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13 22:34
수정 : 2016.03.22 13:47
[심층 리포트] ‘반도체 아이들’의 눈물(하)
2003년 60건…소송 본격화 전 보상
당시 변호사 “생식독성 알았을 것”
소극적 대응 한국업체와 대조
국내 반도체 노동자의 생식독성과 2세의 건강 영향은 이제 겨우 문제가 제기된 수준이다. 삼성전자 등은 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유방암 등도 공정에서 취급하는 화학물질, 환경과 직접적 인과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도체 노동자 2세의 건강에 대한 책임 문제는 실로 머나먼 쟁점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이미 10여년 전 2세의 질병에 대한 발빠른 보상 조처가 기업 차원에서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미국의 대표적 반도체 기업이었던 아이비엠(IBM)의 ‘2세 기형아 소송’이다.
2003년 기형아를 둔 아이비엠 출신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벌였다. 뉴욕과 버몬트 소재 생산공장에서 주로 일한 노동자들이 주장한 피해 사례는 60여건이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태어난 아이들의 질병은 다양했다. 눈에 암(망막 모세포종)이 생기거나, 뇌 크기에 견줘 두개골이 지나치게 작거나, 뇌에 물이 차 있었다. 선천성 기형과 중추신경계 희귀 질환들이었다.
아이비엠은 소송이 본격화하기도 전에 보상에 나섰다. 보상액은 합의 내용에 대한 비밀유지 약속 때문에 현지 언론에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60여건의 집단소송에 앞서 이뤄졌던 단건의 기형아 소송 가액이 4000만달러(400억원가량)였다는 점을 보면, 이들 소송 건 보상액이 천문학적 수준일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임기, 임신기에 에틸렌글리콜에테르(EGE) 등의 솔벤트류 유기화합물과 크롬·카드뮴·납 등의 중금속에 노출됐다고 주장했다. 취급 물질의 유해성을 충분히 공지받지 못했다는 점도 쟁점이 되었다. 반도체 회사들이 이미 1970년대 에틸렌글리콜에테르가 2세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동물실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미 국립직업안전건강연구소도 80년대 이 물질이 생식독성을 유발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아이비엠은 이런 점들이 소송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던 셈이다. 회사가 판결 전 피해자와 합의한 이유 가운데 징벌적 손해배상을 우려한 영향도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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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반도체소녀’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 ※해당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연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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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동자들을 대리한 스티븐 필립스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미국 반도체산업협회가 회원사에 에틸렌글리콜에테르가 기형아를 유발할 수 있다고 알린 것이 1983년이었다”며 “아이비엠은 에틸렌글리콜에테르의 생식독성을 몰랐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에틸렌글리콜에테르의 유해성을 파악했으면서도 1983년부터 10여년 동안 보건안전 관리와 대체 물질을 강구하는 등의 조처를 하지 않은 책임을 인정했다는 얘기다. 공동대리인 어맨다 호스 변호사는 <한겨레>에 “기업은 물질의 안전성이 불확실할 경우 더 안전한 물질이나 공정으로 대체하거나 임신 여성을 다른 업무로 전환하는 등의 조처를 할 의무가 있다. 법원도 이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며 “아이비엠 소송 이후 지금까지 반도체 노동자 2세 기형 소송이 줄을 잇는 이유”라고 말했다. 2003년 아이비엠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 이후에도 수백 건의 유사 소송이 미국 여러 주에서 모토롤라, 인텔 등을 상대로 제기됐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등에서도 비슷한 소송이 진행중이다.
한국 반도체 사업장에선 여전히 에틸렌글리콜에테르가 사용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반도체 산업과 생식보건 사이의 인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삼성전자는 두 ‘반도체 회사’ 자녀들(건강보험 피부양자 0~19살)의 선천기형 유병률이 높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사의 임직원 40%만이 반도체 직원”이기 때문이란 논리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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