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23 20:33
수정 : 2015.12.24 11:07
[매거진 esc] 공유하기
요즘 <응답하라 1988> 열풍에 저도 묻어가보렵니다. 이름하여 ‘응답하라 1991’. 고3이던 저는 학력고사를 대차게 망치고,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았습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더 신나게 놀아야 한다는 강박마저 생기더군요. 고등학교를 좀 멀리 다니는 바람에 동네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이날 역시 동네 친구 셋과 함께였습니다.
남자 넷이 잔뜩 멋 부리고 서울 강남역으로 향했습니다. 나이트클럽에 갔는지 술집에 갔는지 가물가물한데, 암튼 그토록 갈망했던 여자들과의 즉석만남이 수포로 돌아갔던 건 확실합니다. 누군가가 “이대로 갈 수 없다”며 “요즘 12시 넘어도 문 여는 방배동 카페 골목이 뜬다고 하니 그리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꺼져가던 희망의 불꽃을 되살려 아직 끊기지 않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방배역에 내리니 고요한 주택가였습니다. 카페의 ‘카’자도 보이지 않았죠. “도대체 골목 어느 구석에 카페가 있는 거냐”며 주택가를 하염없이 배회했습니다. 한참을 걸어 카페 골목에 당도한 우리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정작 카페 대신 어느 감자탕집인가에 들어가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첫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땐 추워도 추운지 몰랐고, 다리 아파도 아픈 줄 몰랐으며, 아무 일도 없었을지언정 가슴만은 ‘천일야화’라도 겪는 듯 방망이질쳤습니다.
이젠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설레지 않습니다. 그저 회사 안 나갈 가능성이 높은 ‘빨간 날’일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이십몇년 전을 떠올리니 마음이 훈훈해지고 살짝 두근대기도 하는 것 같군요. 이제는 그 셋 중 하나만 연락이 닿는데, 그 친구라도 오랜만에 만나 감자탕에 소주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단, 크리스마스 날은 말고요. 그날은 가족과 함께! 이번주 요리면을 보며 어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살지 아직도 고민중이랍니다. 가족·친구·연인과 함께든, 혹은 혼자든, 메리 크리스마스~.
서정민 esc팀장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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