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연재를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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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을의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면, 이런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과제는 갑과 을 사이에 존재하는 강고한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지배구조를 지탱·확산하는 매개체로서 을들 사이의 반목적 갈등 관계를 어떻게 화쟁의 연대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진은 지난 3월26일 서울역광장. ‘5차 민중총궐기, 2016 총선투쟁 승리 범국민대회’에 모인 사람들이 노동개악 중단, 민중생존권 보장, 국가폭력 규탄 등을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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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들’이 ‘을’이란 말에 의미 부여 민주주의 사회 왜곡·훼손 심각
현대 철학 개념으론 ‘내적 배제’ ‘을들의 투쟁’…구호로 해결 안돼
반목적 갈등 ‘화쟁’으로 전환해야 계약 관계에서 두 당사자 중 하나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갑, 을, 병, 정 등과 같은 순서를 표현하던 용어였던 을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을’이라는 용어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 학자나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갑에 의해 모욕당하고, 착취당하고,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익명의 을들이 스스로 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불공정한 질서를 고발하기 위해 창안해낸 말이다. 따라서 을이라는 이 용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모순을 이해하고 개념화하기 위한 적절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을이라는 이 새로운 사회적 용어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을이라는 말은 이 사회에는 동료 시민들에게 지배되거나 모욕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더욱이 그들이 다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을이라는 말이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을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춰 보면, 이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민주주의적 사회가 아니든가 아니면 적어도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왜곡되거나 훼손된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현대 철학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을은 ‘내적 배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배제라는 개념이 뜻하는 것은 어떤 공동체 내부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하지만 또한 그 공동체 바깥으로 완전히 배제되지도 않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 존재하되 그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집단, 곧 때로는 개돼지로 희화화되는 ‘이등 국민’, 이등 시민이 바로 내적 배제의 대상이다. 을이라는 말보다 이러한 내적 배제 개념을 우리말로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둘째, 갑에 의해 억압되고 착취받고 무시당함에도 불구하고, 을들은 단일하거나 동질적인 집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에는 또 다른 불평등 및 지배 관계가 존재한다. 을 아래에는 병(丙)이 있고, 병 아래에는 정(丁)이 있으며, 을은 자신이 갑에게 당하는 것 못지않게 병 위에 군림하며, 병은 또 다른 자신의 을들을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투쟁은 20 대 80이나 1 대 99, 또는 갑과 을 사이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을들 사이의 투쟁으로도 나타난다. 그것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갈등이고, 동료 노동자들 간의 투쟁이며, 남성과 여성 간의 투쟁이고, 서울 사람과 지방 사람의 반목이다. 조세희의 표현을 빌린다면 ‘난장이들 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구성해야 하는 주체가 사회적 약자들, 다수의 을이라면, 이러한 주체는 매우 문제적인 주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을들 사이에는 선험적인 연대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함께 연대합시다!’, ‘민중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통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 해소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령 복지국가의 건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때로는 여성 혐오의 주체일 수 있으며,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할 수 있다. 또는 비정규직 철폐에 앞장서는 사람이 종속적인 한-미 관계에 대해서는 맹목적일 수도 있으며, 진보 도시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서울과 지방 사이의 지배 관계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을의 민주주의, 을이 주체가 되는 정치 공동체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과제는 갑과 을 사이에 존재하는 강고한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지배구조를 지탱하고 또한 확산하는 매개체로서 을들 사이의 반목적 갈등 관계를 어떻게 화쟁의 연대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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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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