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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06 19:53 수정 : 2016.05.07 09:35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

말달리자 이상혁 작사·작곡, 크라잉넛 노래

살다보면 그런 거지 우후 말은 되지
모두들의 잘못인가 난 모두를 알고 있지 닥쳐

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 많으면 성공하나 차 있으면 빨리 가지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 놈이 될 순 없어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이러다가 늙는 거지 그땔 위해 일해야 해
모든 것은 막혀 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

사랑은 어려운 거야 복잡하고 예쁜 거지
잊으려면 잊혀질까 상처받기 쉬운 거야 닥쳐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펑크 장르의 노래’를 꼽으라면 역시 ‘말달리자’ 아닌가 싶다. ‘말달리자’가 잘 보여주는 것은, 노래가 가장 효과적인 생활의 압축 표현방식의 하나라는 점이다. 좋은 노래는 단 몇 분 안에, 한 집단의 생활상을 리얼하고도 상징적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노래는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기록물이다. 그 안에는 생각의 구조와 일상의 살아 숨쉬는 디테일이 모두 담긴다.

이 노래에서 ‘말달리자’는 정확하게 반대되는 두 의미로 동시에 쓰인다. ‘말달리자’는 복수 1인칭의 주체가 청유하는 신나는 자발적 레이싱이면서, 동시에 ‘말달리게 하기 위해’ 타자로서의 말에 가하는 가혹한 채찍질이다. 그러니까 뛰는 게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동시에 남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나는 신나게 놀고 뛰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남한테 채찍질도 가하는 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걸 다시 뒤집어 말하면, 내가 왜 뛰고 있는지가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내가 뛰는 줄 알았는데 남한테 신나게 채찍질당하며 뜀박질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한마디로 ‘복잡한 국면’이다. 우는 땅콩은 이 복잡함을 매우 단순하게, 실은 단순한 척하면서, 노래한다. 펑크니까. 단순해야 하니까. 그러나 ‘사랑은 어려운 거야 복잡하고 예쁜 거지’.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랑할 수도 없는 세대다. 이 노래가 단순한 것 같아도 이런 여러 차원에서의 ‘복잡함’을 절묘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90년대 세대가 이 노래에 열광한 것이다. 사실 90년대 세대의 세대적 조건 자체가 그렇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모호한 전선을 마주하고 모종의 탈주를 시도한 바 있다. 중산층의 취향이라는 빠져나갈 수 없는 덫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걷어치우려 했다. 그 안에는 순종과 저항이, 소비와 자급자족이, 위기와 대안이,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담겨 있다. 말달리는 건 신나는 놀이이면서 동시에 절망적인 노동이다. 그들은 “이러다가 늙는 거지 그땔 위해 일해야 해”라는 명제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부모 세대도 그렇게 살아왔다. 체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법, 그것은 채찍을 들든가 채찍을 맞든가 둘 중 하나다. 이 비정함을 20대 초반의 그들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살다보면 그런 거지 우후 말은 되지
모두들의 잘못인가 난 모두를 알고 있지”

이 어눌한 듯한, 말이 안 되는 듯한, 그래서 ‘말은 되지’라고 한,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뭘 알고 있는지 알쏭달쏭한, 어떤 면에서는 바보 같은 이 도입부는 이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똑바로 말하지도 않고 슬쩍 비켜가지도 않는다.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완전히 밖으로 나가지도 않지만 어느새 집에는 없다.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말달린다. 생각이 있어 보이는데 바보 같다. 그 ‘바보 같음’의 힘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 대목이 각 절 사이의 코러스 ‘말달리자’로 넘어갈 때의 갑작스러운 리듬의 붕괴다. 이 대목이 이 노래의 계속되는 클라이맥스다. 각 절에서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맨정신으로 놀다가 사설이 끝나면, 옜다 모르겠다, 그냥 냅다 달아나는 말처럼 광기의 리듬 속으로 빠져든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엇박자가 기묘하게 맞아들어가는 것이 신기하다. 그게 크라잉넛의 본질이다. 1990년대 중반의 드럭에서 놀아본 친구들은 알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나는 지옥’이었다.

또 하나의 압권은 각 절 끝에서 마치 자해하듯 일갈하는 ‘닥쳐’라는 가사다. 이들은 ‘닥치고~’의 원조다. ‘닥쳐’로 말을 걸다니. 그런 땅콩들이 어디 있담. 이 ‘닥쳐’는 러시아의 문예이론가 미하일 바흐친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다성성’(polyphony; 여러 목소리의 공존)을 보여준다. 먼저 개입되는 것은 ‘어른의 목소리’다.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데 어른들이 ‘닥쳐’라며 찬물을 끼얹는다. 또한 이 ‘닥쳐’는 동료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자칫 메시지 중심으로 무거워지려는 걸 중간에 끊고 들어가서 놀이의 방향으로 되돌리는 역할이다. 그러니까 스스로에 대한 역설적인 응원 내지는 독려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닥쳐’는 어른들을 향해 내던지는 명령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제 그만 좀 하시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학의 형식을 가장해서 어른들에게 저항한다. 이것은 민중적 형식의 놀이에서 자주 보이는 뒤집기다. 이 복잡한 ‘닥쳐’에 의해 한국 청년문화에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군사문화가 따귀를 맞고 결정적으로 쓰러진다. 이때부터 군사문화는 끝난 것이다.

이것 참 아이러니하지 아니한가. 나는 오래전 어느 글에선가 크라잉넛의 ‘말달리자’를 ‘90년대 젊은이들의 송가’라고 쓴 적이 있다. 그 후로는 마찬가지다. 복잡한 국면 속에서 문화적으로 저항하면서 동시에 끈질기게 살아가기라는 이중적 버티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달리자’와 ‘밤이 깊었네’ 사이의 거리. 어두컴컴하고 습한 지하의 클럽에서 쉼없이 말달리던 크라잉넛의 밤은 늘 축제의 밤이었다. 말달리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군대를 다녀오고도 여전히 놀았다. 쉼없이 말달려온 그들이 직장인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아이들로 변했다. 그들의 음악적인 진화는 사실 진지한 것이었다. 펑크에서 셀틱 음악으로, 가요의 깊은 맛을 낼 줄 아는 어른들로, 음악도 깊어갔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올해로 ‘우는 땅콩’들이 마흔이다. 키보드 치는 김인수는 조금 형뻘이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그렇다. 사실 그들이 마흔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여전히 홍대 바닥을 주름잡는 그들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그 와일드함에조차 연륜이 배어 있다. 그들의 기념비적인 두 노래, ‘말달리자’와 ‘밤이 깊었네’ 사이의 거리가 어느덧 그들 자신의 세월 속에서 메워졌다. 웬만한 끈기로 말달리지 않고서는 여기까지 오기 힘든데, 그 길을 왔다. 그래서 다시 돌아보게 된다. 말달리자를.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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