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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07 19:18 수정 : 2016.04.18 10:44

지난달 12일 경북 포항시 송라면 조사리 해안 일대에서 벌어진 한미 연합상륙훈련. 한국의 국가는 한미관계와 남북관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동요한다. 포항/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6) 한미관계

재작년 4월의 세월호 사건이 안전문제를 성찰하게 했다면, 올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 장거리 로켓 실험은 한반도의 안보현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둘 다 재앙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각각의 사안을 파악하는 방식과 대응 방안은 사람에 따라 사뭇 다르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건은 하나의 입장이나 분석틀에 의해 깔끔하게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국이고 한국은 한국이다?

작년 9월3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다. 천안문 성루에 올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오른편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다음에 서서 열병식을 지켜보는 사진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중국의 한반도 공식 파트너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바뀌었나? 아니면 남한의 국제 파트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나? 박 대통령이 중국, 러시아 최고지도자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마치 ‘블루팀 선수’가 ‘레드팀 진영’에 서 있는 듯했다. 상전벽해를 넘어 천지개벽 같은 함축을 담은 사진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서 마침내 ‘나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1970년대 초반 냉전에서 데탕트로의 전환기에 자주국방과 ‘한국형 민주주의’를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처럼, 탈냉전과 G2 시대에 박근혜 대통령은 자주외교와 ‘대박형 민족통일’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 장의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은 해석학적 순환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진 못했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70주년 행사는 동시에 ‘미국 제국과 중국 제국 사이의 한국’이라는 적나라한 국제정치 현실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한미관계는 피로 맺어졌다. 혈맹인 한미관계는 여타 국제관계와 질적으로 다르다. 이를 ‘한미관계 예외주의’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중화질서를 국제질서인 양 오인하던 구한말의 선조들은 망국을 자초했다. 냉전이라는 하나의 세계적 순환은 종료되었다. 동북아에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세계시장에 참여한 후 중국은 한국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밀접해진 중국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아에서 군사적으로 미국과 대립, 경쟁하고 있다. 냉전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휴전선과 대만해협은 미국의 직접적인 관심지역이다. 지리적으로 아시아 국가는 아니지만 미국의 국익은 동북아에 깊이 새겨져 있다. 동족인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의 아시아 회귀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혈맹인 남한의 운신 폭은 넓지 않다. 미국과 남한은 결코 남이 아니다. 다시 한번 한국은 제국 사이에 끼였다.

미국 제국과 관계에서 ‘약한 국가’
‘종속됐다’ ‘자유롭다’ 둘 다 일면적

‘국가’는 만능 아니지만 도전 해결하고
세월호·북핵 모두 ‘통치’로 끌어들여야

미국은 미국이 아니고 한국은 한국이 아니다!

한미관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흔히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자아준거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지만 관점을 바꾸어 “미국에 한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미관계를 상호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역지사지를 통해 지피지기할 수 있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과 분할점령, 남북한 분단정권의 탄생, 한국전쟁에서의 남한 방어 그리고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자유주의적 민주화 전 과정에 미국이 깊숙하게 관여했다. 한국은 엄연한 주권국가이다. 그렇지만 지난 두 세대 동안 진행된 미국화는 그 속도와 폭 그리고 깊이에서 예전의 중국화, 일본화를 훨씬 능가한다. 냉전기 미국은 직접지배보다 간접지배를, 또 공식제국보다 비공식제국을 선호했다. 공식지배는 군사력에 의존하는 방식이며, 비공식지배는 현지 엘리트에 위임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익뿐 아니라 이념과 제도를 통한 동맹을 추구했다. 시간을 두고 한국이 스스로 미국화하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미국과 여러 차원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군사적으로는 동맹관계이다. 수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시작전권도 미국이 가지고 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의 정치모델이다. 선거정치 현장을 보면 한국 정치가 실제로 얼마나 미국화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한국 경제는 영미형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한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전면적으로 미국화된 한국의 사회적 맥락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문화 차원에서 진행된 미국화로 미국식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대량복제되었다. 대학교수의 미국 박사 충원을 넘어 영어 조기교육 열풍에 이르면, 위로부터의 형식적 포섭 단계를 지나 아래로부터의 실질적 포섭 단계에 이르렀다고도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지난 70여년의 한국 현대사는 총체적인 미국식 사회변형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태평양 건너의 초강대국이 아니다. 한국도 더 이상 ‘은둔왕국’이 아니다.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은 바뀌었다. 이는 역사 축에서 보아도, 국제관계 축에서도 그러하다.

한국이 미국이고 미국이 한국이다

미국의 국가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국익을 추구하는 보통국가로서 미국이다. 다른 하나는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재생산을 관리하는 제국으로서의 면모이다. 한미관계를 전자에 국한할 경우 한국과 미국은 서로 국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외적으로만 관계를 맺어나가는 합리적 행위자로 비친다. 그렇지만 한미관계를 국제정치와 세계경제 통치자로서의 미국 제국의 역할에 위치시키면 전혀 다른 관계동학이 펼쳐진다. 이는 한미관계를 국가 사이에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인식에 기반해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권력이 작동하는 통로가 기존 국가기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인지 아니면 국가엘리트 자체를 형성하는 사회적 구성 과정을 통해서인지를 한 축으로 하고,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관계가 직접인지 또는 간접인지에 따라 국제관계에서 행사되는 권력 유형을 각기 강제권력, 제도권력, 구조권력, 생산권력이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발사를 둘러싼 한미관계에 이를 적용해보자. 미국이 한국 정부에 직접 압력을 가해 대북제재에 참여시켰다고 파악하면 이는 강제권력이다. 미국이 국제규범과 객관적인 정보에 입각하여 한국의 지배엘리트로 하여금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하는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경우 이는 제도권력이다.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 한국 및 세계의 시민사회에 북핵 문제의 위험성을 알려서 간접적으로 주의를 환기하는 미국의 역할을 강조한다면 이는 구조권력이다. 끝으로 미국의 국익이 곧 한국의 국익이라고 동일시하는 한국인들의 호응이 커서 한국 정부가 자발적으로 동참했다면 이는 생산권력이다. 박근혜 정권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도 한미관계에서 행사되는 권력을 어떤 유형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한국이 미국에 구조적으로 종속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한국이 미국과 자유롭게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모두 일면적이다. 한국과 한국인은 변했다. 미국이 부과한 자유주의 통치성이 두 세대에 걸친 제도 변형과 주체 형성을 통해 국가 간의 공식적인 한미관계를 안팎과 위아래에서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한국과 미국은 하나다.

한국은 한국이고 미국은 미국이다

한미관계는 남북관계를 거울상으로 전제한다. 한미 간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는 남북 간 ‘적 만들기’ 기획과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을 주적으로 삼은 북한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실험이 곧바로 한국의 안보위기로 동일시되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분단국가 한국의 민족정체성과 국가정체성은 일치하지 않는다. 후자가 전자에 우선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국가는 한미관계와 남북관계 사이에서 갈등하고 동요한다. 이 또한 현실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국익을 지키기 이전에 국익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이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은 한국이다.

한국의 국가는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는 강한 국가였지만 미국제국과의 관계에서는 약한 국가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 속에서 보수정권이 연이어 탄생했다. 그런데 불만을 잉태한 것은 불안이다. 정치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통치의 기본은 국가안보, 사회보장, 개인안녕이라는 중층적 과제를 동시에 관리하는 일이다. 통치가 정치보다 한 단계 위에 있으며 훨씬 포괄적인 활동이다. 운동정치는 민주주의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심화는 다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주체로 각성된 시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 및 전문가집단에 의한 중재가 필요하다. 게다가 한국의 국가는 전 지구적 도전에 직면했다.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도 만능 해결사가 아니다. 국가가 나서서 기술관료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 국제, 국내 문제의 해결은 난망하다. 우리가 파악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밖으로부터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도전도 엄청나다. 우리가 통치할 수 있다고 믿는 내부의 문제도 간단치 않다. 국가안보, 사회치안, 시민자율 그리고 개인규율을 한데 묶는 국가의 헤게모니 프로젝트 발진이 요구된다. 이는 국가안보, 경제발전, 사회안녕, 개인존엄을 아우르는 또 다른 정치합리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다. 내부와 외부, 그리고 공적, 사적 영역을 경계구분하고 끊임없이 통치하는 국가활동이 필수적이다. 이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곧 비판이다. 비판이나 저항이 통치에 우선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문제는 통치고, 통치는 투표야!

세월호 사건이 비극인 것은 구조 가능했는데 그렇게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통치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이에 비해 북핵위기가 실감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통치할 수 있는 영역 밖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알고도 손쓰지 못한 아쉬움은 진실을 규명하고, 관련자를 처벌하고, 앞으로 같은 재난을 반복하지 않는 제도를 수립함으로써 덜어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몰라서 손쓸 겨를이 없었다는 변명은 국가안보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 나라는 망하면 끝이다. 따라서 “세월호가 먼저냐 북핵 문제가 먼저냐?”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세월호도 북핵도!”

정일준 고려대 문과대 사회학과 교수
시민사회도 통치해야 하지만 국제관계도 그러하다. 남북관계도, 한미관계도 동시에 통치해야 한다.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도 그러하다. 나아가 예측과 관리가 가능한 재난뿐 아니라 예측을 넘어서 위험도 통치해야 한다. 통치는 국가를 재정치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투표가 첫걸음이다. ‘종이 짱돌’을 던지자. 투표는 대통령을 만들고, 대통령은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교과서는 시민을 만든다. 그러니 세월호를 기억하려면, 북핵위기를 극복하려면, 투표하자. 통치도 결국 투표로 만든다.

정일준 고려대 문과대 사회학과 교수

※ 이 기획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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