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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17 10:34 수정 : 2016.06.17 10:39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10. 비정규직

노조 조직률 2%대에 그치고
고용보험 가입률 고작 66.7%
해고되면 친지에게 생존 의탁
비정규직 고통은 가족의 책임

승자 몫 아닌 ‘집단 권리’ 중요
사회 가치를 이윤에서 권리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정비 직원이 숨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6일 오후 추모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스크린도어(안전문)를 수리하던 열아홉살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인원이 부족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안전매뉴얼은 종이쪼가리였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절차는 노동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비용’으로 취급되고 존중과 권리가 사라진 시대이다. 국민소득 3만달러 운운하는 나라에서 월 200만원 이하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절반이나 되고, 일을 하다가 죽는 이들이 1년에 2천명이나 된다면 이것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는가. 지금 사회는 노동자의 권리가 사라진 ‘비정규 사회’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었다.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기에 이 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권리로부터 배제된 것이 바로 ‘비정규직’이다. 기업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비정규직을 활용했지만 그때만 해도 대다수 시민들은 비정규직을 예외적이고 지속되어서는 안 될 고용형태로 간주했다. 그런데 정부는 1998년 파견법, 2007년 기간제법을 시행함으로써 마치 비정규직이 정상적 고용형태인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노동유연화는 세계적인 추세’라고 주장하면서 그 본질이 노동자의 권리 배제라는 점을 감추고자 했다.

비정규직 제도가 허용된 뒤 기업들은 신규채용을 줄이고 상시업무에 비정규직을 늘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권리를 주장하기 매우 어렵다. 기업 안에서 노동자는 약자인데, 언제라도 해고될 수 있다는 점은 비정규직을 더 약자로 만든다. 지난해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규직 임금의 65.5%로 매우 낮은데, 그것은 정규직 임금이 높아서가 아니라 비정규직 임금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차별시정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시정을 신청할 경우 재계약되지 않기에 그 제도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차별은 ‘비정규직’이라는 현실로부터 나온다.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회사에 순응하게 되고, 기업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안전장치 대신 위험 업무를 비정규직들에게 떠넘기고, 성희롱과 인격적 모욕, 폭언과 폭행, 가학적 노무관리로 선회한다. 이로써 일터는 무권리의 공간이 된다. 집단적 힘으로 이런 현실을 바꾸고자 해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기 어렵다. 계약직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순간 재계약이 안 될 수도 있으니 쉽게 나서지 못한다. 하청노동자들은 어렵게 노동조합을 만들어도 진짜 사장인 원청이 법적으로 사용자 책임을 지지 않으니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청 사용주는 하청업체 폐업 등 부당노동행위도 마음대로 저지른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2%대에 머물고 있다.

단지 일터에서만 권리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장시간을 일하게 된다. 한국의 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긴 것은 저임금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를 피폐하게 만들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문화생활을 누리고 정치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로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 고용형태가 복잡해지면 책임주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불만이 있어도 누구를 향해 불만을 이야기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 때로는 그것이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만이 되어 사회적 불안으로 전이된다 .

비정규직 확산으로 기업은 비용을 절감하는 것 같지만 그 비용은 누군가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66.7%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해고될 경우 친지에게 생계를 의탁하게 된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희생된 노동자들의 고통을 가족이 떠맡는다. 2013년 서울 성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노동자는 단순 변사로 처리되었고, 하청업체인 은성피에스디(PSD)만 3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이후 구의역 참사를 통해 스크린도어 수리 노동자 사망의 책임이 서울메트로에 있음이 밝혀졌지만 그때 당시 원청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기업이 아낀 비용은 노동자들의 죽음값이었던 셈이다. ‘비용’ 때문에 노동자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서울메트로가 승객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리는 없다. 노동자의 위험은 승객의 위험으로 전이된다.

서울 지하철2호선 구의역 안전문(스크린도어)을 고치다 사고로 숨진 김아무개씨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져 3일 시민들이 구의역 승강장에서 헌화하고 추모글을 적어 붙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금 노동은 고역이다. 경쟁사회는 계급사회가 되었고, 개인의 노력과 정진은 보상받지 못한다. 협업은 깨져 있고 노동자는 위계화되어 자존감을 잃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삶은 황폐해진다. 이런 사회에 어떤 미래가 있는가?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나라는 이미 가치가 없다. 기업과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이 마치 정규직 노동자들의 책임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도 하락하고 있다. 대기업의 ‘나홀로 성장’이 사회 전체를 고통에 빠뜨린다.

이제 우리 사회의 가치를 ‘이윤’에서 ‘권리’로 바꾸어야 한다. 노동자라면 어떤 권리를 누려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권리는 ‘누군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가 중요한 일을 하는지 아닌지, 핵심업무인지 아닌지에 따라 노동자를 나누고 차별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필요한 일’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이다. 필요한 일을 하는 모든 이들은 차별 없이 정당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사회적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권리는 경쟁을 통해 승리한 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하는 자 모두의 집단적 권리여야 한다.

일하는 이들은 생활 가능한 임금을 받아야 하며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함부로 해고되어서는 안 된다.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고, 유해·위험 업무에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일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생존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고용보험이 확대되고 실업부조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데 집단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경영에 노동자와 시민사회가 참여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노동이 다른 이들과의 협업이 되고 노동자의 능력을 온전히 발현하며, 미래의 비전을 갖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이 사회는 더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모두가 정규직인 세상으로 협소해질 수 없다. 정규직이 되었다고 권리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은 모든 이의 노동이 존중되고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를 만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하면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나 ‘발전’ 여부가 아니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가치를 재구성해보자는 것이다.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면 어떤 비용을 절감하고 어떤 제도를 만들어서 이 가치를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의 지배력이 전 사회에 미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은 경쟁과 차별과 배제에 익숙해져 있으며 절망감도 크다. 하지만 구의역에서 사망한 스크린도어 수리 노동자를 추모하며 많은 이들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렇다. 잘못은 이 사회가 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고 사회의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모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작은 실천들이 한순간의 추모를 넘어 지속적인 실천이 될 때, 그리고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낙관과 용기가 필요하다.

김혜진/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서울 지하철2호선 구의역 안전문(스크린도어)을 고치다 사고로 숨진 김아무개씨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져 3일 시민들이 구의역 승강장에서 헌화하고 추모글을 적어 붙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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