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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진짜 시대정신은 해일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조개를 줍는 사람들의 것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다양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두 이슈를 영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상업적 이벤트에 녹였다.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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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크리스마스이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돌아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재관람을 위해 열심히 영화 예매 앱을 뒤지다가 소셜미디어를 켰다. 그놈의 소셜미디어는 절대 잠을 자기 전에 켜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그건 당신의 수면을 제국군에 침공당한 저항군의 요새처럼 뒤흔들어 놓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간 나는 소셜미디어에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2015년의 시대정신을 망각했다는 요지의 글을 하나 봤고, 이건 어쩌면 거기에 대한 간단한 대답이 될 것이다.
사실 미국이라는 국가의 현대적 신화가 되어버린 <스타워즈>시리즈에 대해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정치적, 정신분석학적 평론이 이어졌다. 야밤에 본 글에서는 1977년 작 <스타워즈>가 베트남전 패배의 후유증을 묘사한 영화로, 초라한 저항군의 모습은 베트남전 패배 악몽에 시달리는 미국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카터의 퇴진과 레이건의 출현을 예언하는 영화라는 비평은 80~90년대 영화평론가 지망생들의 필수서적 중 하나였던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의 작가 로빈 우드 이후 끊임없이 반복됐으니까. 또한 <스타워즈>는 (그들에 따르면) 파시즘과 폭력에 대한 정당화이거나 성차별과 인종차별로 가득한 영웅주의 할리우드 신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나는 그 많은 비평들이 일리가 있건 없건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써는 지나치게 심각하게 들리긴 하지만, 영화로부터 예술가와 대중의 정치적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제이 제이 에이브럼스의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 2015년의 시대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단지 여성인 레이가 제다이가 되고, 흑인이 조력자로 나선다는 점에서 오리지널보다 진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그렇지 않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 에이브럼스가 여성과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약간의 진보가 아니라 거대한 21세기적 진보다. 그것은 2015년 한해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든 ‘다양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두 이슈를 영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상업적 이벤트에 탑재해버렸다는 점에서 더욱 상징적이다.
나는 주인공인 핀이 처음으로 스톰트루퍼 헬멧을 벗을 때, 이미 흑인 배우 존 보예가가 그 역할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잠깐 숨을 멈췄다. 내 머릿속에서 하얀 스톰트루퍼 속에 있는 기본 인종이 언제나 백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여자주인공 레이가 처음으로 손에 라이트세이버를 쥘 때, 그리고 포스를 깨달을 때, 또다시 숨을 죽였다. 내 머릿속 제다이의 기본 성별이 언제나 남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그저 주인공 캐릭터들을 흑인과 여성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전세계 수억명의 관객들이 오랫동안 갖고 있는 인종적, 성적 편견을 깨어나게 만드는 놀라운 서커스를 부렸고, 그 효과는 생각보다 더 강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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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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