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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24 20:36 수정 : 2016.11.28 09:41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14. 성 프란치스코

‘자발적 가난’ 선택한 부잣집 아들
청빈한 ‘작은 형제들’ 큰 호응 얻어

‘사랑과 평화’ 설교에 술탄도 감화
동물들과도 교감했다는 일화 유명

“그가 선포한 평화는 침묵·타협 아냐
권력 준엄하게 꾸짖는 정의와 평화”

2016년 11월 12일, 100만이 넘는 국민이 서울 시내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다. 탐욕스러운 비선 실세가 놀랍도록 무능한 대통령을 이용하여 재벌들의 부를 강탈하고 국정을 농단한 사건이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95%의 국민은 크게 좌절했고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 속에 어떻게 이 난국을 수습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중세 교회 안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특히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자, 부를 추구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면서 교회를 큰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위기를 타개할 방향을 제시한 이는 교황이나 뛰어난 학자가 아니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면서도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했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 1181/2~1226)였다. 도대체 그가 누구기에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주도하는 현재 교황도 ‘프란치스코’란 이름을 택한 것일까?

‘가난 부인’과 사랑에 빠진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디 베르나르도네는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놀기를 좋아했던 청년 프란치스코는 빼어난 미모와 대범한 씀씀이로 친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친구들이 궁금해서 어떤 여인이냐고 묻자, 그는 생뚱맞게도 ‘가난 부인’(domina paupertas)이라고 답했다. 프란치스코는 질병을 앓던 중 복음서를 읽다가 그 책이 가르치는 ‘가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심을 바로 실천에 옮기려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한센병으로 온몸이 물러진 환자를 봤을 때 징그러워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가장 고통받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차츰 용기를 냈다.

하루는 프란치스코가 텅 빈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프란치스코, 내 집이 무너져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그는 이 음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거의 폐허가 된 성당을 고치기 위해 부친의 값비싼 옷감을 내다 팔았다. 이를 안 그의 부친 피에트로는 크게 노해서 질책했지만 아들이 마음을 돌리지 않자, 주교 앞에서 아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란치스코는 대중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뿐만 아니라 입고 있던 옷마저 다 벗어 부친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을 실천하는 프란치스코의 설교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탈리아 각지에서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프란치스코 탁발수도회의 탄생

추종자들이 급속히 늘어난 것은 프란치스코의 인품과 메시지 때문이었지만, 부와 권력을 추구하던 이들이 교회마저 장악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세의 융성기로 접어들면서, 부유한 귀족이나 상인들과 어울리던 성직자들도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교회가 소유한 부동산도 많아지고 귀족들이 교회의 고위직을 독차지했다. 귀족 출신의 주교들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부를 축적하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청빈을 표방하던 수도원들도 거대한 영지를 가지고 수도원 학교를 운영하면서 부와 명성을 탐했다. 교회의 세속화가 심해지자 평신도를 중심으로 사치스러운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복음화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카타리파(또는 알비파)와 발두스파는 부유해진 수도원과 호화롭게 살면서 설교 의무를 등한시하는 고위 성직자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교황과 주교의 권위마저 무시하자, 교황은 이들을 개종시키려고 많은 설교사를 남프랑스로 파견했다. 그러나 사치스럽게 치장한 교황특사들의 설교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실제로 가난하게 생활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려는 ‘탁발수도회 운동’이 벌어졌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작은 형제들’(fratres minores)은 동시대에 생겨난 ‘도미니코 수도회’와 더불어 자발적인 가난을 수도회의 이상으로 삼았다.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창설된 지 10년도 되지 않아 수도자가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가장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돌보는 데 열정을 불살랐다.

적들과 다른 생명체마저 감화시킨 평화의 사도

프란치스코는 설교를 통해 사랑과 평화를 외쳤다. 그의 설교는 그를 적대시하던 이들에게마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작은 형제회의 회칙 인준마저 거절했던 교황들도 시간이 지나자 복음정신에 투철한 프란치스코의 인품에 감화되어 오히려 설교를 청해 듣게 되었다.

평화를 선포하려는 프란치스코의 열정은 국경과 종교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1219년 제5차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이집트의 술탄을 찾아갔다. 술탄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했다. “저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각하와 각하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러 왔습니다.” 술탄은 그의 설교를 경청했고, 겸손과 용기를 갖춘 인품에 감동했다. 술탄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프란치스코의 안전을 보장하고 떠나보내면서 “당신의 기도 중에 나를 잊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이집트를 떠난 프란치스코는 1220년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평화에 대한 사랑에 감명받은 무슬림들은 예외적으로 ‘작은 형제회’가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예루살렘 성묘교회 안에 거주하며 성지를 지켰던 전통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프란치스코는 날아다니는 새나 짐승과도 교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풍기는 평화로운 기운 때문에 동물들조차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 느껴 그를 따랐을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극도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며 입은 다섯 상처를 비롯한 여러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그를 가장 괴롭힌 질병은 안질이었다. 시력을 잃어가는 중에도 그는 창조주를 찬양하는 ‘태양의 노래’를 불렀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이렇게 프란치스코는 천체 하나하나를 찬양하고, 그 다음에는 공기와 물 혹은 불 등 지구를 이루는 것들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고 있다. 심지어 그는 노래의 마지막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육체의 죽음과도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반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질서를 수호함으로써 국민들을 지켜야 할 수많은 정부 관료와 검찰, 경찰들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채 권력과 부 앞에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어두운 현실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더욱 빛을 발한다. 자신이 얼마든지 정당하게 누릴 수 있던 부마저 포기하고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VIP’라는 단어만으로도 ‘알아서 기었던’ 이들에 반해, 프란치스코는 교황과 술탄 앞에서도 당당하게 평화에 대한 소신을 밝혀 눈길을 끈다.

프란치스코가 선포했던 평화는 불의를 보고 침묵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태양의 노래 마지막에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은 큰 화를 입을 것이라 외치며 불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와는 반대로 정의와 평화를 지키다 죽음을 맞은 이들은 영원한 죽음을 피할 것이라고 위로했다.

100만 시민들이 분노의 촛불을 든 밤,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르는 평화의 사도들이 광화문을 찾았다. 불의한 권력에 당당하게 맞서면서도 철저한 ‘비폭력’ 원칙에 따라 자신의 뜻을 펼친 시민들, 특히 시위 후에 남겨진 쓰레기마저 자발적으로 수거하려 자세를 낮춘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타락해 가던 중세 교회를 구원하는 빛은 교황청이 아니라 허름한 수도원에서 새어 나왔다. 암흑사회로 전락한 우리나라를 구원할 빛도 청와대나 국회가 아니라 시민들의 작은 촛불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술탄 앞의 프란치스코, 지오토(1266~1337),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치스코, 지오토,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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