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13)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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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유럽 대학들은 북부 유럽 대학들에 비해 학생들의 지위가 교수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대학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림은 법학으로 유명했던 중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강의 장면. 1350년께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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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비선실세’의 딸이 다니던 한 유명대학교 총장이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권력을 등에 업은 부정입학이라며 여론이 떠들썩한데, 그 학생에게 한 교수는 학점 특혜를 제공하고 무려 55억원의 연구비를 수주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해 언론들은 ‘정부, 돈줄 쥐고 대학 통제 … 이대 사태 불렀다’라는 등의 비판 기사를 쏟아냈다. 실제로 ‘개혁’을 주도한다던 교육부와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대학 당국은 진정한 학문 발전보다는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대학을 취업 기관으로 만드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해 왔다. 이런 ‘대학의 기업화’가 결국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법까지 저지르도록 부추겨 대학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렇게 방향을 잃은 대학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답을 찾기 위해 서양 최초의 대학들이 생겼던 중세의 한복판으로 되돌아가 보자.
중세 대학의 발생 배경
서구에서는 11~12세기에 늘어난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부가 축적되면서 교육의 기회를 찾는 수요가 급격히 커졌다. 주로 시골에 있던 수도원학교는 물론이고, 도시에 있던 궁정학교나 주교좌성당학교로도 이 새로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공업자와 상인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한 개인학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새로 생긴 학교들끼리 경쟁이 과열되자, 아주 유명한 교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사들은 안정되게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한 교사가 모든 과목을 강의하는 방식으로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개인학교의 교사들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기존의 주교좌성당학교나 수도원학교도 동참하면서 12세기 말부터 거대한 조직이 탄생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의 연합체’(Universitas scholarium et magistrorum), 즉 ‘대학’(University)이 탄생한 것이다.
요즘에는 대학교라고 하면 특정 장소에 세워진 건물들을 떠올리지만 처음 대학이 출발할 때는 시설과 장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유명 대학들도 초창기에는 건물을 전혀 소유하지 못했고 필요에 따라 성당이나 공회당 등을 빌려 강의를 개설했다. 대학이라는 연합체는 훌륭한 교수들과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만으로도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연합체 안에서 교수들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과목에 연구와 강의를 집중했다. 학문의 분업화를 통해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각 학문은 훨씬 더 체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유형과 교육 방식
대부분의 대학이 학칙도 갖추지 못한 채 출발했기 때문에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초기에는 통일된 형태나 조직도 없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의 중심적인 권한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라 두 유형으로 구분되었다. 지역적으로 알프스 남쪽 지역에 학생 중심의 대학들이, 그 북쪽에는 교수 중심의 대학들이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 알프스 남쪽인 이탈리아 대학들의 경우 학생들이 중심에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법학, 살레르노 대학은 의학이 가장 유명했는데 학문의 특성상 나이 든 학생들이 많았다. 이들이 결성한 학생 조합이 교수를 선발하는 일까지 관장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프스 북쪽에 자리한 파리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은 교수들의 조합이 중심이 되었다.
중세 대학이 체계를 갖추어 가면서 공통적인 구조가 생겨났다. 어린 나이의 신입생들은 ‘인문학부’(facultas artium)에 입학해서 4~6년가량 ‘7 자유학예’(Septem Artes Liberales)를 비롯한 기초학문과 철학을 배웠다. 인문학부에서 학위(baccalaureus)를 취득한 학생들만 신학, 의학, 법학으로 이루어진 소위 ‘상위 학부’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다루는 의학, 사회적 생명을 다루는 법학, 사후의 영적인 생명까지 다루는 신학은 인문학부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춘 다음에야 진학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12세기 말 서구 최초 대학 설립
‘교수와 학생 연합체’로 탄생
능력만으로 교수·학생 선발
학문에의 사랑으로 똘똘 뭉쳐
정치 세력 통제 맞서 ‘총파업’
‘학문 자유’ 지킨 자주적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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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첸나의 의학정전에 묘사된 세계 최초의 살레르노 의과대학, 볼로냐 대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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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자유 지키려던 초기 대학의 노력
초기 대학들은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교수와 학생들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대학은 출신 성분이 아닌, 순수하게 ‘능력’만을 선발 기준으로 삼았다. 평민 출신의 교수일지라도 공평하게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귀족 자제의 학생이나 그렇지 않은 학생이나 차별 없이 공부했다. 이러한 평등의 실천은 철저한 계급사회인 중세의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이었다. 물론 가난한 학생들은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생계비 마련 때문에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을 위해서 부유한 사람들은 무상으로 숙식이 해결되는 기숙사(Collegium)를 기증했다.
신분, 국적, 언어, 재력 등을 초월해서 모여든 당시 대학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바로 학문적인 관심, 즉 지식 탐구의 열정과 의지였다. 이렇게 중세 대학은 ‘학문에 대한 사랑’(amor scientiae)을 토대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공동체에서 유래했다. 중세의 대학인들은 설립 이념을 지키기 위해 매우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고, 필요에 따라서 교황과 왕을 자신의 보호자로 삼기도 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의 연합체’인 대학은 개인학교가 당했던 불이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선 개인학교에 부과되던 과도한 세금에 체계적으로 저항했다. 만일 대규모 대학 구성원들이 다른 도시로 떠나면 도시의 재정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대학들은 연합의 힘을 통해 대학생의 병역 면제라는 특권도 받아냈다.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한 대학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도시나 국가는 대학을 자신의 통제 안에 두려고 했다. 그래서 신흥 대학들에게는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간섭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자유를 지켜 줄 더 큰 권위가 필요했다. 대학들은 로마에 있는 교황이 자신들을 옹호해주리라 기대했다. 실제로 각 대학이 ‘교황청 직속 대학’으로 인정된다면,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많은 대학이 자체적인 사법권까지 가지게 되었다.
초기 대학이 자신을 통제하려던 정치 세력에게 저항한 대표적인 예는 1229년의 총파업이었다. 당시 대학이 누리는 특혜를 시기하는 시민들도 많았고 일부 대학생들은 이를 남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타운(town)과 가운(gown)’, 즉 도시민과 대학생 사이에 가끔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폭력 사태 중에 파리 대학생 한 명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학 경찰은 일반 시민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기 때문에 파리 경찰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파리 경찰은 범인의 체포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 파리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총파업을 강행하여 파리를 떠나 몽펠리에 대학 등으로 이주해 버렸다. 파리 당국은 2년 동안의 총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실추된 명예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사과했다. 대학은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서야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중세 대학인들은 매우 자주적인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자신들이 살 조건과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독립되어 있었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대학들이 특권을 남용하는 경우도 발생했지만, 적어도 그 중심에는 항상 ‘학문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중세 대학이 설립 당시 추구했던 ‘학문에 대한 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쟁’은 현대의 대학이 위기를 극복할 방향을 제시한다. 현대 대학에서는 예전보다 더욱 교묘하게 자본을 통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대학인들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매몰되는 일 없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이상을 뚜렷이 자각해야 한다. 또한 중세 대학에서 실천한 평등의 원리에 따라, 국가와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재능 있는 학생들이 금전적인 이유로 대학교육의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 본래부터 대학의 주체였던 교수와 학생이 대학 운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손상된 대학의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취업률이나 논문 숫자 따위 어설픈 기준으로 각 대학을 경쟁으로만 몰아가서는 안 된다. 각 대학의 특성을 살리면서 시너지 효과도 낼 수 있는 연구 및 교육 공동체를 다시 구성할 때, 비로소 ‘지혜의 집’(domus sapientiae)이라는 초기 대학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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