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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04 19:50 수정 : 2016.08.04 20:05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13) 여성·인권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대표와 회원 등이 지난 5월2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추모 참여자에 대한 인권침해에 공동대응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 시리즈의 주제는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다. 청탁을 받은 순간, 목에 탁 걸린 말이 ‘우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누굴까? 나는 과연 ‘우리’에 포함될까? 정권과 불화하는 인권운동을 하고, 비혼에, 중년에, 돈도 없다. ‘포함’되는 데 걸릴 목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항목들은 주류 질서와 다른 대안을 구상할 수 있는 자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점도 다른 삶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

대개 사람들이 대놓고 반대 못 하는 보편적 인권관에 따르면,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는 사상, 나이, 경제력, 성별, 지역, 출신 등에 상관없이 대한민국이란 정치공동체와 관계 맺는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치 있는 존재이며 누구나 그런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정치공동체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제1 과제로 삼아야 한다.’ 아직 충분히 실현되지 않은 이 선언은 그러나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실천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이며 인권의 존재 의의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누구라도 대놓고 공식적으로 ‘인권’을 부인하거나 반대하진 못할 것이다. ‘인권’이 명목상이나마 받들어지는 세상에서 권리를 요구하는 건 결코 구차한 일이 아니며,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해달라’는 요구도 비참함이란 양념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금언처럼 말이다. 더욱이, 가장 불리하거나 취약한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이야말로 인권의 실천윤리이다.

그러나 무난하게 ‘인권’을 옹호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가령 뿌리 깊은 모순임에도 요즘 새삼 불거진 듯 보이는 ‘여성 혐오’와 관련된 논란에서처럼 권리나 존엄을 부르짖는 사람이 여성이라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말할 때 폭력을 우려하거나 구차한 감정을 느끼는 등 상당히 혼란스러운 논란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부러 궁상떠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여성의 권리 상황이 실제로 나쁜데도 그런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여성의 열악한 경제적·사회적 지위, 긴 그림자를 드리운 성차별의 역사,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들을 아무리 얘기해도 ‘그것으론 부족하다’거나 ‘사실이 아니다’라는 의심과 부인에 맞닥뜨리는 수가 많다. ‘설명’을 요구하는 일이 너무 많아지는 것이다. 흔히 인권침해를 부인할 때 나타나는 공통된 형태들이 있다. 엄연한 인권침해를 없는 듯 취급하기,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 그리고 간혹 인권침해의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기이다. 하나같이 여성인권침해를 부인하는 현상에 들어맞는다. 이런 ‘부인’에 동원되는 흔한 말이 ‘안 그런 여성(남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드러난 사회적 사실들을 덮으려 할 뿐 아니라 구조적 모순에서 개인적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 상당수다. 인권침해는 개별적인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배후에 뿌리 깊은 역사와 맥락과 조건을 포함한다. 물론 문제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개인이 더 많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안 그런 개인’을 굳이 ‘여성’ 또는 ‘남성’으로 호출하고야 마는 것이 성차별이다.

지난 5월2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여성단체들이 연 기자회견.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추모 참여자에 대한 인권침해에 공동대응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여성이 권리를 주장할 때 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인색한 것이 현실이다. ‘인권은 공감을 발동으로, 연대를 동력으로 움직인다’고들 한다. ‘공감’은 불의한 일에 대한 공분을 포함한다. ‘생명, 자유, 안전’은 모든 인권규범의 앞머리에 나오는 인권 중의 인권이다. 국제인권규범에서는 ‘절대불가침’의 인권이라 표현한다. 이걸 위협당하면 정말 ‘긴급’한 것이고, 이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공분이 일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그런 ‘공분의 역량’이 있다는 게 인권의 믿음이다. 특히 생명과 신체적 안전의 유린, 일상을 위협하는 폭력 등에 대한 타전에는 즉각 응답해야 한다. 응답의 내용은 당연히 고통의 해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꾸물거리며 즉답을 안 할뿐더러 조롱과 더 위협적인 공포를 조성해 응대하는 일이 벌어져왔다.

사실 인권의 역사에서 완벽하게 준비된 ‘순결한 피해자’ 같은 건 없었다. 피해자를 되레 악마화하고 사회악이나 불순물로 왜곡·폄하하는 때가 많았다. 이에 맞선 ‘공분의 감수성’과 ‘인간 평등 사상’이 인권 진보의 동력이었다. 동등한 가치의 존엄한 인간에게 가해지는 비난, 모욕, 위협, 공격을 막아내며 부당한 고통을 허용하지 못하도록 함께 맞서는 일이었다.

인권침해를 부인할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또 하나가, 피해자가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호소는 받아주되 권리를 요구할 때 불편해하거나 괘씸해하는 반응이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베푸는 ‘특전’은 수혜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언제든 시혜자가 철회하거나 훼손해 사달이 날 수 있는 것이다. 인권 투쟁의 소중함은 더 많은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거나 법·제도 등을 바꾸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법·제도의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성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중’과 ‘자력화’이다. 내가 ‘주체’임을 자각하고 요구할 줄 아는 것과 우월한 위치에서 베푸는 것, 이것이 권리와 시혜의 핵심적인 차이다. 아무리 힘이 약해도 아무리 열악한 처지에 있어도 인간으로서 당당히 요구할 자격이 나에게 있다는 권리 의식에 눈뜬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호의는 베풀 수 있어도 권리는 인정하기 싫은 이들은 그런 ‘자력화’를 제일 두려워한다.

혐오란 일종의 두려움에서 생긴다. 위계에서의 우월함을 잃고 기존에 누리던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될까봐 상대방의 자력화를 방해할 때도 혐오를 이용하게 된다. 피억압자의 요구가 정당하고 강력할 때, 억압 세력은 호의와 아량으로 매듭짓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력화’를 요구하는 쪽에서는 자신의 역량으로 실현할 수 있는 권리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참을 수가 없다. 그런 강요는 겉보기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체계 및 관계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자력화된 사람들은 지금 상태에서 나눠 갖기가 아니라 배분을 결정하는 권력 자체를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다.

‘보편 권리’ 외칠 때도 난처한 ‘여성’
인권침해 부인하는 의심 시달리기도
차별적 권력 깨닫는 ‘공통 감각’ 필요

예를 들면, 사회운동에서도 여성의 감정노동이 요구되고 전가된다. 대개의 삶이 힘든 상황이듯 운동사회의 조건도 정말 ‘빡세다’. 모자란 자원을 쥐어짜며 ‘희생과 도덕성, 대의명분에 대한 헌신, 선도적인 활동에 대한 자부심’ 등을 강조하지만, 비판에는 취약하다. 고귀한 무언가에 ‘흠집’이나 ‘훼손’을 낸다며 반응하기 쉽다. ‘안 그래도 힘든데 너(너희들)마저 이럴 거야?’ ‘우리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거야?’ ‘다른 말’을 들을 여유가 없다. 대표적인 ‘다른 말’은 운동 사회 내의 위계와 성 역할에 대한 지적이다. 사람 사이에도 위계가 있지만, 고통과 그 고통을 의제화하는 데도 위계가 있다. ‘누구나’ 힘들다는 말로 ‘더’ 힘든 누군가의 고통을 침묵시키려 든다. ‘누구나’의 고통을 위로한 다음에야 ‘다른’ 성격의 고통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누구나’는 흔히 억압받는 민중 등으로 표현된다. ‘다른’ 고통을 말하는 쪽은 위로의 노동을 하고 나서야 자기 고충을 말할 자격을 얻을 수 있고, 운동 내부의 권력관계에 저항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하고 상대방을 살피는 감정노동을 계속해야 한다. ‘사소한’ 일로 ‘중대한’ 투쟁에 발목 잡는다고 눈치받고 미움받는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

사회 운동은 기업제일주의나 공권력의 전횡,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낙수 효과, 소위 사회평균치를 극대화한다는 선전 등에 맞서왔다. 이른바 ‘여론’으로 포장된 공격들, 가령 ‘이제 그만해라’ ‘발목 잡는다’ ‘피곤하다’는 소리에 주눅 들지 않고 저항을 계속해왔다. 내부로 눈을 돌려보자. 같은 내용의 말을 누가 주로 들어왔는지. 성차별주의와 관행을 비판하는 소리는 여기에 덧붙여 ‘운동 망친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 질문의 폐쇄, 선제 방어, 어정쩡한 사후 수습, 어느 것도 ‘진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 존엄성 침해의 근본 원인인 심층적 조건과 환경을 다루고 맞서는 것이 진보라 한다. 근본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깊게 나눠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나가자!”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쓰인 대사라 한다. 마찬가지 말을 하고 싶다. 차별하는 구조가 아니라 차별받는 사람이랑 싸우는, ‘여기서’ 나가자. ‘우리’가 공통감각과 공분으로 맞서야 할 불의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 ‘우리’를 재구성하는 일 자체를 외면할 때 도대체 어떤 우리가 어떤 불의를 대면할 수 있을까.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 이 기획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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