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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21 18:56 수정 : 2015.10.23 15:09

다큐멘터리 영화 <디올 앤 아이>의 주인공은 아틀리에의 장인들이 아니라 여전히 젊은 패션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다. 장인들은 젊은 디자이너를 인정하는 진정한 경륜을 보여주었고 라프 시몬스는 자신의 비전을 컬렉션으로 완성했다. 영화사 진진 제공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디올 앤 아이’

패션 세계에는 오트 쿠튀르, 줄여서 ‘쿠튀르’라는 게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도 절대 입을 수 없는 옷이다. 한국말로 하자면 ‘맞춤복’인데, 당신 어머니가 동네 양장점에서 맞춘 옷까지 쿠튀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건 샤넬, 디오르 등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서 깊은 브랜드에서 극소수의 고객만을 대상으로 만드는 최고급 맞춤복을 의미한다. 드레스 한벌에 몇천만원을 쓸 수 있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라는 이야기다. 고객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쿠튀르를 만들 수 있는 디자이너 역시 극소수다.

다큐멘터리 <디올 앤 아이>는 쿠튀르의 세계에 뛰어든 젊은 디자이너의 고군분투를 다룬 영화다. 벨기에 출신의 남성복 디자이너인 라프 시몬스는 어느 날 갑자기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다. 15년간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가 2011년 유대인을 모욕하는 말을 했다가 타블로이드 신문에 발각되면서 해고됐고, 라프 시몬스는 그의 후임으로 디오르의 간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라프 시몬스는 쿠튀르를 만들어 본 경력이 없다. 미니멀리스트로 유명한 그의 재능이 우아하고 화려한 브랜드 ‘디오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패션계의 의구심도 쏟아진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남은 시간은 딱 8주뿐이다. 그러니 이 짧은 다큐멘터리는 종종 손톱을 물어뜯게 만드는 서스펜스로 넘쳐난다.

이를테면 나는 라프 시몬스가 ‘디오르’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는 장인들을 만나는 순간 긴장감으로 잠깐 숨이 멈췄다. ‘디오르’ 같은 유서 깊은 브랜드의 아틀리에에는 거의 반평생을 쿠튀르를 수작업으로 만들어온 노년의 장인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어떤 장인은 이전 ‘디오르’를 거쳐간 패션의 천재들, 이브 생 로랑, 잔프랑코 페레와 존 갈리아노를 모두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디오르’가 어떤 철학을 가진 브랜드인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비전이 있다. 과연 그들이 어리고 수줍은데다가 여성복을 제대로 만들어 본 경험도 부족한 벨기에 출신의 디자이너를 상사로 거느리고 일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까지만 들으면 당신은 <디올 앤 아이>라는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라프 시몬스가 아니라 아틀리에의 장인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매체는 이 영화가 ‘라프 시몬스의 작업을 영웅적으로 그려나가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진짜 주인공은 시몬스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추상적 스케치를 옷으로 현실화하는 아틀리에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했다. 아니다. 나는 거기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 어떤 업계에도 장인은 존재한다. 묵묵히 뒤에서 제 할 일을 다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더 존경받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디올 앤 아이>의 주인공은 여전히 라프 시몬스다.

내가 <디올 앤 아이>를 보며 정말 감동받은 건 자기 할 일을 해내는 장인들의 숨겨진 모습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숫기 없지만 고집 세고 의기양양하고 가끔은 지나친 요구까지 해대는 젊은 디자이너를 최대한 존중하고 따라가고 맞춰주려 애쓰는 장인들의 태도야말로 나에게는 진정으로 감동적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프린트를 만들어내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이 든 아틀리에 장인의 태도로부터 나는 진정한 경륜의 품위를 읽었다. 왜냐고? 나는 그런 모습을 한국의 기업이나 학교나 사회에서 그다지 본 적이 없으니까. 다들 알다시피 한국에서 나이와 경력은 언제나 능력을 넘어서는 평가기준이 된다.

패션계에서 일하는 누군가는 <디올 앤 아이>를 보고 페이스북에 만약 이게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라프 시몬스는 ‘젊은 게 뭘 알아’라는 업계 어르신들의 불평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신의 비전을 펴지도 못하고 중간에 물러나야만 했을 거라고 썼다. 일리 있는 소리다. 라프 시몬스는 직접 바느질을 하지도 않는다. 패턴을 만들지도 못한다. 라프 시몬스는 심지어 스케치를 직접 하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진 디자이너다. 그가 잘하는 건 하나의 거대한 비전을 세우고, 장인들을 지휘하고, 자신의 비전을 결국 진짜 컬렉션으로 만들어내는 솜씨다. 그는 리더고 지휘자다. 천재적인 비전을 가진 지휘자에게 필요한 건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주기 위해 애쓰는, 보이지 않는 숙련공들의 존재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컬렉션이 끝나자 라프 시몬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이 첫 디오르 쿠튀르 컬렉션은 전세계 수백개의 매체와 인터넷으로 퍼져나갔다. 그 사진과 기사에 장인들의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악평이든 호평이든 라프 시몬스의 천재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의 고뇌와, 그의 비전과, 그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나는 장인들이 슬퍼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젊은 라프 시몬스의 지휘 아래 자신들이 묵묵히 수작업으로 만든 드레스와 재킷이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를 런웨이에서 펼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했을 것이다. 라프 시몬스가 오래된 디오르의 이름에 젊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것을 보며 진심으로 감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젊은 놈에게 마음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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