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12)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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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 문제는 그것이 왜 지역의 생존에 직결된 문제인지, 주민들의 삶에 어떤 근본적 변화를 낳게 될지 등 지역의 관점에선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 15일 경북 성주군청에 모인 주민들이 사드 배치 관련 설명차 방문한 황교안 국무총리 등에게 물병을 던지자 경호원과 경찰이 이를 막고 있는 장면. 성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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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출신 미국 문학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미국인들이 미국 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정부가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보다는 야구, 농구와 같은 스포츠에 훨씬 더 정통하다고 말한다. 다소 농담 섞인 얘기겠지만 여기서 사이드가 비판하고자 한 점은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중심의 맹목적 무지’, 즉 그들에게 세계란 곧 ‘미국’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미국보다 훨씬 작은 대한민국에서도 세계는 서울과 서울 아닌 것으로 나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에선 서울 바깥의 지역이 모두 ‘지방’으로 불린다. 그리고 지방은 근대적 발전에서 뒤처진 후진성, 문화적 역동성에 대립하는 편협성, 보편적 문화에 반하는 특수적인 주변성의 장으로 인식된다. 정치, 경제, 행정, 교육, 문화 등 거의 전 분야에서 서울 및 수도권 집중 현상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 이런 인식은 더욱더 고착되고 있다. 강준만은 오늘날 서울과 지방 간 사회문화적 격차가 일제강점기의 동경과 경성 간 관계와 너무나 비슷해 깜짝 놀랄 지경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 지역 문제는 중앙과의 노골적 대립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한 잘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설령 드러난다 하더라도 지역의 주장들은 소외와 패배감에서 생긴 지역적 불만, 혹은 뒤틀린 지역감정 정도로 폄훼되기 쉽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담론적 대화와 재현의 차원에서 지역이 중앙과의 관계에서 늘 불리한 입장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사드 배치 문제도 그것이 왜 지역의 생존에 직결된 문제인지, 그것이 지역의 삶에 어떤 근본적 변화를 낳게 될지 하는 지역의 관점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지역 사람의 생존과 고뇌는 국가주의적 전략에 묻혀버리거나 중앙의 미디어시스템을 통해 사라지고 만다. 지역은 항상 계도와 설득의 대상일 뿐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법적, 형식적 주권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우리가 어디에 살든 우리 삶의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고 있는가,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달렸다. 그렇게 보면 지역에서 민주주의 실현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역으로 지역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나라, 즉 한국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왜 그럴까? 지역 문제의 근원에 한국 사회의 반민주적 모순구조, 즉 지역에서의 삶의 자율성을 침해하면서 지역 간 격차를 재생산하고 이용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구조는 지역 차원에서의 정치의식과 민주주의의 성숙을 차단하고 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하여 지역주의를 만들어진 현실로 보려는 견해와 지역모순을 강조하면서 특정 지역의 신성화에 맞서 세속화를 주장하는 견해 등 지역에 대한 본격적 논의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논의들에서 지역감정을 정치주의적 입장에서 이해하거나 한국 사회에서 ‘지역’이라는 조건이 갖는 공통적 이해는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지역감정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존재와 구조의 상호작용 속에서 주체의 아비투스가 형성되듯이, 감정은 모호해 보여도 구조 속에서 인간이 감각적으로 형성한 결정체다. 감정을 이해하려면 구조적 조건을 볼 필요가 있다. 지역문제의 발생 원인을 역사적으로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찾으려는 시도들도 있지만 보다 가까운 과거, 즉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와 그것이 추구한 경제개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영향이 우리 자신에게 더 직접적이기 때문에 지역감정의 분석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한국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그 내부에까지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부산의 경우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역사상 최고의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농촌에서 이주해 온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부산 경제는 높은 생산증가율과 부가가치를 통해 급속한 발전과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 시기에 부산으로의 인구 유입도 서울 다음으로 급증하여 연평균 7%를 넘는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부산은 해방 후 인구 40만명, 한국전쟁기 88만명, 65년 150만명, 72년 200만명, 75년에는 250만명에 이르는 거대도시로 성장한다. 이 시기 부산의 제조업 부가가치는 전국비중 22.3%를 기록하는 등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런 유례없는 압축성장의 이면에 독특한 정치경제적 현상이 동시에 일어났다. 지역은 성장 과정에서 중앙으로 급속하게 통합되어가는, 즉 성장과 종속의 이중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되면서 지역들 또한 국가 주도 경제개발에 의해 특성화 중심으로 편성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결과 기획, 설계, 관리, 경영 등의 행정관리 및 계획 기능은 수도권에 집중되는 데 반해, 지역은 중앙의 기획과 통제 아래 실행만 담당하는 특정 산업 중심의 생산지 혹은 원료공급지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이런 성장 속의 종속, 이른바 ‘발전적 종속’으로 인해 지역은 자율적 재생산 구조를 잃고 외부로부터 강제된 특화된 기능만 떠맡게 된다.
서울 바깥 모든 지역은 ‘지방’이라며
지역 주장은 뒤틀린 감정으로 폄훼
사드 배치도 지역관점 접근은 태부족
국가주의적 전략 묻히거나 비난받아
성장과 종속 이중과정 겪은 ‘지역감정’
지역간 연대 강화하는 생태계 필요해
사실 이와 같은 과정이 제대로 의식되지 못했던 것은 종속 과정 자체가 곧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발전 속에 있었기에 종속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성장 속 종속에서 성장이 멈춘 후는 어떻게 될까? 특성화된 지역경제로 인해 지역은 지속적으로 경기부침 현상을 겪게 되고, 국가의 혜택을 둘러싼 지역 간 경쟁과 갈등은 더욱 치열해진다. 치열한 경쟁과 지속적인 위기 때문에 지역 내에 개발과 발전을 열망하는 근대주의적 욕망은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과의 경쟁의식 때문에 타 지역에 대한 선망과 원망이 뒤섞인 독특한 감정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지역에선 박탈된 기회가 다른 지역에 더 많이 주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즉 다른 지역이 더 많은 혜택을 누린다고 상상하는 욕망이 구성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지역들은 공생과 연대가 아니라 경쟁의 관계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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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10일 충북 영동군 상촌면 삼도봉 정상(해발 1176m)에서 무용가 조희열씨 등이 세 도의 화합을 기원하는 춤을 추고 있다. 삼도봉은 충북·경북·전북 세 도가 나뉘는 시작점으로, 주민들은 지역감정을 털어내고 우정과 화합을 다지는 뜻에서 행사를 해왔다. 영동/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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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지역감정은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근대주의적 산물이다. 지역감정은 선거 승리를 위해 정치가들이 이용하려고 만든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실제 지역정치가들이 이용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양가적 지역감정이다. 어느 순간부터 지역에서 위대한 정치란 지역감정의 형성 조건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시민들과 함께 지역의 자율적 삶을 튼튼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중앙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획득해왔다고 떠들어대는 정치가 된 것이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지역감정은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다. 최근 신공항 유치를 두고 영남권 내부에서 벌어진 지역갈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거의 모든 지역의 경제적 전망은 암담한 상황이다. 경남이든 경북이든 부산이든 대구든 부실기업의 퇴출과 기존 특화된 산업의 급격한 쇠락을 겪으면서 인재들이 대거 빠져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신공항 유치는 두 지역 모두가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블루오션이었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이런 구조 때문에 보수와 진보 사이를 끊임없이 동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이다. 자율성을 상실한 지역주의란 선망이 현실이 될 때 보수적이 되었다가 원망이 쌓일 때 진보적이 되는 역설적 이중성을 띠게 된다.
지역문제는 결코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의 실현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가 될 수 있다. 지역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한국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 또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중심/주변의 불평등한 구조와 그로 인해 만들어진 지역감정을 해체하고 지역적 삶 자체의 자율성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한국처럼 정치경제가 중앙집중화된 구조에선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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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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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또한 동질화되고 획일화된다. 이런 구조에선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문화가 탄생할 수 없다. 다양한 문화들이 가로지르고 섞이고 융합하는 문화적 생태계 속에서 새로운 문화는 형성될 수 있다. 단순히 권리를 분점하는 지방분권을 넘어서 지역문화와 삶의 자율성과 민주화를 촉진하고 지역 간 연대를 강화하는 문화생태계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지역 민주주의 없이 한국의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다.
김용규/부산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이 기획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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