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0.27 19:27 수정 : 2016.10.27 19:56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12) 아리스토텔레스 재발견

아리스토텔레스와 대 알베르투스의 글을 정리한 라틴어 책. 1270년경, 스위스 슐랏, 아이젠도서관.
“형이상학과 자연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1215년 신흥 파리대학은 학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관련 강의를 금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대학에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12세기부터 새롭게 번역 소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이 금지령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 금지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서구 세계에 등장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박식한 학자답게 광범위한 분야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의 스승 플라톤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서구 세계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단지 보에티우스가 번역해서 전해 준 <범주론>과 <명제론> 덕분에 ‘논리학자’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11세기부터 변증론이 발달하면서 아벨라르두스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가 호기심에 가득 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라진 저서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했던 책들을 주로 발견한 곳은 ‘재정복 운동’(Reconquista)을 통해 다시 그리스도교화된 스페인 중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지역 등이었다. 아랍 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아리스토텔레스 저서들과 그 주해서가 이곳에 남아 서구 학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랍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현지 학자들의 도움으로 금세 대규모 번역 운동이 벌어졌다. 교회와 국가의 지원까지 더해져 번역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1120년부터 1200년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저서들 대부분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파리대학은 왜 이처럼 어렵게 재발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거부했을까? 그리고 이 강의 금지령은 과연 성과를 거두었을까?

강의 금지령이 내려진 이유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충돌을 일으키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와 운동의 영원성을 인정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신이 시간 안에서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였다”(Creatio ex nihilo)고 가르쳤다. 두 번째로, 아랍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주해하는 과정에서 ‘단일지성론’이 등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과 동시에, 인간 지성이 죽음 이후 존속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등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랍 철학자들은 “한 인간이 죽게 되면 그 지성은 단일한 우주 지성으로 되돌아간다”라는 ‘지성의 단일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결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보상이나 처벌을 받을 개별적인 인간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리스도교의 최후 심판과 인간의 구원 전체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해 낸 자연법칙이 절대적이라면, 기적이나 신의 섭리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결국 1210년 파리 종교 회의에서, 그리고 1215년에는 파리대학 학칙에서 강의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충돌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책 교육 금지

호기심에서 학자들은 연구 ‘박차’
유럽문화 지형 바꾼 새바람 불어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대 알베르투스, 스콜라신학 완성

그러나 이 명령이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의 소유나 연구를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수들은 비판을 위해서라도 자유롭게 그 저서들을 읽고 연구할 수 있었다. 단지 아직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의를 금지했을 뿐이다.

강의 금지령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내려졌는데, 이것은 그 명령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더 큰 궁금증을 가지고 그의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선구적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서들에는 그리스도교에 부합하는 내용이 더 많으므로 교회를 위해서도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231년의 금지령은 “신학위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저서에서 위험한 부분을 수정 또는 제거할 때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약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절충적 태도는 학자들에게 더 큰 호기심만 불러일으켰다.

드디어 1255년 파리대학의 새로운 학사 규정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을 모두 사용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강의 금지령이 내려진 지 채 50년도 되지 않아서 이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와 강의가 오히려 권장되었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철학자가 말하기를(Philosophus dicit)’이라고 글을 시작하면, 이는 곧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이라고 읽힐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의 스승으로서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13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서 필사본이 크게 유행을 했다. 이렇게 완성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을 통해 13세기에 스콜라철학이 융성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의 사상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는데, 향후 200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로 불릴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다양한 경향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와 강의가 자유로워졌다고 해서 모든 학자들이 획일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다수의 주교와 대학 총장이 포함된 보수적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모든 참된 지혜가 성경 안에서 발견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지혜를 가르쳐준 스승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존경했기 때문에 ‘보수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견지했다. 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기껏해야 자연학 분야의 전문가일 뿐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등장했다. 이 견해의 추종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지혜의 화신이며 절대적으로 존경받아야 할 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심취한 그들은 독창적인 연구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올바로 주해하는 일에 만족했다. 그들은 가장 뛰어난 ‘주해자’(Commentator)로 인정받던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를 존경했기 때문에, 종종 ‘라틴아베로에스주의자’라고도 불렸다. 그들의 대부분은 상위 학부에 속한 신학을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인문학부의 젊은 교수들이었다.

대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걸출한 제자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자신들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며 스콜라 신학을 완성했다. 그림은 대 알베르투스의 설교. 프리드리히 발터, 15세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두 극단적인 경향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강조했던 ‘중용’의 길을 가려는 학자들도 등장했다. 그 학자들은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불렸다. 그들은 ‘보수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처럼 선입관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반대하지도 않고,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처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이끈 대표자는 대(大)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93~1280)였다. 그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이 내려져 있는 시기에 그 중요성을 간파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를 주해할 정도로, 열린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동식물과 광물계의 관찰과 천문학적 연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관찰 결과와 차이가 날 때는 과감히 수정했다. 대 알베르투스는 이런 열린 정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걸출한 제자를 길러냈다. 그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스콜라 신학을 완성했다.

서구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재발견했던 과정은 우리나라가 서양문화를 처음 만나면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쇄국정책만으로는 무력으로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대주의로 기울어진 개화파의 무분별한 서구 문화 추종도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어렵다. 주체성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과제는 한 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대 알베르투스는 ‘전통에 근거한 주체의식과 새로운 사상에 대한 열린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