지 않는 흑인 피고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변호하는 모습. 부끄러웠다.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스카우트처럼 어린 여자애도 아빠를 지키기 위해 군중 앞에 당당히 서는데, 나는 언제나 뒤로만 숨는다. 백점짜리 시험지를 아무리 많이 받아가도 아빠는 여자애가 공부 잘해봐야 쓸데없으니 음대 가서 시집이나 잘 가는 게 낫다고 했고 난 군소리 없이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피아노 선생님이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해도 혹시 아빠가 화를 낼까봐 무서워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아무 잘못 없이 맞는 엄마를 보면서도 난….

“아저씨! 거긴 제 자리예요. 다른 자리로 가세요!” 갑자기 소녀가 소리를 지르자 고시생은 움찔했다. 소년도 놀라 소녀를 쳐다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입을 열려던 고시생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투덜거리며 짐을 싸서 화장실 앞 빈자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젠장, 애들이랑 싸우면 내가 손해지.’ 소녀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쿵 뛰었다. 몸이 떨렸지만, 분명히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짐짓 아무 일 없었던 양 민법 문제집을 펼쳐드는 고시생의 눈에 공교롭게도 ‘등기부 취득시효’라는 제목이 들어왔다. ‘흠, 그러고 보니 한동안 2차 시험에 시효 관련 문제가 나오지 않았지? 혹시 모르니 꼼꼼히 봐둬야겠군. 애고, 이번에 또 떨어지면 도리 없이 취직해야 할 텐데.’ 문제집 옆면에는 날려 쓴 글씨로 ‘한세상’이라는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끝>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저자. 원래 ‘우리 이웃의 분쟁’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관해 쓰려다가 사생활 보호 문제 때문에 픽션으로 방향을 틀어, 인간사 갖가지 분쟁과 이를 법정에서 중재하고 판결하는 판사들 내부의 풍경을 소설로 그렸다. 열혈 정의파 초임 판사 ‘미스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신조로 삼는 주인공 박차오름 판사의 다른 이름이었다. 격주 또는 매주 해온 연재를 26회로 마친다.

그동안 ‘미스 함무라비’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주에는 ‘소설 쓰는 법관’ 문유석 판사 인터뷰가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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