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8.11 19:23 수정 : 2016.08.11 19:54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7) 안셀무스

란프랑쿠스와 베렌가리우스, 작자 미상, 18세기, 베크 수도원 소장. 신앙과 이성을 둘러싼 논쟁을 묘사한 그림에서 신학의 편에 선 란프랑쿠스의 모습에는 후광이 빛나고, 대조적으로 변증론의 편을 든 베렌가리우스의 모습은 난쟁이처럼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이와 비슷한 논조의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엄청난 반향을 얻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가히 ‘무신론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큰 시대에 산다. 종교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은 성경 대신에 인간 이성, 특히 자연과학의 성과나 가능성을 신뢰한다. 그렇다면 이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성경 내용을 신화로 치부하는 것이 지성인다운 태도일까? 반대로 신앙인들은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적인 학문을 거부해야만 할까?

이러한 고민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나타났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 초기에도 신앙과 이성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중세인들은 이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중세 스콜라에서 벌어진 ‘성찬례 논쟁’

‘스콜라’(Schola)라고 불리는 중세 학교는 ‘7 자유학예’(artes liberales)를 주로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문법학, 논리학, 수사학 3학과는 모든 학문의 기초를 이루었다. 중세 시대에는 문법학과 논리학을 합쳐서 종종 ‘변증론’이라고 불렀는데, 카를 대제 이후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변증론자’는 변증론이야말로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했고 신학도 변증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세력이 커질수록 반대하는 쪽의 반응도 격해졌다. ‘반(反)변증론자’는 “변증론이란 신학의 고유한 보물을 훔쳐가기 위해 ‘악마가 만들어낸 발명품’이거나 기껏해야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당시 논쟁의 열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샤르트르 주교좌성당 학교에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와 ‘란프랑쿠스’(Lanfrancus)라는 우수한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의 변증론 관련 지식은 매우 뛰어나서, 수업시간에 수준 높은 질문으로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후 란프랑쿠스는 신을 명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겠다며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했다.

한편 베렌가리우스는 변증론 공부를 계속하여 최고의 명성을 얻었고, 이를 신학에 적용하고 싶어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성경의 수많은 구절을 일일이 해석하는 대신, 가톨릭 미사 중에 가장 핵심적인 문장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나의 몸이다”(Hoc est enim corpus meum)라는 성찬기도문에 변증론을 적용하는 식이었다. 이 문장 안에 사용된 지시대명사나 인칭대명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 ‘이것’(Hoc)은 ‘빵’ 또는 ‘예수의 몸’, 아니면 ‘예수의 몸으로 변화되는 빵’을 가리킨다는 등의 답변이 나왔다. 그러나 베렌가리우스는 어떤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이들은 베렌가리우스가 쏟아내는 질문들이 듣기 불편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뛰어난 변증론자인 베렌가리우스를 논박하지는 못했다.

문법학-논리학 합친 ‘변증론’
신학-변증론 결합 싸고 논쟁

스콜라철학의 아버지 안셀무스
‘분열 사회’ 대화의 가능성 열어

성경 의존 거부한 ‘모놀로기온’
이성으로 그리스도교 진리 ‘증명’

그때 수도사가 된 란프랑쿠스가 자신의 옛 친구를 비판하며 논쟁에 가담했다. 베렌가리우스가 변증론으로 신학을 농락하는 일을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란프랑쿠스는 성찬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변증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이용해 새롭게 설명했다. 둘 사이의 토론이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개입했다. 아직 제대로 결론이 나지도 않았는데 란프랑쿠스의 일방적인 승리를 선언해 버렸다. 더욱이 베렌가리우스에게는 파문당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며 주장의 철회를 강요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개입하여 변증론자의 패배를 선언했지만, 이성적인 열망이 강했던 사람들은 이런 성급한 결정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변증론자들은 권위로 억누르려는 교회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렇게 분열된 중세 사회에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이가 바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34~1109)다.

1677년 베크 수도원 전경. 동 제르맹(17~18세기),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강조한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의 부유한 귀족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사망한 뒤 유명한 학교들에서 철저한 변증론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059년 노르망디 지방의 베크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베크 수도원장은 성찬례 논쟁으로 명성을 얻은 란프랑쿠스였다. 안셀무스는 수도원의 엄격한 훈련과 더불어, 수도원 도서관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를 포함한 다양한 학자들의 책을 섭렵했다. 1067년에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제자인 동료 수사들을 위해 많은 작품을 썼고, 교육에 힘써서 베크 수도원 학교를 유럽 최고의 학교로 발전시켰다.

안셀무스가 최초로 쓴 단행본인 <모놀로기온>(Monologion) 서문에 따르면, 제자들은 그에게 성경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책을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러한 요청에서 베크 수도원 학교의 달라진 분위기가 잘 나타난다. 과거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을 신앙과 신학을 위한 첫째 원천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찬례 논쟁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 성급하게 중단된 이후, 수도원 학교의 젊은 학생들은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논증을 기피하고 있었다.

안셀무스는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제자들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그는 <모놀로기온>에서 이성적인 방식만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매우 과감한 시도였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안셀무스가 여러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책이 필사되어 회람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반변증론자들은 <모놀로기온>의 저술 방식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란프랑쿠스는 제목을 지어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 책을 받았을 때, 안셀무스에게 풍부한 성경 인용을 덧붙여 다시 쓰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안셀무스는 “자신은 스승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모놀로기온>, 머리말)며 거절했다.

안셀무스는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나하나 오직 이성적 숙고로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어떤 것도, 심지어 신의 존재마저도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출발했다. 안셀무스는 자신의 두 번째 저서인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에서 소위 ‘존재론적 증명’을 통해 성경의 권위나 경험적 사실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논리적 추론으로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성경의 진리를 계시해주신 신과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해주신 신이 동일한 분이라는 확신에서 나왔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 작자 미상(16세기 말 추정),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

스콜라 철학의 목표 ‘신앙과 이성의 조화’

안셀무스에 따르면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말처럼 신앙이 우선이다. 그렇지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표현처럼 신앙에는 반드시 이성이 뒤따르면서 그 근거를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는 믿음의 내용을 이성으로만 설명하려는 변증론자와 신앙에 대한 이성의 개입을 완전히 거부하는 반변증론자 모두를 비판했다. 그에게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목표로 제시한 ‘신앙과 이성의 조화’는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이끄는 좌우명이 되었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후대 학자들에 의해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정점에 달하는 교부 철학과 13세기에 체계적으로 완성되는 스콜라 철학을 매개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신앙을 지니지 않은 이들은 물론 안셀무스의 입장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그의 시도가 과연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자신이 지닌 입장에 매몰되지 않고 이를 진지하게 숙고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이성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대인에게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