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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24 20:07 수정 : 2016.03.24 23:01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도 없이 정글과 같은 완전 자유경쟁을 도입하자는 자유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금기처럼 남아 있는 사회주의를 정치의 지평에 다시 끌어들여야 한다. 사회주의가 금기였던 나라 미국에서도 샌더스란 대선후보가 약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월31일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 전날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악수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디모인 워털루/AP 연합뉴스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5) 사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할 때 곧잘 들먹이는 말 가운데 각자도생의 사회란 것이 있다. 어찌 듣자면 그럴듯한 말일 수도 있지만 조금 삐딱하게 새기자면 난센스에 가까운 말이기도 하다. 각자도생하며 살아가는 개인들만이 있는 세계에 사회 따위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발짝 물러나 달리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개인들이 자기 이해를 추구하면서 만들어지는 네트워크가 사회 없는 사회의 그 진짜 면모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그렇다면 각자도생의 사회란 말은 사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외려 사회가 자신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방식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느새 사회란 말이 없어도 사회란 것이 있는 것처럼 뵈는 세계에 살게 된 셈이다.

어떤 이는 사회가 사라졌다고 서글픈 낯을 짓는다. 그리고 사회를 복원하고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감성적인 검색어는 외로움이라는 어느 빅데이터 분석업체의 이야기가 들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사한 ‘2015년 삶의 질 지수’에 따르면 문제가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친구나 친척, 이웃이 있느냐는 문항에서 조사대상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고 전한다.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15’에서 드러난바 한국인 가운데 56.8%는 여가 시간을 혼자서 보낸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가슴을 친다. 모두 더 이상 따뜻한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섬처럼 나 홀로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 즉 사회 없는 사회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을 보고 사람을 찾는 사회 만들기가 큰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사회는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정치적 프로그램은 사회의 파괴를 겨냥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려면 사회란 개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개의 정치적 이념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합의했던 사회에 관한 이상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연대로서의 사회, 안전의 제도적인 네트워크로서의 사회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회 따위란 없다고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가 강변했던 ‘사회’란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사회였다. 그리고 그녀가 창설하고자 했던 세계는 사회 없는 사회, 개인과 가족들의 자율적인 네트워크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의 세계였다. 그러므로 사회적 관계와 사회는 다른 것이다. 사회적 관계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사회란 엄연히 다르다. 후자는 세월을 거치며 정치적 아이디어와 투쟁을 통해 고안되고 구체화된 역사적인 현실이자 이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을 넘어 다른 세계로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려 도입된 사회(Society)란 낱말은, 그런 점에서 지시어라기보다는 패러다임에 가깝다. 물론 그즈음 형성된 사회주의란 정치는 숫제 사회를 자신의 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사회’ 다음에 찾아온 사회
세계화·금융화로 토대 붕괴

임노동자 자본 타협 ‘사회국가’
자본 반격으로 성장 과실도 끝

사회 복원 ‘착한 의지’ 뛰어넘어
자본주의 사회관계 위 연대해야

사회란 개념은 정치적인 의지와 투쟁을 동원하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중재하는 해법을 제시하며 사회를 구성하는 성원들을 독특한 모습으로 가시화하였다. 그것은 먼저 국민국가를 경계로 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보장과 복지라는 도구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성장과 분배, 발전과 행복이라는 그림을 배경으로 사람들을 그려 넣었다. 그렇게 그려 넣어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은 인구 혹은 국민이었다. 전설로 회자되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말처럼 유년에서부터 노년까지의 삶, 다시 말해 인구의 행복이야말로 정치가 관심을 기울일 대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회라는 대상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국가라는 사회국가를 낳았다.

사회국가란 개념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와 대응한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문제”를 세상에 알린 19세기 중반의 노동자, 농민의 반란과 저항에 의해 촉발되었고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모델을 통해 실험되었다가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발전된 국가에서 널리 확산되고 또 정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국가는 지난 세기 후반부터 슬금슬금 허물어지기 시작하다 이제는 바야흐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태세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무엇보다 세계화 그리고 금융화로 집약되는 자본주의의 변화는 사회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사회국가는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타협을 통한 재분배의 체계를 도입하고 실행하였다. 이는 국민국가의 경계 안에서 자본은 노동자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지배에 대한 동의를 전제로 임금소득은 물론 산업재해를 비롯한 다양한 질병에 대한 보험, 양육과 교육, 노령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였다. 실업과 빈곤이 초래한 두 개의 국가를 통합하기 위하여 노동과 자본은 모두가 함께 공동의 운명에 연루된 연대의 체계에 속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법인세는 확대되었고 보장의 범위는 확장되는 듯이 보였다. 발전국가인 한국은 복지를 대신해 폭발적이면서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신화가 있었다. 임금소득은 꾸준히 성장하는 듯이 보였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교두보였던 교육은 확대되는 듯했으며 영아사망률은 급감했고 건강 수준도 향상되었고 기대수명도 늘어났다. 성장에서 흘러나온 과실이 복지를 메꿔주었던 격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를 전후한 위기는 자본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세계화는 자본의 국민적 경계를 허물고 유연화, 아웃소싱, 외주화, 자본의 이전 등을 일반화하였다. 금융화는 발전된 자본주의국가의 자본들을 투기꾼으로 탈바꿈시켰고 주주자본주의란 미명하에 경제를 말끔히 수술하였다. 노동자는 이제 자산관리자인 척 꾸며졌고 주택이나 부동산, 주식, 보험 등에 투자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늘려가는 것을 당연지사처럼 여기게 되었다. 이는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국내 재벌기업의 이윤보유금은 천문학적인 액수이고 가계부채는 1200조원을 돌파한 지 오래이다. 긴축이란 요란한 슬로건이 유럽을 뒤덮고 있어도 국가부채 역시 1천조원을 돌파한 지 오래이다. 부채를 통한 성장이라는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 자본주의의 궤적은 저성장과 실업이라는 두 개의 지표 아래 요약된다.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이는 사회보장은 변변치 못했어도 발전에 따른 양적 성장의 과실을 찔끔찔끔 나눠 받으며 삶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발전국가의 ‘사회 없는 사회’의 메커니즘도 마비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럴수록 발전과 성장의 경험이 침전시킨 역사적인 기억은 더욱 맹렬히 타오른다. 10퍼센트 안팎을 넘나드는 고성장 시대의 따뜻했던 삶을 향한 향수는 <국제시장> 같은 영화의 퇴행적인 유토피아적 기억 속에서 넘실댄다. 그런 점에서 급진적인 정치를 대체하며 사회의 복원을 꾀하는 다양한 시민운동의 전략은 납득할 만한 것이다. 세련된 소비적 라이프스타일 운동이라는 혐의를 받는 밥상공동체운동에서부터 시작해 마을 만들기, 대안통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지자체 수준의 기본소득 운동, 청년수당 지급 등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만치 다양한 운동은 윤리적인 의지를 통해 사회를 복원하고자 한다. 치유의 경제, 상생의 자본주의, 대안경제 등 이러한 기획이 형성하고자 하는 경제에 관한 이미지 역시 한결 성가를 구가한다. 그렇지만 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바깥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의 노력을 통해 사회를 도입하려 한다. 그런 연유로 그것은 사회 외부의 사회에 머물고 만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손질하지 않은 채 사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다운 거짓말로 그칠 수 있다. 따라서 사회를 복원하는 착한 의지에 머물지 않고 변화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조건 위에서 연대를 재발명하는 것이야말로 급선무이다. 1그램이라도 사회주의를 가미하지 않은 순수 자유주의는 불가능하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도 없이 정글과 같은 완전 자유경쟁을 도입하자는 자유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금기처럼 남아 있는 사회주의를 정치의 지평에 다시 끌어들여야 한다. 사회주의가 금기였던 나라 미국에서도 샌더스란 대선후보가 약진하고 있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강한 국가의 비효율성 탓이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신화에 갇힌 탓이었다. 사회를 위한 정치가 어제의 사회주의와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를 복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창립하는 기획이 될 것이다.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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