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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9 21:01 수정 : 2016.05.20 10:53

‘도시의 진보’는 근린사회 주체들이 시정에 참여하고 반성장연합, 반신자유주의 세력을 형성해 약자의 이익을 우선 보호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사진은 지난 4월 서울 옥바라지 골목 재개발에 반대하는 문화제 행사 장면.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8) 도시

최근 아시아권 주요 도시에서는 사람 중심 도시 만들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진보도시론’이 빠르게 대두하고 있다. 이는 그간의 경제적 가치 중심의 외형적 도시 성장에 대한 반성으로 ‘사람 중심의 도시 가치’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간주된다. 커뮤니티, 공공공간, 사회경제, 토속문화, 인권과 정의, 참여 거버넌스, 도시 권리 등이 진보도시론을 구성하는 키워드다. ‘진보도시 만들기’ 국제 네트워크 구축에 앞장서고 있는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마이클 더글러스 교수에 따르면 외형적 화려함과 경쟁력보다는 토속성과 일상 행복이 도시를 사람 중심으로 만드는 데 더 중요하다. 그에 의하면 진보도시는 ‘장소의 번영’보다 ‘사람의 번영’을 최우선으로 하는 도시다. 따라서 진보도시는 현재의 지배적인 제도(국가나 시장 중심 제도) 아래에서 담보하지 못하는 사람의 가치를 도시주체들이 자의식적으로 복원하고 실현하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나아짐’을 의미하는 진보란 말은 계몽주의의 가치개념으로 등장했다. 진보란 말은 애초 ‘과학기술을 이용한 인간 삶의 개선’(특히 질병으로부터 해방 등)을 가리켰지만 점차 ‘사회적 진화’(social evolution)의 개념으로 확장되다가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아래 불평등과 모순을 극복하는 정치적 실천 혹은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의 진보는 이보다 훨씬 오래된 계보를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Politika)에서 사람은 폴리스의 정치적 삶을 통해 인간본성(innate)을 발현하면서 최종적으로 행복(eudaimonia)의 상태, 즉 자아실현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도시의 진보는 단순한 불평등과 억압의 해방을 넘어 욕구 실현의 최종 단계인 자아실현으로 가늠되는 것이다.

이후 역사는 도시의 발전과 반비례하여 도시가 사람이 꿈꾸었던 것과 다르게 자유 대신 구속, 개방 대신 갇힘, 평등 대신 불평등, 편익 대신 비용 등과 같은 역설의 삶을 강제해왔다. 이는 물질적, 제도적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믿어지는 현대도시에서도 경험되는 바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었지만, 도시가 발전할수록 사람은 도시의 주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이를 우리는 ‘도시의 역설’이라 부른다. 도시의 역설은 도시를 다시 사람 중심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필요성과 당위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도시를 사람의 온전한 삶을 돕고 담아내기 위한 터전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는 사실 인류의 역사 동안 계속되어온 바다. 실제 역사상의 많은 (신)도시는 나름대로의 유토피아 꿈을 구현하기 위한 의도로 건조되기도 했다. 그리스의 폴리스, 로마시대의 공화도시, 토머스 모어 부류의 유토피아 이상을 실현하려는 공동체도시, 자치사회주의의 기원이 된 코뮌도시, 에버니저 하워드(Ebenezer Howard)의 ‘전원도시론’에서 비롯된 근대도시계획과 도시운동 등은 모두가 도시를 통한 진보를 모색하는 시도다.

발전할수록 사람이 밀려나는 역설 속
‘사람 중심’ 강조하는 진보도시론 각광

시민사회 원리 적용하고 관료화 벗어야
의제도 성장·개발에서 복지·분배로

‘진보도시 만들기’는 포용성, 주민참여
약자 중심 배분, 공동체 구축도 필요

근대에 들어 진보도시 만들기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자치사회주의(municipal socialism)란 자치제도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진보도시’(progressive city)란 용어가 본격 사용된 것은 1890년대 말 1900년대 초, 이른바 도금의 시대(Gilded Age) 미국에서다. 도시의 불평등, 불공정한 배분, 약자의 배제, 부동산 중심의 개발, 성장연합 중심의 도시정책 등에 대한 진보적 자치세력들의 반발에서 시작한 진보도시 만들기가 미국의 오랜 지방자치 역사다. 현재, 진보도시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미국의 대표 도시로는 뉴욕을 꼽을 수 있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뉴욕을 ‘모든 사람을 위한 도시’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복지, 의료, 주택, 일자리, 환경관리 등 모든 측면에서 정치적, 제도적 경직성 때문에 하지 못하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보란 듯이 추진하겠다고 하면서, 그러한 뉴욕을 진보도시라 스스로 불렀다. 현재 미국에는 300여개의 진보적 지자체 연합체인 ‘로컬 프로그레시브’가 결성되어 있다.

미국의 벌링턴, 오클랜드, 보스턴, 시카고 등을 대상으로 1970, 80년대 진보도시 만들기 사례를 분석한 피에르 클라벨 교수는 그의 저서 <시청에 들어간 활동가>에서 진보도시의 필요조건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시장(mayor)의 사회운동 기반. 둘째, 도시정부의 분배적 역할 비전 및 혁신정책의 추진. 셋째, 도시사회 계층(특히 빈곤층과 유색인)을 광범위하게 대표할 수 있도록 시정부의 개방을 위한 개혁. 넷째, 시장 임기를 넘어서는 자치혁신의 지속. 다섯째, 시정부와 지역사회의 이니셔티브를 서로 수용하는 관계의 제도화 등이다.

미국의 진보도시 만들기 경험을 반추해보면, 시정 운영이 국가나 시장 원리가 아닌 시민사회적 원리에 우선 기반해야 한다. 즉, 관료적 자치나 시장 중심의 정책운용 틀을 벗어나 근린사회의 주체들이 시정에 참여하면서 반성장연합, 반부동산개발, 반신자유주의 세력을 형성하여 정책의제의 중심을 성장과 개발에서 복지와 분배로 바꾸어 도시 약자의 이익을 우선 보호하며, 나아가 시민의 ‘도시에 대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근린사회를 기반으로 한 자치혁신을 통한 ‘도시의 진보’는 현재의 지배적 시스템에 의해 배제되거나 억압된 사람·가치·부문·세력을 대변하고 옹호하되 혁신정책의 추진을 통해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도시의 진보는 국가나 사회 전체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구조적 원인’의 해결보다 시스템 작용의 (모순적) 결과로 나타나는 일상의 문제를 생활현장과 장소에서 주민 주도적으로, 점진적으로, 실효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모색된다. 이러한 도시 진보는 이데올로기 대결이나 자본주의의 급진적 대안에 매몰되기보다, 현 시스템이나 구조(국가시스템 혹은 시장제도)의 모순에 대한 도시주체들의 해석으로부터 도출된 ‘상황적 이슈’를 실용적으로 해결하는 데 역점을 둔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진보도시 만들기는 ‘자유주의 혹은 실용주의’로 평가받고 있다. 말하자면, 진보의 초월적, 보편적 가치를 현실의 상황적 가치로 어떻게 해석해서 도출해 실천하느냐의 문제로 이해되는 미국식 진보주의의 모색이 진보도시 만들기의 이념이라면 이념이다.

조명래/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 교수
진보도시 만들기는 진보의 보편적, 초절적 가치요소(자아실현, 해방, 정의, 권리, 분배 등)를 도시 맥락에서 해석해 도출한 상황적 가치요소(참여, 행복, 협력, 인권, 복지 등)로 정의하고 현실의 제도적 과정을 통해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로 접근된다. 따라서 진보도시는 해석투쟁을 통한 도시 만들기의 ‘과정’(progress)이란 의미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취하는 진보도시의 ‘이상’(outcome)이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후자가 목표 개념이라면, 전자는 실천(조직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요소를 함께 묶어 마이클 더글러스 교수는 진보도시를 구성하는 4대 요소를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도시의 ‘포용성’으로서 시정에 대한 주민참여, 거버넌스, 시민주도성과 관련된다. 둘째는 ‘분배정의’로서 약자를 위한 자원의 배분과 대안경제로서 사회경제 혹은 공동체 구축과 관련된다. 셋째는 ‘도시의 상열’(conviviality)로서 행복, 자아실현, 정체성의 구현과 같은 요소를 도시 발전의 궁극 목표로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다. 넷째는 ‘생태적 번영’으로서 지구온난화 시대 인간 생존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도시 차원의 인간-자연 공생체제 구축과 관련된다.

조명래/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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