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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이 딸 박근혜와 함께 1978년 12월27일 장충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몰아붙이는 걸까.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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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홍구의 역사
대통령 아버지의 명예
아이들 동요에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하는 노래가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정말 원 없이 나와 봤다. <티브이조선> 등 종편에서는 15분도 넘는 특집 프로를 여러 번 만들어 보냈으니 이걸 광고비로 환산하면 아마 수십억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현실은 꼭 동요 같지 않아서 정말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를 새로운 애창곡으로 삼아 매일매일을 신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던 일(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계속하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 비단 역사 교과서 국정화뿐만 아니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때문에라도 더 꿋꿋하게 하던 이야기, 그리고 하려던 이야기 계속해 나가야 한다.
박정희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다
‘수구언론’들이 1년여 전의 강연에서 문제 삼은 곳은 두 부분이었다. 하나는 저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이승만을 속옷바람으로 도망친 세월호 선장 이준석과 비교한 것이고, 또 하나는 여순반란사건 직후 숙군 과정에서 남로당 프락치로 검거된 박정희를 그때 김창룡이 살려주지 않고 죽여버렸더라면 대통령 두 자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은 ‘김창룡이 죽였으면 어떻게 됐을까’란 가정을 수구언론이 ‘김창룡이 죽였어야 했다’로 보도한 대목이다. 저들은 인터넷에 떠 있는 동영상을 확인도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보도해버렸다. 이후 수많은 언론이 따라쟁이가 되어 똑같은 왜곡을 일삼았는데, 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기자 몇이 확인전화 한 것 외에 수구언론에서 단 한명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것에 정말 놀랐다.
한국 현대사가 워낙 파란만장하다 보니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 대역죄나 내란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거나 구형받은 사람이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세명이다. 김대중과 관련해서는 수구사이트에 “전땅크(전두환)가 다 잘했는데 딱 하나 잘못한 것이 김대중을 죽이지 않은 것”이라는 식의 언급이 넘쳐난다. 과연 고종이 이승만을, 전두환이 김대중을 그때 죽였더라면 한국 현대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도 이런 난리가 났을까? 김창룡이 박정희를 죽여버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물음은 조갑제가 <월간조선> 1989년 12월호에서도 꺼낸 바 있는 이야기인데, 이번에 내가 다시 꺼냈더니 난리가 났다. 1989년에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때이지만, 지금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최고 존엄’을 건드리는 불경죄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교과서 국정화에 이어 ‘최고 존엄’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으니 정말 북을 추종하는 종북세력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티브이조선> 등 수구언론 덕분에 박정희가 빨갱이짓 하다가 죽을 뻔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현대사 대중화에서 뜻밖의 성과였다. ‘빨갱이 감별사’ 고영주까지 나서서 박정희가 나중에 전향했지만 공산주의자였다고 친절하게 확인해주기도 했다. 매스컴의 힘이 정말 크다는 것을 실감한 계기는 지난번 대통령 선거였다. 박정희가 친일파였고, 그의 일본 이름이 다카기 마사오였다는 사실을 지난 십수년간 몇몇 연구가들이 목이 터져라 외쳐왔어도 일부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대통령 선거 토론회를 통해 하루아침에 전 국민에게 다 알려졌다. 박정희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한겨레21>에 정리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넘게 지났다.(“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431호, 2002년 10월23일치, “2005년의 박정희, 박정희의 2005년” 546호, 2005년 2월25일치) 대학에서 강의하다 보면 노무현 정권 때 초등학생으로 세상사를 처음 기억하기 시작한 지금 신입생들에게 박정희는 내 어릴 적 고종 황제나 조선 총독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존재라는 점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역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꼭 새로운 해석을 요구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게는 그들의 기억과 그들의 요구에 맞는 새로 포장한 옛날이야기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과 죽다 살아난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놓은 글들이 여기저기 많으므로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의 사랑을 담뿍 받고 보니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비판을 제일 많이 했다고 자부하던 내가 박정희와 동병상련의 슬픔과 분노를 함께하게 된다. 빨갱이로 몰려본 사람은 다 공감하겠지만, 빨갱이로 몰려본 적이 없는 따님은 모르는 아버지 이야기를 지금 해볼까 한다.
‘김창룡이 박정희 죽였으면’ 가정‘김창룡이 죽였어야’로 왜곡보도
고종이 이승만, 전두환이 김대중
죽였더라면 현대사가 어땠을까
질문 던져도 이런 난리가 났을까 윤보선이 사상논쟁으로 몰고 가며
박정희가 궁지에 몰린 1963년 대선
좌익세력 많은 곳서만 무서울 만큼
박정희가 우세 얻은 역설적 결과
‘전라도 표로 대통령 됐다’는 말까지 거세된 환관, 새로운 기회 박정희의 육사 동기로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과장을 지낸 김안일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숙군수사를 주도하면서 박정희를 직접 조사했고, 박정희를 살려주는 데에서도 김창룡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이다. 김창룡과 그는 수사관들이 공산주의 혐의자를 잡으러 갈 때 박정희를 앞세우고 가면 박정희가 동료를 팔아먹었다는 것이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소문이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박정희는 다시는 공산주의자들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논리로 상급자들을 설득했다. 김안일은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는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주어도 안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군사법정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내란사범이자 헌법파괴자였다. 여순반란사건 관련자들이 수십명씩 무더기로 총살당하던 시절이니, 남로당이 대한민국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로 지목받은 박정희 급이었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선엽이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박정희는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구명된 유일한 케이스”였다. 사실 무기징역 형량 자체가 이미 살려주기로 한 방침이 정해지고 난 뒤에 나온 판결이었다. 군법회의의 판결은 ‘관할관(고등군법회의의 경우 육군참모총장) 확인’ 과정에서 형을 감경하거나 집행을 면제해줄 수 있었다. 단심제인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 몰수” 형을 받은 박정희는 심사장관과 관할관의 확인 과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다시 그 형의 집행을 면제받았다.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거세된 환관’ 신세였던 박정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민간인 문관으로 있던 박정희가 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복직된 것이다. 운명은 참 묘한 것이어서 뒤에 진짜로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도 징계를 받고 군을 떠났다가 복직된 바 있다. 김재규는 부대에서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 부하들을 연행하려는 미군 헌병에게 일본도를 빼들고 저지하다가 건군 이후 최초로 ‘명예 면관’되었다. 일부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박정희의 복직은 ‘좌익 악령’을 공식적으로 떨쳐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4월 혁명 뒤 군을 쇄신할 적임자로 참모총장 물망에 오르자 얘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육군참모차장 김형일은 과거 박정희를 살려주는 데 일조했지만, 이제 참모총장 자리를 놓고 경쟁자가 되었다. 김형일은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가 박정희의 인물됨에 대해 물었을 때 ‘레프트’, 즉 박정희가 좌익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했다. 김종필에 따르면 매그루더는 한국 정부에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 때문에 참모총장으로 발탁되기는커녕 한직인 2군 부사령관으로 밀려났다. 최근 <중앙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하고 있는 김종필은 5·16 군사반란 당시 혁명공약의 제1조에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는 말을 집어넣은 이유가 바로 박정희의 좌익전력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회고록에서 김종필은 박정희의 좌익전력은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지만 자신의 좌익전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김종필의 비서실장을 지낸 바 있는 극우논객 이동복은 지난 8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5·16 직후 김종필은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어느 외신기자의 질문에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로 나갑니다”라고 “내 귀를 믿을 수 없는 얘길 하더라”고 말했다. 미국도, 군사반란의 동지들도 김종필의 이런 성향을 의심했다. 박정희야 좌익 시절의 동지를 팔아먹었다는 것을 그 바닥에서는 다 알고 있어 다시 좌익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지만,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력에 관한 테제’라는 유명한 문건을 보면 김종필은 ‘슬리퍼’(sleeper), 즉 잠복해 있는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김종필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꽤 오랜 기간 ‘자의 반 타의 반’ 외국을 떠돌아야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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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대통령 선거는 가장 치열하다 못해 극도로 험악한 양상을 보였다. 그해 10월, 서울의 거리에서 시민들이 벽에 붙은 대선 포스터를 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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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3년 10월9일치 호외. 박정희의 사상을 문제삼는 윤보선의 발언과 이에 대한 박정희의 반박을 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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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과거의 사상 전력을 공격당하며 궁지에 몰렸던 1963년 대선 당시의 후보 신문광고.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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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만 있는 사실 말했을 뿐이다
윤보선이 한 게 사상 ‘논쟁’이라면
박정희는 고문조작을 통해
빨갱이 ‘사냥’을 벌였던 것이다 현 정부는 박정희 명예회복 위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몰아붙이며
이념대결·역사논쟁 불러일으키나
반세기 전 사상논쟁이 갖는 의미를
그분의 따님은 곱씹어보아야 한다 술래가 바뀐 뒤 사상논쟁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평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인텔리가 많은 도시에서 사상논쟁이 역효과를 낼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지만 서울에서는 윤보선이 압승을 거두었다. 군인 표가 많은 강원도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에게 뒤진 것은 역시 사상 문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호남은 “보수의 대표세력이던 한민당의 아성이 하루아침에 변모”하여 박정희가 큰 표 차로 앞섰다는 점에서 “가장 경악스러운 지역”으로 꼽혔다. 흥미있는 사실은 뒤에 박정희를 제일 많이 괴롭힌 김대중도, 김형욱도 모두 박정희가 사상논쟁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 점이다. 윤보선은 한민당 출신이었는데, 한민당은 해방 정국에서 우파 내부에서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경쟁세력을 종종 공산주의자로 몰곤 했다. 김대중은 ‘윤보선이 박정희를 공산당이라고 비난한 것은 과거 한민당이 김구 선생 등을 빨갱이로 몬 공포정치를 연상케 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던 호남은 부역자 처벌과 연좌제의 고통을 혹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빨갱이 소동을 일으킨 윤보선보다는 빨갱이로 몰린 박정희에게 동정표가 쏠린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윤보선을 겨우 15만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는데, 아무 연고 없는 한민당의 아성이었던 호남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35만표 차이로 따돌렸으니 박정희가 “전라도 표로 대통령이 된 셈”이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표가 많이 나온 곳, 즉 “좌익세력이 많은 곳에서만 무서울 만큼 박정희 후보의 우세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중앙정보부는 “박정희가 당선된다면 좌익 표의 지지 때문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박정희는 한때 자신을 빨갱이로 몬 사람들을 법에 의해 가차 없이 처단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선거가 끝난 뒤 사상논쟁 자체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승자 박정희는 패자 윤보선에게 ‘협조와 편달’과 ‘무궁한 발전’을 비는 전보를 보냈고, 윤보선은 당선을 축하하는 전보와 꽃다발을 보냈다. 정치평론가 이상우가 “아름다운 전문 교환”이라 부른 이 일과 함께 사상논쟁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술래잡기에서 박정희가 도망다니는 게임이 끝났을 뿐이다. 이제 감히 박정희의 사상 전력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박정희는 표변했다. 집권 초기나 대통령 선거 기간 박정희의 언설은 마치 김일성이 주체 문제를 처음 제기하던 무렵의 발언을 연상케 할 만큼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었다. 그러나 실제 박정희가 걸어간 길은 그와는 달랐다.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수교와 베트남 파병을 추진했다. 그리고 엄청난 반공정책으로 자신을 뽑아준 지지세력을 배신했다. 이라크 파병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용으로 노무현이 많은 지지자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 이상으로. 박정희는 그냥 정치적 입장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와 그의 중앙정보부는 야당이 자신에게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사상 문제를 따지고 들었다. 사실 과거의 전력을 따지자면 박정희와 김종필만이 아니었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 공화당 의장 백남억, 내무장관 엄민영, 공보부 장관 이원우, 감사원장 이주일, 공군참모총장 박원석,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 등 좌익 전력을 가진 사람들은 초기 박정희 정권에 차고 넘쳤다. 처음에는 중앙정보부의 단속 대상이 권력 주변의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나 경향신문사 사장 이준구, 또는 공화당 국회의원 김규남 같은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더니, 이제 반정부 인사와 청년학생들을 넘어 막걸리반공법 시대를 열어 일반 서민까지 겁을 주었다. 박정희의 과거에 대한 윤보선의 폭로가 굴곡진 현대사에서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다만 윤보선은 있는 사실을 있다고 한 것이지, 결코 자료를 조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이나 수없이 많은 조작간첩 사건에서 보듯이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고문과 조작으로 없는 일을 만들어냈다. 윤보선이 행한 것이 사상 ‘논쟁’이라면 박정희는 고문조작을 통해 빨갱이 ‘사냥’을 벌인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위험한 트라우마 사상적으로 박정희가 투철한 좌익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군 내의 남로당 책임자라는 그의 조직적 위치는 가벼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숙군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기밀을 넘겨주는 대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런 경력을 가진 사람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자리에 올랐다. 술래가 바뀐 뒤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와 사상논쟁의 트라우마는 있는 빨갱이 없는 빨갱이에 대한 병적인 공격증으로 나타났다. 건전한 이념논쟁은 차단되었고, 박정희가 친일에서 좌익으로, 좌익에서 또 우익으로 숨가쁜 변신을 하는 사이, 일제하의 민족주의에서 해방 뒤의 우익으로 자연스러운 변신을 한 장준하, 함석헌, 김재준, 문익환, 박형규, 계훈제 같은 이들이 재야세력이 되어 진보가 탄생하는 우산 노릇을 해주었다. 이제 그 박정희가 죽고도 일제 36년만큼 시간이 지난 오늘, 박정희의 따님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박근혜는 결이 다르지만 아버지 못지않은, 아니 훨씬 더 심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부모가 따로따로 총에 맞아 희생된 집은 그 댁밖에 없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제대로 치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최고권력자가 되었을 때 개인만이 아니라 그가 다스리는 사회 전체가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고, 그 가능성은 점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목표가 정말 아버지의 명예회복 때문이었을까. 현 정부는 박정희의 명예회복을 위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몰아붙이며 이념대결과 역사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유럽에 가면 중도우파 정도밖에는 안 될 통합진보당이 ‘종북좌빨’로 몰려 해산당해야 하는 오늘, 반세기 전의 사상논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객관적으로 누구도 부인 못할 빨갱이 전력을 가진 사람도 뒤에 빨갱이로 몰리면 괴로운 법이다. 그분의 따님을 포함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그 시절 박정희가 고통 속에서 대중들에게 토로한 외마디 비명을 다 같이 들어야 한다. 나 역시 호된 빨갱이 사냥을 겪고 보니 박정희의 비명이 새삼 가슴속에 파고든다. “우리들은 이제 이 나라 사회의 근대화 작업을 끈덕지게 방해하고 있는 일체의 매카시즘을 타도, 청소해야 할 공동의 전선에 섰습니다. (…) 매카시즘의 한국적 아류들인 그들은 그 악습의 보검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무새우(시커먼 새우)를 매카시즘이라는 번철(프라이팬)에 달달 볶아 새빨간 빨갱이로 만들려는 수법을 농하고 있습니다. (…) 지난날의 우리 헌정사를 더듬어볼 때 여러분들은 오늘의 야당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지성인들의 건설적인 발언을 매카시즘적인 수법으로 탄압해왔는가를 똑똑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참다운 반공’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정치 지반인 전근대적인 유제가 위협을 당하면 ‘용공’이니 ‘빨갱이’니 하는 상투적인 술어로 상대세력을 학살시켰던 것이 한국적 매카시즘의 아류들이 저질러온 행적이었습니다. (…) 무슨 일이 있든지 우리는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의 신봉자를 우리 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과감히 투쟁합시다.”(“전진이냐 후퇴냐”, <동아일보> 1963년 10월5일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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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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