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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8 19:26 수정 : 2016.08.18 20:31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연재를 마무리하며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을의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면, 이런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과제는 갑과 을 사이에 존재하는 강고한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지배구조를 지탱·확산하는 매개체로서 을들 사이의 반목적 갈등 관계를 어떻게 화쟁의 연대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진은 지난 3월26일 서울역광장. ‘5차 민중총궐기, 2016 총선투쟁 승리 범국민대회’에 모인 사람들이 노동개악 중단, 민중생존권 보장, 국가폭력 규탄 등을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하 ‘민연’으로 약칭)과 한겨레신문이 지난 1월22일 시작한 공동 기획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연재가 이 글로써 일단락된다. 이는 물론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기획의 종결이 아니라, 그 기획의 좀 더 심화된 구체적인 진전을 위해 한 가지 매듭을 짓는 것을 뜻한다.

연재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주요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해 있는 위기의 핵심에 관해 짚어주었고, 또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여러 가지 해법을 제안해주었다. 이번 연재에 수록된 글들을 숙독한다면,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점이 무엇이고 또 이에 대해 어떤 대응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가에 관해 풍부하고 유익한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을(乙)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제기해보고 싶다. 우선 연재된 글들에서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면 첫째, 연재에 참여한 필자들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가 일시적이거나 표층적인 현상이 아니라, 개항 이후 또는 적어도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누적된 문제점들이 중층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 복지 체계의 결여, 정치적 갈등 구조의 왜곡, 종속적인 한-미 관계와 연동된 적대적인 남북 관계, 사회적 관계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성, 국가 폭력과 대기업 지배 사회, 이윤 중심의 도시 질서, 패거리들끼리의 쟁투로 전락한 정치, 노동자를 일회용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비정규직 체제, 반민주적 사회 질서의 거울로서 서울-지방 관계, 여성 혐오에서 표출되는 한국 사회의 반인권적 현실 등은 모두 뿌리 깊고 다면적인 지배 구조의 표현들이다.

둘째, 따라서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법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와 개조를 지향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아울러 필자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개조의 방향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나 정책적 대안 마련 이전에 아래로부터의 주체적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는 인식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기성세대와 다른 젊은 세대에 대한 호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약자들의 사회력에 기반을 둔 연성권력,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모색, 국가 및 재벌 권력을 민주적으로 규율해야 할 필요성, 시민의 도시에 대한 권리의 실현, 노동자들의 연대에 기초를 둔 우리 사회의 가치 재구성, 인권에 대한 공감력의 증대 같은 요구로 나타나고 있다.

셋째, 이 연재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연재에 참여한 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공통적인 지향 이외에도,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선 상이한 주제에서 생겨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라는 주제로 접근하는 필자와 여성·인권의 문제를 생각하는 필자, 서울-지방 관계에 주목하는 필자가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상이한 진단을 내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차이는 또한 정치적 관점의 차이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사회주의를 새롭게 정치의 지평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는 관점과 사회력에 기반을 둔 연성 정치를 추구하는 관점, 통치 개념에 입각하여 시민사회와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입장, 그리고 화쟁의 정치를 요구하는 관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차이점들을 최소화하거나 부인하기보다 이것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형성될 수 있는지,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구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사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조건을 고려할 때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체인 ‘우리’는 다원적이고 갈등적인 우리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는 이러한 갈등적인 복합체로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바로 이러한 현실적 조건에서 출발한다.

모욕·착취·부당하게 취급당한
‘을들’이 ‘을’이란 말에 의미 부여

민주주의 사회 왜곡·훼손 심각
현대 철학 개념으론 ‘내적 배제’

‘을들의 투쟁’…구호로 해결 안돼
반목적 갈등 ‘화쟁’으로 전환해야

계약 관계에서 두 당사자 중 하나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갑, 을, 병, 정 등과 같은 순서를 표현하던 용어였던 을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을’이라는 용어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 학자나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갑에 의해 모욕당하고, 착취당하고,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익명의 을들이 스스로 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불공정한 질서를 고발하기 위해 창안해낸 말이다. 따라서 을이라는 이 용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모순을 이해하고 개념화하기 위한 적절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을이라는 이 새로운 사회적 용어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을이라는 말은 이 사회에는 동료 시민들에게 지배되거나 모욕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더욱이 그들이 다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을이라는 말이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을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춰 보면, 이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민주주의적 사회가 아니든가 아니면 적어도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왜곡되거나 훼손된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현대 철학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을은 ‘내적 배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배제라는 개념이 뜻하는 것은 어떤 공동체 내부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하지만 또한 그 공동체 바깥으로 완전히 배제되지도 않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 존재하되 그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집단, 곧 때로는 개돼지로 희화화되는 ‘이등 국민’, 이등 시민이 바로 내적 배제의 대상이다. 을이라는 말보다 이러한 내적 배제 개념을 우리말로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둘째, 갑에 의해 억압되고 착취받고 무시당함에도 불구하고, 을들은 단일하거나 동질적인 집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에는 또 다른 불평등 및 지배 관계가 존재한다. 을 아래에는 병(丙)이 있고, 병 아래에는 정(丁)이 있으며, 을은 자신이 갑에게 당하는 것 못지않게 병 위에 군림하며, 병은 또 다른 자신의 을들을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투쟁은 20 대 80이나 1 대 99, 또는 갑과 을 사이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을들 사이의 투쟁으로도 나타난다. 그것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갈등이고, 동료 노동자들 간의 투쟁이며, 남성과 여성 간의 투쟁이고, 서울 사람과 지방 사람의 반목이다. 조세희의 표현을 빌린다면 ‘난장이들 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구성해야 하는 주체가 사회적 약자들, 다수의 을이라면, 이러한 주체는 매우 문제적인 주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을들 사이에는 선험적인 연대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함께 연대합시다!’, ‘민중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통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 해소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령 복지국가의 건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때로는 여성 혐오의 주체일 수 있으며,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할 수 있다. 또는 비정규직 철폐에 앞장서는 사람이 종속적인 한-미 관계에 대해서는 맹목적일 수도 있으며, 진보 도시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서울과 지방 사이의 지배 관계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을의 민주주의, 을이 주체가 되는 정치 공동체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과제는 갑과 을 사이에 존재하는 강고한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지배구조를 지탱하고 또한 확산하는 매개체로서 을들 사이의 반목적 갈등 관계를 어떻게 화쟁의 연대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진태원/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을의 민주주의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을이 지배자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주인이 아닌(따라서 또 다른 하인이나 노예를 전제하지 않는)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여부다. 이러한 을의 민주주의는, 빈민을 빈민이 아니라 ‘데모스’(Demos, 민중)나 시민으로 만들어주며, 재벌이나 대통령, 국회의원도 하나의 데모스로, 시민으로 만들어주는 그러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가 더 이상 ‘그들의 국가’, 치안 기계인 국가로 작동하지 않게 하려면 이러한 을들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끝)

진태원/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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