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연, 나의 시를 말한다
다른 시간을 위해 토요일에 시를 읽습니다. 잊어온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무뎌진 것들에 대한 송곳의 날카로움으로, 버린 것들에 대한 발견으로.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산문으로 설명하고, 시와 노랫말 전문가가 독자들에게 시의 지도를, 초대손님이 시와 관련된 체험을 들려줍니다. 지면에는 여백이 있습니다. 시인, 전문가, 초대손님들이 스쳐간 자리에 스며든 나의 다른 시간. 다른 시간을 위한 자리입니다. 시인과 초대손님의 시 낭송은 정보무늬(QR코드)를 통해 <한겨레티브이(TV)>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이 주의 시인, 하재연
안녕, 드라큘라
당신이 나를 당신의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면
나는 아이의 얼굴이거나 노인의 얼굴로
영원히 당신의 곁에 남아
사랑을 다할 수 있다.
세계의 방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햇살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살아있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은 당신의 소년을 버리지 않아도 좋고
나는 나의 소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세계의 방들은 온통 열려 있는 문들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 준다면
나는 순백의 신부이거나 순결한 미치광이로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할 것이다.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안녕, 하고 말해 준다면.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멀어 버리지 않는다면.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수록-
나는 아이의 얼굴이거나 노인의 얼굴로
영원히 당신의 곁에 남아
사랑을 다할 수 있다.
세계의 방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햇살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살아있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은 당신의 소년을 버리지 않아도 좋고
나는 나의 소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세계의 방들은 온통 열려 있는 문들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 준다면
나는 순백의 신부이거나 순결한 미치광이로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할 것이다.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안녕, 하고 말해 준다면.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멀어 버리지 않는다면.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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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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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씩 살고, 조금씩 쓴다 “나는 가능하다면,/ 명료해지고 싶습니다.// 밤과 낮, 같은/ 단순한 어휘를 쓰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내가 거기 속하는지/ 궁금합니다.”(‘12시’) 하재연의 언어는 투명하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다. 유리 위를 구르는 잘 응집된 물방울 같다. 물방울들은 아주 미세해서 우리가 적당한 수준에서 ‘연속’으로 이해하기로 한 것들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틈’을 유영한다. 더 정확히는, 하재연의 언어-물방울들은 이 균열로부터 흘러나온다. 존재의 틈에서, 관계의 틈에서, 삶의 틈에서, ‘나’의 틈에서 계속되는 누수의 물방울들은 언어의 틈을 그대로 통과해 우리의 의식을 벗어난다. 언어에도 수많은 구멍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재연은 언어라는 성근 틀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언어와 함께 저장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꿈을 위해 시를 쓴다. 하재연은 단순한 어휘로 뭉뚱그려지는 것들을 미세하게 분할해 다시 서술한다. 그녀의 어휘와 문장은 간결하지만 매우 섬세해서 기존의 언어가 건너뛴 빈 곳들이 있음을 알게 한다. 계속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한 번도 같은 형태로 반복된 적 없는 존재와 삶의 균열들이 조금 더 또렷이 감각된다. 그러나 이 균열들 탓에 ‘나’는 끝내 명료해질 수 없으며 명료하게 말할 수도 없음을 하재연은 안다. 틈에 틈으로 맞서, 제아무리 많은 행간을 품은 언어를 빚는다고 해도 말이다. 하재연의 시는 언어의 역량에 대한 행복한 믿음을 구축하기보다, 존재의 불완전성과 그로부터 파생한 언어의 불완전성을 담담히 직시하는 쪽을 택한다. 살아가는 일에도, 말하는 일에도 명료해질 수 없는 ‘나’는 단지 개인적이며 순간적인 체감을 간략히 진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견딜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살아간다”(‘로맨티스트’). 그리고 조금씩 쓴다. 불완전한 채로 살아가고 말하기. 하재연은 삶의 조건을 능동적인 행위로 바꾼다. 조금 사는데 더 많이 살고, 조금 말하는데 더 많이 말하는 역설적인 방식. 과잉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삶과 시의 윤리.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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