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9.28 19:53
수정 : 2016.09.28 19:55
[매거진 esc] 조은미의 빵빵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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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몬 몰. 조은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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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총을 들고 ‘브라운 신부’를 겨눈다. “보석 내놔.” 브라운 신부는 놀란 두꺼비눈으로 범인을 쳐다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얼른 주전자를 집어 들고 물을 받으며 말한다.
“잠깐, 차 좀 마시고요.”
이 신부님, 누가 영국인 아니랄까봐. 총구 앞에서도 차를 마시겠다고 찻물을 끓인다. 영국 드라마 <브라운 신부>(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국 <비비시 원>의 인기 추리 드라마. 2017년 시즌5 방송 예정)는 아무리 봐도 추리를 빙자한 ‘먹방 영드’다. 신부님은 툭하면 티타임 중이다. 추리 킬러 브라운 신부를 키운 건 팔할이 홍차였다. 추리 천재 셜록 홈스를 다룬 영국 드라마 <셜록>도 만만치 않다. 셜록은 툭하면 오른손엔 홍찻잔을, 왼손엔 홍찻잔 받침을 들고 골똘히 생각한다. 홍차를 호로록 한 모금 마신 뒤에 또 생각한다. 역시 위장에 무언가 돌아야 뇌가 돈다. 추리소설 가운데 이런 책도 있다.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 식사 후에>.
하지만 차만 마시면 섭섭하다. 티는 원래 티 푸드와 함께 호록호록 냠냠 마셔야 제맛이다. 티 푸드 하면 시나몬 롤(
사진)이다. 가을엔 단풍 구경 대신 단풍 닮은 시나몬 롤이 제격이다. 시나몬 롤은 한마디로 시나몬빵이다. 말랑말랑한 빵 반죽을 김밥용 김처럼 넓게 편 뒤에 버터를 넓게 펴 바르고 그 위에 설탕을 섞은 시나몬을 뿌린 뒤 김밥 말듯이 돌돌 말아, 역시 김밥 자르듯이 잘라서 오븐에 구운 빵이다.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속살 사이 흩뿌린 시나몬설탕이 녹아내린다.
찬바람이 도니 시나몬 롤이 나를 부른다. 이게 다 영화 <카모메 식당>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카모메 식당’은 시나몬 롤 덕후가 만든 시나몬 롤 예찬 영화다. 오죽하면 파리 날리던 카모메 식당에 처음 핀란드 손님들이 찾아온 것도, 시나몬 롤 때문이었다. 시나몬 롤이 내뿜는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스르륵 식당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거 보면, 나의 직업병이 출몰한다. ‘쥔장이 영리해. 냄새 마케팅이다 이거지?’
원래 시나몬 롤은 향기가 열 일 하는 빵이다. 시나몬 롤을 구울 때 미친 듯이 퍼지는 향기에 저항할 자 누구냐? 없다.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고양이다. 우리 집 고양이만이 시나몬 롤을 돌 보듯이 한다.
내가 카페에서 (나 먹으려고) 시나몬 롤을 구울 때마다, 손님들은 넌지시 물었다. “이거, 안 파세요?” 맘 같아선 “으헉. 나 먹기도 모자라요” 소리가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친절한 쥔장 코스프레’를 저버리지 못하고 마지못해 내밀었다. “하나, 드셔보실래요?”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뒤론, 시나몬 롤을 구울 때마다 시나몬 롤 위에 뭔가를 덮어놨다. 안 보이게!
시나몬은 수천 년 역사를 가진 향신료다. 고대인들은 시나몬이 아라비아에서 왔다고 믿었다. 로마인은 거대한 흡혈박쥐가 지키는 늪에서 시나몬이 자란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는, 시나몬이 치명적인 독사들이 사는 계곡에서 자란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시나몬을 채취할 때는 손과 발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흡혈박쥐가 지키고 독사들이 우글대는 곳에서 자라는 향신료라니? 대단하다. 그래서 그런가? 이집트인은 미라를 만들 때 시나몬, 몰약 같은 향신료를 썼다. 시체에서 뇌와 내장을 모조리 제거한 뒤 시나몬, 몰약, 기타 등등의 향신료로 꽉꽉 채워 잘 꿰맸다. 이 이야기를 알고 난 뒤 이집트 미라에 대한 생각이 향기롭게 바뀌었다. 그 대신 부작용도 있다. 시나몬을 훌훌 뿌려 돌돌돌 만 시나몬 롤을 먹을 때마다 붕대로 둘둘 만 이집트 미라 생각이 난다.
시나몬은 스리랑카가 원산지다. 원산지에 얽힌 이런 괴담은 그냥 전설이다. 시나몬은 후추, 정향과 함께 세계 3대 향신료다. 시나몬 스틱은 육계나무 껍질이다. 우리가 수정과에도 쓰고 약재에도 쓰고 두루두루 쓰는 딱딱한 계피와는 조금 다르다. 부드러운 맛의 차이랄까? <셰프가 추천하는 54가지 향신료 수첩>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계피를 ‘중국 시나몬’이라고 부르는데 맛과 향은 거의 같지만 계피에 비해 시나몬의 맛과 향이 더 부드럽다고 한다.
찬 바람이 분다. 계절이 훅 간다. 내 기억력도 훅훅 간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일 지구가 망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 시나몬 롤 나무를 심고 싶다. 가만히 있어도 시나몬 롤이 뚝뚝 떨어지게.
글·사진 조은미 페이스트리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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