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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정치의 무능력은 ‘거리 정치’의 일상화를 가져온다. 사진은 지난해 12월15일 기아차 사내하청 조합원들이 서울시청 옆 옛 국가인권위원회 광고탑에서 188일째 정규직 채용을 촉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면.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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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4) 정치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주제를 듣는 순간 정치학자로서 떠오른 것은 신동엽의 시다. 그러나 이는 낭만적인 헛꿈이다. 문명국들이 누리고 있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만이라도 보장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예술가가 끌려가지 않고, 아무리 틀린 생각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상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을 가거나 당이 해산당하지 않으며, 여당의 원내대표가 헌법이 보장한 3권분립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찍혀나가지 않고, 갑자기 낙후한 독재국가에서나 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나는 이 모두를 응축해 ‘한국 정치의 예외주의를 넘어서’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 예외주의를 넘어서 글로벌 스탠더드의 정치’에서 살고 싶다. 미국정치학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미국 예외주의’이다. 왜 미국은 유독 유럽과 달리 사회민주당,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과 같은 좌파정당 내지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 결과 정치가 ‘보수 대 진보’가 아니라 ‘보수양당제’를 취하고 있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다. 해방정국을 거쳐 분단이 고착화된 뒤 진보정당은 사라졌고 정치는 보수양당제가 지배해왔다. 미국과 비슷한 ‘한국 예외주의’이다. 게다가 미국과도 다른 우리만의 예외주의가 있다. 우리의 보수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보수’와는 다른 ‘극우냉전’ 세력에 가깝다.
근래 들어 냉전보수 세력 대 민주야당 세력의 갈등을 흔히 ‘보수 대 진보’라고 부르지만 이는 잘못이다. 한민당에서 더불어민주당(그리고 안철수의 국민의당)에 이르는 ‘민주야당’ 세력은 미국의 민주당과 비슷한, 개혁적인 ‘자유주의’ 정당이지 유럽식의 ‘진보정당’은 아니다. 조봉암의 진보당, 민주노동당, 정의당 등이 진보정당이다. 최근의 한국 정치는 새누리당 같은 보수(conservative), 개혁 내지 자유주의(liberal), 그리고 진보(progressive)라는 3분 구도이다. 정확히 표현해 거대양당과 취약한 진보의 2.1정당체제이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날아야 하건만, 우리 정치는 오른쪽 날개만 있는 기이한 새이다. 아니 오른쪽엔 독수리 날개가, 왼쪽엔 병아리 날개가 달려 오른쪽으로 기우뚱하게 나는 기이한 새이다.
거대 양당과 취약한 진보 체제오른쪽 날개만 있는 ‘기이한 새’ 사회적 갈등 조정 제대로 안돼
제도정치 무능력, 거리 정치로 지역구도 넘어선 진보 대 보수
자유주의 정당들 ‘좌클릭’ 해야 정치의 기능이란 ‘사회적 갈등의 제도적 조정’이다. 사회적 갈등을 정당과 의회와 같은 제도 내에서 조정하여 해소함으로써 파국을 예방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그리고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갈등은 노동 대 자본, 빈자 대 부자를 기본축으로 하되 생태 대 개발, 소수자(여성·동성애자·장애인 등) 대 다수자, 평화 대 전쟁과 같은 갈등들이 중첩되어 있는 ‘진보 대 보수’의 구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도 이 같은 ‘진보 대 보수’의 구도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수일변도의 정치가 보수 대 진보라는 사회적 갈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으로써 ‘갈등의 제도적 조정’이란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가 바로 골리앗투쟁과 희망버스이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는 ‘제도정치의 무능력’이 ‘거리의 정치’의 일상화를 가져온 것이다. 외국 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은 우리의 거리투쟁과 운동을 부러워한다. 그럴 만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들이 부러워하는 활발한 거리투쟁은 한국 정치의 무능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자랑거리만은 아니다. 정치가 제 기능을 다해 외국이 부러워하는 거리의 정치가 사라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이다.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지난 연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들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갈등은 계층(75%), 노사(68.9%), 이념(67.7%), 지역 갈등(55.9%) 차례였다. 특히 계층갈등은 조사를 시작한 2010년 이후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헬조선, 금수저 논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갈등도 이념, 계층, 노사, 지역의 차례였다. 이처럼 계층과 노사 갈등이 심화된 것은 보수정부의 무능으로 1997년 경제위기가 찾아온데다가 김대중 정부가 위기 극복을 위해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후 정권들이 이 같은 정책을 계승,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때문에 생겨난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정치가 제 기능을 해서 풀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그 중심에는 신자유주의와 보수독점체제라는 한국 정치의 예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예외주의는 잘 알려져 있듯이 분단에 따른 반공주의 등에 기초해 있다. 그 결과 ‘진보 대 보수’가 아니라 보수양당 간의 ‘민주 대 반민주’가 한국 정치의 기본틀이었다. 그러나 80년 광주학살 이후 진보가 살아났다. 또 반공주의가 약화되고 민주노조가 생겨나는 등 진보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새로운 장애가 등장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약화된 민주 대 반민주를 대체한 것은 진보 대 보수가 아니라 지역주의이다.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지역주의, 그리고 최근 부상한 세대갈등이다.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의 압도적 우위하에 커지고 있는 세대갈등, 약화됐지만 사라지지 않은 민주 대 반민주, 그리고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진보 대 보수가 결합해 있는 구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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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월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 법안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하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가 의석이 텅 비어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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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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