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인, 나의 시를 말한다
다른 시간을 위해 토요일에 시를 읽습니다. 잊어온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무뎌진 것들에 대한 송곳의 날카로움으로, 버린 것들에 대한 발견으로.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산문으로 설명하고, 시와 노랫말 전문가가 독자들에게 시의 지도를, 초대손님이 시와 관련된 체험을 들려줍니다. 지면에는 여백이 있습니다. 시인, 전문가, 초대손님들이 스쳐간 자리에 스며든 나의 다른 시간. 다른 시간을 위한 자리입니다. 시인과 초대손님의 시 낭송은 정보무늬(QR코드)를 통해 <한겨레티브이(TV)>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이 주의 시인 유종인
이끼
그대가 오는 것도 한 그늘이라고 했다
그늘 속에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번지는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옛말,
여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번지고 있다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너무 멀리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축축한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재촉들>수록- *1996년 <문예중앙> 시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됐다.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 산문집 <염전>,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를 냈다.
그늘 속에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번지는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옛말,
여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번지고 있다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너무 멀리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축축한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재촉들>수록- *1996년 <문예중앙> 시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됐다.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 산문집 <염전>, 시조집 <얼굴을 더듬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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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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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시인’ 선정위원회 황현산(위원장), 김수이 손택수 이영광 자연의 학력 피로와 모멸과 상처와 분노 없이 지나가는 하루. 현대인에게 행복은 이런 종류의 것이 되었다. 자연의 하루가 현대문명이 내뿜는 온갖 유독물질에 위협받는 것처럼, 인간의 하루도 스트레스로 통칭되는 갖가지 사회적 독성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현대인은 자연과 사회에 가득한 이중의 독성에 저항하며 살아가야 한다. 독성을 제거하고 면역력을 길러야 한다. 하지만 독성의 제거도, 면역력의 증강에도 한계가 있다. 사후 해결이 아닌, 근본적인 변화와 공동체의 협력이 요청되는 이유다. 물론 우리는 이 당위를 모르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으나 실천하지 않고 못하는 변화에 대해서는, 계속 말해야 한다. 이 말들의 건강한 소음이 세상을 바꾸어 왔고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이끼와 풍란과 파도 등에게 사사한 “자연의 학력, 우주의 학력”을 지닌 유종인은 이 변화를 구체적으로 사유하는 데 능하다. 자연의 학력은 문명의 학력과는 다른 삶의 지혜와 방식을 체득하게 한다. 유종인은 “그늘을 더듬어 번지”는 이끼로부터 “사랑이라는 재촉들”을 배운다. 계절과 서식지를 가리지 않고 한 뼘 한 뼘 그늘을 초록으로 만드는 이끼는, 사랑이 어떤 심성과 형상으로 자라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가장 낮게 엎드려 그늘을 더듬으며 수평으로 번지는 이끼의 사랑은 화려한 꽃도, 자신을 욕심껏 펼칠 허공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을 절제하고 최소화하는 데 공력을 쏟는다. 이 사랑은 차라리 수양(修養)이다. “너무 크게 숨 쉬면 사랑이 발을 가질까 달아날까// 꽃도 부처도 놔두고 온 초록의 적멸보궁”(‘이끼’)이 이렇게 탄생한다. 유종인이 자연의 학력을 적용하는 곳은 “무간지옥 같은”(‘大便佛’) 현대인의 일상이다. 일산 오일장에서 “여리고 굽고 힘없는 상늙은이들이 내놓은 푸성귀”들 중 “시든 부추 한 단에 낀 부추꽃 흰 꽃대의 눈빛들”(‘부추꽃’)에 눈을 맞추는 것이 하나의 예다. 현대문명이 만든 자연과 문명의 부당한 학력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이 ‘수평의 눈’이라는 듯. “초록의 적멸보궁”인 이끼의 사랑을 머금은 눈.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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