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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15 20:30 수정 : 2016.01.16 09:51

영화 <빅 쇼트>는 월스트리트 자본주의 고발이라기보다는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의 얼굴에 침을 뱉는 신나는 조롱극에 가깝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빅 쇼트

뉴욕에 갔다. 마지막 날이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부모님과 친구 선물을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지갑에 들어 있는 달러를 모두 꺼냈다. 그리고 소호 거리에 있는 한 화장품 가게로 들어갔다. 핸드크림과 립밤을 이것저것 골라 계산대에 올렸는데 여전히 십몇 달러가 수중에 남았다. 점원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더 고를게. 이 돈은 다 써야 하거든.” 점원이 다른 점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세상에, 리세션(경기 침체) 이후 누가 ‘이 돈 다 써야 해’라고 말하는 거 처음 들어봐.” 2009년이었다. 2007년 시작돼 미국 경제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겨우 마무리된 해였다.

영화 <빅 쇼트>는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거액을 챙긴 월스트리트의 실존 인물들을 다룬 영화다. 그들은 가치가 추락하는 쪽에 집중 투자하는 ‘빅 쇼트’(Big Short)를 통해 어마어마한 거액을 챙긴 것으로 당시에도 엄청난 화제가 됐다. 그들이 투자한 것? 미국 부동산시장의 몰락이다. 간단히 당시 상황을 설명해보자. 2000년대 초반 미국은 은행 금리를 엄청나게 낮췄다. 그러자 모두가 대출로 집을 샀다. 신용도가 형편없는 사람들도 집을 샀다. 은행이 서브프라임(최하 신용등급)인 사람들에게도 대출을 뿌려댔기 때문이다. 2004년 은행 금리는 오르기 시작했다. 이자를 부담할 수 없었던 서브프라임 등급의 대출자들은 파산을 연이어 신청했다. 그러자 대출을 해준 금융사들도 파산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증권화해서 거래한 금융회사들도 이어서 파산했다. 미국이 파산했다.

<빅 쇼트>는 이율배반적인 할리우드 영화다. 정치적으로 따지자면 할리우드는 대체로 좌파다. 월스트리트의 추악한 욕망과 비뚤어진 시스템을 까는 데 쾌감을 느끼는 속성이 있다. 그러니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월스트리트> 이후 그토록 많은 영화들이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을 악당으로 묘사한 뒤 처절하게 몰락시키면서 비웃었던 것이다. 동시에 할리우드는 자본의 세계다. 영화산업은 월스트리트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월스트리트의 투자 없이 할리우드는 굴러갈 수 없다. 아주 경박하고 손쉬운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할리우드는 ‘강남 좌파’ 혹은 프랑스식으로 ‘샴페인 좌파’다. 할리우드의 그런 내적 충돌이 큰 대수는 아니다. 우리 모두 모른 척하지만 다 아는 사실처럼, 부유하고 리버럴한 좌파 없이 세상은, 특히 좌파는 돌아가지 않으니까.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끝나자 수많은 은행가들이 구속됐고 미국 정부는 거대한 은행을 갈가리 찢어서 월스트리트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을 거라고? 오산이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구속된 건 단 한 명이었다. 미국 정부는 쓰러진 은행들에 수조달러의 돈을 들이부어 회생시켰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그들을 되살렸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도 함께 분노했냐고? 아니, 비웃었다. 가만 생각해보라. 이게 다 월스트리트의 피도 눈물도 없는 돼지들이 벌인 자본주의의 추악한 서커스라고 분노하는 건 정말 단편적인 일이 될 것이다. 어차피 월스트리트는 돈을 벌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 상품을 만들었다가 무너졌고, 일종의 영웅으로 그려지는 주인공들 역시 그 허점을 이용해서 수억달러를 번 자본가들이다. 월스트리트의 부루마불 게임에 걸려든 불쌍한 서민들? 그 서민이라는 작자들은 이자가 조금 낮아졌다고 앞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쓸모도 없이 거대한 집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며 스스로 막대한 가계부채를 짊어진, 역시 서브프라임 사태의 죄인 중 하나다. 그러니 나에게 <빅 쇼트>는 월스트리트 자본주의 고발이라기보다는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의 얼굴에 침을 뱉는 신나는 조롱극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그렇다면 당시 한국은? 서브프라임 사태로부터 한국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이후 부동산 시장이 침체를 겪기는 했지만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부의 정책은 꽤 효과가 있었다고 상찬해야 마땅하다. 앞으로의 한국은? 지난 10년간 부동산 몰락을 외쳐온 경제학자들의 말이 맞을까? <빅 쇼트>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신용등급이 형편없는 사람에게도 집값의 90%가 넘는 돈을 대출해주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없는 한국에서는 쉽게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도, 갑자기 놀랄 만큼 마음이 불안해져서 평소 열어보지도 않던 부동산 관련 앱들을 다운받았다. 그렇다. 나는 작년에 생애 처음으로 아파트를 구입했다. 여의도의 한 천재적인 트레이더가 한국 부동산 몰락에 ‘빅 쇼트’를 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에게 제발 좀 알려달라. 이 기사를 읽는 누구든지 알려달라. 사례하겠다.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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