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11) 십자군전쟁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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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1840년, 들라크루아,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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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Deus lo vult!)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는 군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교황 우르바노(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군중들이 화답한 것이다. 1096년부터 무려 200년 넘게 이어진 십자군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양 중세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십자군 전쟁은 도대체 왜 일어났으며, 어떤 결과를 남겼는가?
십자군 전쟁의 발생 배경
이슬람이 발흥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도 그리스도교도는 평화스럽게 성지를 순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셀주크 튀르크라는 과격한 성향의 이슬람 민족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그리스도의 무덤 성당’은 파괴되었고 순례객이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했다. 더욱이 튀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마저 위협하자, 자존심 강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도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알렉시우스 황제의 청을 받아들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슬람으로부터 신의 교회를 해방시키자”고 주창했다. “십자군에 참여하면 속죄행위로서의 고행을 모두 면제받게 해주겠다(全大赦·전대사)”는 교황의 약속 때문에 처음에는 많은 이가 순례하는 자세로 전쟁에 참여했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은 성지순례의 자유를 되찾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정치·사회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우선 교황은 십자군 전쟁이 1054년에 갈라진 그리스 정교회를 다시 로마 교회로 통합시키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더욱이 종교적 목적의 대규모 원정을 주창함으로써 최대의 적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를 원했다.
한편 중세의 기사들은 평화가 정착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공격성을 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장자 상속에서 제외된 귀족들은 유럽 안에서 더 이상 찾기 힘든 자신만의 새로운 영지를 십자군 전쟁을 통해 획득하기를 바랐다. 또한 당시 도시 발달의 주역이 된 상인들은 전시의 군대 수송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사치품들을 싸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렇게 십자군 대부분은 ‘악’으로 규정된 이슬람 세력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욕망 때문에 참여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같은 일부 정신적 지도자는 전쟁을 통한 문제해결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 목소리는 대중들의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
십자군 전쟁의 경과
십자군 전쟁은 처음부터 혼란을 겪었다. 군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위 ‘군중 십자군’ 10만명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가 8만명 넘게 몰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훈련받은 제1차 십자군이 각지에서 원정에 나섰고, 콘스탄티노플 근처에서 합류하여 알렉시우스 황제를 알현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식량이나 정보 등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전쟁터로 내몰렸다. 십자군 본진은 군수물자를 약탈해 자체 조달하며 니체아(니케아), 에데사, 안티오키아 등을 거쳐 예루살렘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사분오열되어 있던 이슬람 쪽의 상황이 십자군의 승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1099년, 드디어 십자군은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는 악전고투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지중해 연안을 따라 십자군 왕국들이 건설되자, 이슬람 제후들은 전쟁의 성격을 비로소 깨달았다. 종교 사이의 전쟁이라고 생각한 이슬람 쪽에서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결국 1144년에 핵심 도시였던 에데사가 이슬람 손에 넘어가면서 제2차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십자군 전쟁은 8차까지 이어졌는데, 그중 제3차 때는 가장 강력한 양측 지도자들이 맞붙게 되었다. 이슬람에서는 술탄 살라딘이, 십자군에서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King Richard the Lionheart)가 군대를 이끌었다. 뛰어난 지도력을 지닌 술탄 살라딘은 용맹하면서도 관용을 잘 베풀어서 이슬람 제후들을 하나로 통합했고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했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내분으로 약화된 전력을 가지고 용감히 싸웠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십자군은 평화로운 성지순례를 보장하겠다는 살라딘의 확약에 만족하며 물러나야 했다.
전쟁을 옹호한 십자군 대부분
세속적 욕망으로 전쟁에 참여
‘악’인 이슬람 맞선 ‘성전’ 강조
평화적 관습과 가르침도 저버려
성스러운 전쟁 핑계댈 것 아니라
불의와 충돌 근본원인 제거해야
제4차 십자군 전쟁은 가장 추한 전쟁으로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이상이 얼마나 철저히 변질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1204년 출발한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수송용 선박을 대주는 대가로, 콘스탄티노플부터 공격하라고 요구했다. 폭도로 돌변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이 거의 천년 동안 축적한 모든 부를 약탈했다. 그 뒤에도 십자군 운동은 1291년까지 지리멸렬하게 이어졌지만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전쟁이 어떻게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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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은 8차까지 이어졌는데, 제3차 때는 가장 강력한 양측 지도자들이 맞붙게 되었다. 이슬람에서는 술탄 살라딘이, 십자군에서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사진)가 각각 군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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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럽지 못한’ 십자군 전쟁
교황들과 베르나르두스 수도원장 같은 전쟁 옹호자들은 ‘성스러운 전쟁’, 즉 성전(聖戰)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신앙을 수호하는 ‘성전’에 참여하는 것은 수도자가 되는 것 이상으로 보람 있는 일이며, 더욱이 십자군 전쟁은 악한 세력인 이슬람을 몰아내기 때문에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고 강변했다. 이들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경받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했다.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은 없기”(<신국론> IV,15) 때문에, 타자의 불의를 막아내기 위한 ‘성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쟁 옹호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정한 의도는 주목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전쟁을 통해 손상된 정의를 회복할 때도 적에게 수치나 분노의 감정을 주어서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 또한 전쟁에서는 적대감을 최대한 억제하고 소중한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전’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신앙의 지혜를 가진 이에게는 도무지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강조했다.
십자군 전쟁을 주창하던 이들은 또한 중세 시대에 발전한 “평화 운동”의 관습도 무시했다. 이미 10세기 말부터 프랑스 교회는 “신의 평화”라 하여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고, “신의 휴전”이라 하여 특정한 축일에는 전투 행위를 금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십자군 전쟁에서는 이러한 안전장치들이 모두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의 명령, 거룩한 의무라는 말로 전쟁의 정당성이 확보됨으로써 일반 전쟁보다 더욱 잔혹한 학살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행위에 자부심을 가진 군인들은 잔혹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학살을 경험한 무슬림은 무자비한 자들로 규정된 십자군에 맞서서 지하드(Jih?d)라는 이슬람식 ‘성전’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런 폭력의 악순환은 십자군 전쟁 때부터 시작되어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종교전쟁이라 불리는 십자군 전쟁은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십자군 전쟁이 보여주듯, 종교나 그 밖의 그럴듯한 이상을 내건다고 해도 전쟁은 애초에 숨겨진 탐욕들 때문에 일어나거나,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변질되고 만다. 십자군 전쟁을 옹호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스승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신을 목적으로 ‘향유’하는 대신, 세속적 권력이나 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전쟁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자기에게 정복된 인간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평화의 법률을 부과하고 싶어” 하는 욕심에서 발생한다.(<신국론> XIX,12.1) 오히려 통일을 기하려는 노력이 커질수록 그만큼 분열이 초래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빚어진다. 전쟁치고 당사자들의 단결을 초래하지 않는 전쟁, 평화를 명분으로 삼거나 희구하지 않는 전쟁은 없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불바다”, “선제타격” 등을 외치는 강경론자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념을 강요하기 이전에 심각하게 성찰해야 한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개인들의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우리는 ‘성스러운 전쟁’의 핑계를 찾을 것이 아니라, 불의와 충돌의 근본원인을 서로의 마음에서 제거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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